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봉쇄

Blockade of Wonsan
원산 봉쇄
한국전쟁의 일부
Bombing Wonsan Harbor 1950.jpg
원산 봉쇄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나 북한 물자가 파괴된다.
날짜1951년 2월 16일 – 1953년 7월 27일
위치
원산, 북한, 일본의 바다
39°09°N 동경 127°26°E / 39.150°N 127.433°E / 39.150; 127.433좌표: 39°09′N 127°26′E / 39.150°N 127.433°E / 39.150; 127.433
결과 유엔의 승리, 원산 봉쇄 성공
호전성

국제 연합

북한
사상자 및 손실
41명 사망
부상자 158명
경비정 1척 침몰
지뢰제거기 2대 침몰
전함 1척 손상
순양함 2척 손상
파괴된 구축함 16척
프리지 3개 손상
5개의 지뢰가 손상됨
1 LSD 손상
3개의 LSMR이 손상됨[1][2]
알 수 없는
  • 피해를 입은 많은 미국 군함들은 다른 경우에 한 번 이상 타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16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원산 봉쇄는 현대사에서 가장 긴 해상 봉쇄로 861일이나 지속됐다. 주로 미국에서 온 유엔 해군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원산북한 해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1][2]

봉쇄로 공산군이 전선에서 이탈했다. 미국 함대를 향해 발사된 북한 포병들은 대부분 실효성이 없었고, 도시는 유엔 해군 항공기와 군함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1][2]

배경

원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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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작전 전투지도.

원산은 대규모 항구와 비행장, 석유 정제소, 7만5000여 명, 포병전지 여러 개를 포함해 무려 8만여 명의 병력이 있는 북한 동남해안에 위치한 전쟁 중 전략 요충지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한반도 서북 해안에 상륙한 인천해전 이후 X군단에게 서쪽으로 진격할 원산에 상륙해 8군단과 연계한 뒤 북한의 수도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1][2]

북한 해군력은 소련중국으로부터 각종 해뢰를 잘 공급받아 원산을 방어하는 데 최대한 활용됐다. 소련 군사 고문들도 보다 효과적인 광산 분야를 만들기 위해 고용되었다. 작전의 첫 번째 목표 중 하나는 지뢰의 위치를 계획하기 시작한 다음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뢰제거기의 사용은 필수품이 되었고 결국 수십 명이 봉쇄에 이용될 것이다. 원산 작전, 즉 원산 통관 작전은 상륙 예정 열흘 전인 1950년 10월 10일 시작됐다. 제독 제임스 H. 도일은 작전 통관에 사용된 수십 척의 미국 군함대인 태스크포스 90을 지휘했다.[1][2]

이틀 후인 10월 12일, 기뢰들이 소탕선인 USS PermiseUSS Pirate침몰시켜 [3]12명의 사상자와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고, 그 동안 북한 해안가 배터리의 정확한 공격을 받았다. 미 해군 태평양 함대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조선 프로그램에 새로운 지뢰제거기 생산을 시작함으로써 대응했다. 다른 선박들도 지뢰와 배터리 화재로 피해를 입었지만 해적서약서 상실이 작전 중 주요 교전임이 드러났다.[1][2]

테일보드 작전

미국 M46 패튼 전차가 원산 상륙탱크에서 하선 (1950년 11월 2일)

테일보드 작전은 미군이 원산에 상륙할 때 사용하는 암호명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에서 8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준비가 시작되었고, 10월 15일, 총 30,184명의 수천 명의 해병과 군인들이 상륙에 참여하기 위해 수송을 시작했다. 그들이 10월 20일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지뢰밭의 통관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5일 동안 X군단과 해병 1사단은 해변으로 가는 맑은 길을 기다리기 위해 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1][2]

10월 25일 상륙할 시간이 되었을 때, 북한 주민들은 이미 철수했고 영국과 남한 사람들이 이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결국 상륙은 필요 없었고 맥아더는 인천 전선에서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는 데 X군단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0월 19일, 한국군은 평양을 점령하여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미군은 11월에 제3사단이 증원군으로 원산에 상륙하는 동안 흥남초신 저수지 일대를 점령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1][2]

원산의 피난

유엔군은 원산을 오래 보유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대규모 전쟁 개입 이후 연합군은 1950년 12월 9일 원산에서 피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난민 7009명, 군인 3384명, 차량 1146명, 화물 1만13톤을 빼앗았다. 맥아더 장군의 계획은 부산 방어선을 잡고 또 다른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에서 다시 집결하는 것이었다. 북한 주민과 중국인들이 도시를 탈환하자 방어시설은 더욱 가공할 정도로 재건되고, 해뢰가 추가 배치되고, 포병전지가 새로 세워졌다.[1][2]

봉쇄

오프닝 계약

USS 맨체스터는 원산항에 있는 USS Katmai 과 나란히 있다.

