로마노 폰티피시 적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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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 폰티피쉬는 교황 바오로 6세가 1975년 10월 1일 공포한 교황 선거를 지배하는 사도교 헌법이다. 그것은 교황 선출 과정에서 많은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그것은 최대 선거인단 수를 120명으로 정하고, 80세 이상의 추기경들은 교황 선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그가 이미 제정한 규칙을 좀 더 형식적인 맥락에서 다시 작성했다.
충당금
1970년 11월 잉그라베센템에서 교황 바울은 80세 이상의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교황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새로운 사도교 헌법은 콘클라베의 조직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는 맥락에서 그 규칙을 통합했다.[a]
1973년 3월 새 추기경 선출을 위한 구성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 바울은 선출인원을 120명으로 제한하고, 비록 추기경은 아니더라도 동방예례교회의 총대주교와 주교회의 지도부를 유권자로 추가하는 등 교황 선거 절차를 수정하는 방안을 논의했었다.[1] 그는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각을 버렸고, 이 사도교 헌법에서는 추기경 선출자의 최대 수를 120명으로 정했다. 그의 80세 한도가 1971년 1월 1일 발효되었을 때, 콘클라베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추기경 102명이 있었다.
교황 바울은 또한 콘클라베의 물리적 구성에 대해 시스티나 성당의 창문에 판자를 씌워야 한다는 요구 등 엄격한 규제를 가했다. 추기경들은 1978년 두 번의 교황 회의 동안 이 제한사항이 과도하다는 것을 알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사도교 헌법인 우니베르시 도미니치 그레기스(1996)에서 이를 철회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63년 6월 당선된 뒤 왕위에 올랐으나 1964년 11월 교황 티아라 착용을 포기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헌법에 그는 대관식이 선거 뒤에 따를 것이라고 썼다. 그의 직계 후계자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왕위에 오르지 않기로 선택했고,[3]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선거 과정을 수정할 때 대관식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메모들
참조
- ^ Hofmann, Paul (6 March 1973). "Pope, at Installation of Cardinals, Details Possible Reforms in Electing Successors" (PDF). The New York Times. Retrieved 4 December 2017.
- ^ Doty, Robert C. (14 November 1974). "Pope Paul Donates His Jeweled Tiara To Poor of World". New York Times. Retrieved 4 December 2017.
- ^ "HOMILY OF HIS HOLINESS JOHN PAUL II FOR THE INAUGURATION OF HIS PONTIFICATE". Vatican. Libreria Editrice Vaticana. 22 October 1978.
외부 링크
로마노 폰티피시어 적용 가능 텍스트:
- 영어로:
- 라틴어로 Libreria Editrice Vaticana(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및 스페인어로 텍스트 오른쪽 상단에 링크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