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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 교황 콘클라베

1667 papal conclave
교황 콘클라베
1667년 6월
날짜 및 위치
1667년 6월 2-20일
교황청, 사도 궁전
교황 선출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
이름: Clement IX
Pope Clement IX.jpg
1655

1667년 교황 콘클라베교황 알렉산더 7세의 서거에 소집되어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 추기경이 교황 클레멘스 9세로 선출되면서 막을 내렸다.콘클라베는 알렉산더 7세와 어반 8세의 추기경 조카들에게 충성하는 파벌들이 지배했다.그것은 1655년 콘클라베에서 출현한 스쿼드론 볼란테, 즉 플라잉 편대의 계속적인 존재를 보았다.콘클라베는 또한 당시 카톨릭의 양대 강국인 스페인과 프랑스가 모두 로스피글리오시의 교황 선출을 지지한다고 보았다.결국 프랑스 대사가 알렉산더의 조카인 플라비오 치기에게 뇌물을 주고 로스피글리오시를 지원하면서 로스피글리오시의 당선이 성사됐다.콘클라베에 이어 모든 정당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교황을 선출했다고 믿었다.

배경

그의 당선 후 알렉산더 7세는 처음에는 족벌주의에 반대하여 추기경 조카의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했었다.추기경단 구성원들은 그에게 가족 구성원들을 권좌에 앉히는 것을 재고하라고 촉구했고, 그는 결국 동의하면서 치기 가문의 동료들을 교황정부에 임명하고 추기경 조카를 임명했다.[1]

알렉산더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프랑스와 교황의 외교 관계는 악화되었다.프랑스는 1664년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와 교황군의 대립으로 아비뇽을 침공했다.프랑스군은 알렉산더의 사과가 있은 후에야 아비뇽을 떠났다.프랑스 정부의 지도자인 마자린 추기경은 알렉산더에게 더 많은 프랑스 추기경을 만들 것을 촉구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알렉산더는 그의 추기경 시절 40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만들었고 그 중 33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1]

카디널스 칼리지 내에서는 가톨릭 군주국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 추기경 파벌은 스쿼드론 볼란테라고 불렸으며, 1655년 콘클라베 때 일어났다.'플라잉 편대'로 번역되는 이 이름은 세속적인 군주의 지지를 받는 후보보다는 교황직에 대한 최고의 관심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믿는 후보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2]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가톨릭교회로 개종하기 전에 스웨덴 왕위를 버리고 로마로 이주한 후 세속적인 지지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데키오 아졸리노와 친해졌다.[3]

콘클라베

콘클라베가 열렸을 때 64명의 추기경 선출자가 참석했다.알렉산더가 사망할 당시 칼리지는 당시 70명의 회원을 수용하고 있었다.그가 사망한 시점과 1667년 6월 2일 콘클라베 개회 사이에 추기경 2명이 사망했고, 아직 4명이 로마에 도착하지 못했다.1605년 콘클라베 이후 대학 측은 꾸준히 60명 이상의 회원을 콘클라베에서 개최하도록 해 혼잡함이 이슈가 되었다.칼리지는 이전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들의 혼잡과 사망에 대한 우려를 감안할 때 바티칸에서 콘클라베를 개최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논의했지만, 나이 든 추기경들은 콘클라베를 그곳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1]

알렉산더 7세는 1667년 콘클라베 기간 동안 34명의 추기경을 만들었다.그 중 10명은 알렉산더의 조카플라비오 치기를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생활 방식이 볼품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1]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 중 16명은 어반 8세의 창작품이었고, 이들은 모두 어반 8세의 조카 중 한 명인 안토니오 바베리니 감독의 선례를 따르기로 합의했다.[1]콘클라베는 추기경 조카들에게 충성하는 정당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여러 군주에게 충성하거나 플라잉 편대의 일원이었던 선거인들은 조카들이 이끄는 두 큰 정당 사이에 고르게 분열된 채 분열되어 있었다.[4]프랑스인들은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8명의 선거인이 있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6명이었고, 플라잉 편대는 11명이 있었다.[5]

콘클라베의 시작부터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교황으로 여겨졌다.그는 콘클라베에서 주요 파벌들 중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당초 프랑스는 스페인 정부와 사이가 좋은 로스피글리오시를 지지하고 스페인인들이 로스피글리오시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키피오네 판노키에스키 드엘시를 교황직에 승진시켰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우르반 8세의 또 다른 조카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선거를 선호했다.[3]

콘클라베의 시작 부분에서 다른 심각한 후보는 지롤라모 파르네세였다.로스피글리오시와 데엘시와의 콘클라베를 유일한 실행 가능한 옵션으로 남겨둔 플라잉 편대는 파르네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플라비오 치기는 데엘시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일부 선거인들로부터 너무 열성적이라고 여겨졌다.[6]

클레멘트 9세 선거

1667년 6월 20일 아침 로스피글리오시는 1차 정밀조사에서 5표를 받았다.그는 지난 몇 주간의 조사 동안 최대 10표밖에 받지 못했다.아침 정밀 조사와 저녁에 열린 조사 사이에 로마의 프랑스 대사 찰스 다베르트 다일리는 플라비오 치기의 수입을 약속했다.그리고 나서 치기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선거인들을 로스피글리오시 당선에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데 동의했다.그날 저녁 정밀조사에서 로스피글리오시는 61표를 얻어 교황 클레멘스 9세로 선출되었다.[3]로스피글리오시는 투스카니 출신의 마지막 교황이었다.[7]콘클라베의 결론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모두 자신들이 원했던 교황을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3]

메모들

  1. ^ a b c d e 바움가르트너 2003, 페이지 157.
  2. ^ 바움가르트너 2003, 페이지 159.
  3. ^ a b c d 바움가르트너 2003, 페이지 158.
  4. ^ 1940년, 317페이지의 프리허르목사.
  5. ^ 바움가르트너 2003, 페이지 157–158.
  6. ^ 1940년, 318페이지의 프리허르목사.
  7. ^ 카스텐 1961 페이지 465.

참조

  • Baumgartner, Frederic J. (2003). Behind Locked Doors. Palgrave Macmillan. ISBN 0-312-29463-8.
  • Carsten, F. L. (1961).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olume 5, The Ascendancy of France, 1648–88. CUP Archive. ISBN 978-0-521-04544-5.
  • Freiherr von Pastor, Ludwig (1940) [1891]. Graf, Ernest (ed.). The History of the Popes. Vol. XXXI.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