봉쇄는 1951년 2월 16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861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거의 3년 동안 미국 해군 함정과 항공기가 해안 배터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미군 함정 몇 척이 육지 포화에 의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피해를 입었다. 유엔 태스크 그룹 95.2가 봉쇄에 배정되어 1951년 2월 17일 처음으로 원산을 폭격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목표로 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1][2]

2월 19일, 찰스 사령관 휘하의 구축함 오즈번함. 아커스는 원산 지역의 해안 전지에 의해 발사되었다. 그녀는 두 번의 직격탄과 몇 번의 아슬아슬한 실책을 받았고, 그가 기뢰밭에서 표류하는 동안 USS Valley Forge에서 추락한 조종사를 모터보트로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배의 선원은 청동성을 구조하기 위해 받았다. 오즈번호는 결국 1951년 4월 수리를 위해 샌디에이고로 돌아왔고, 이후 다시 북한으로 항해했다.[1][2]

2월 24일 원산항 신도리 섬이 미군 구축함 2척과 호위함 2척의 지원을 받아 한국 해병대에 포획됐다. 원산해안전지 역시 지난달 3일 유엔 군함과 결투를 벌였지만 기록적인 타격은 없었다. 전함 USS 뉴저지호는 1951년 5월 20일 첫 번째 해안 폭격 임무에 참가했다. 원산 앞바다를 순찰하던 중 북한 배터리가 발사돼 포탄 1발을 맞았다.[1][2] 약간의 피해를 입은 그녀는 전쟁 중 유일한 사상자였던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부상을 입었다. 또 한 번의 슛은 거의 빗나가 뉴저지 상공에서 좌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적의 진지가 침묵할 때까지 폭격으로 응수했다. 원산에서 경험한 전쟁의 종류는 전쟁 내내 지속될 것이다.[1][2]

파이어볼 작전

파이어볼 작전(operation fireball)은 5월부터 9월까지 원산 지역에 대한 폭격의 암호명이었다. 북한 주민에게 큰 피해를 준 제5공군 소속 해군 함정과 항공기의 협력도 포함됐다. 전투가 한창이던 지난 5월 21일과 22일 밤, 경순양함과 구축함의 지원을 받은 미국의 LSMR 2대가 35분 만에 4,903발의 로켓을 발사해 도시의 방어력을 더욱 손상시켰다. 군함이 총포 사격에 집중하는 동안 유엔 항모전단이 불꽃을 발사하는 데 사용되었다.[2][4]

원산 포위에 LSMR이 투입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수비대에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6월과 9월 사이에 LSMR은 총 12,924개의 5인치 로켓을 발사할 것이다. 작전 중 구축함 브링크리 배스가 배터리를 장착하던 중 약간 파손돼 8명의 사상자를 냈다.[2][4]

액션 오프 레이토

지난 5월 24일 원산 유엔역 함정은 레이토섬 남동쪽 소형선박 여러 척을 적발했다. 일방적 야간 교전에서는 경비함정 USS 맨체스터와 구축함 브링크리 배스가 레이더를 이용해 화력을 지휘하며 적의 편대를 깨뜨렸다. 다음 날 적 11명의 시신과 함께 삼판 4구를 수습했고, 부상당한 북한인 1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삼판은 각각 M-26 기뢰 4기를 보유한 채 소형 기뢰로 개조된 것으로 밝혀졌다.[1][2]

USS 월크 사건

USS 월크는 마샬 톰슨 함장 휘하의 원산 지역의 해군 작전에 배속되어 있던 태스크포스 77의 구축함이었다. 1951년 6월 12일 월크는 북한 해안에서 약 60마일 떨어진 곳에서 38°52°N 129°25°E/38.867°N 129.417°E/38.867; 129.417. 그녀가 어뢰나 들판에서 떨어져 있던 부유식 해뢰에 맞았을 때. 이로 인한 폭발로 월크 좌현 쪽 선체가 심하게 파손됐으며 26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사상자 중 상당수는 폭발이 일어나자 옆구리를 넘어 물속으로 날아가버렸고, 모두 복구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2][5][6][7]

곧이어 인근 구축함인 USS 해리 E호에 승선했다. 허바드함브래드포드함 월크의 우현에서 기름띠를 발견했고 그들은 두 척의 잠수함으로 보고한 것에 대해 심층 기소를 취하하기 시작했다. 결국 추격은 중단되었고 월크의 피해는 임시로 수리되었고 그녀는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파손된 선박에서 소형 금속 원반을 회수했으며 분석 결과 어뢰 기폭장치의 일부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월크는 이후 수리를 거쳐 이듬해 한국 해역으로 돌아왔다.[2][5][6][7]

버즈 톱 전투

버즈사우 전투는 미국 해군 관계자들이 말한 대로 유엔의 원산 공격에 대한 대응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힌 뒤 공산주의자들이 봉쇄를 해제하기 위해 신무기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1951년 7월 6일 미국은 이 지역에 또 다른 해상 폭격을 가하여 높은 사상자를 냈고 1951년 7월 17일에 특히 심한 폭격을 가하여 북한 주민들에게 보복하도록 유혹하였다.[2][7][8]

4시간 30분 동안 구축함 오브라이언, 블루, 알프레드 A. 커닝햄은 원산에서 배터리를 장착해 5인치 포탄 2336발을 발사했다. 북한 주민들은 심한 저항을 했고, 500개가 넘는 비산물이 세어졌지만, 미국 선박에는 큰 피해는 없었다. 다음날 Frank E. E. Evans는 배터리를 장착하고 4번의 근접실수를 받아 배에 타고 있던 4명의 남자들에게 부상을 입혔다.[2][7][8]

킥오프 작전

USS 맨체스터는 한국 해안에 6인치 포를 발사했다.

1951년 6월 말에서 8월 사이에, 미국 선박에 대한 북한의 공격이 증가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미국은 적의 배터리를 파괴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6월 28일, 구축함 헨리 W. 터커는 원산항을 폭격하던 중 배터리 반격을 받았다. 그녀는 한 방에 맞아 가벼운 표피 손상을 입었고 한 남자가 다쳤다.[1][2]

며칠 후인 7월 3일, 호위함 에버렛호가 배터리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받아 1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미국인들은 Fast Carrier Task Force의 공격으로 대응했다. 하루 동안 원산 일대에서 247건의 폭격 정렬이 실시되었고, 600명의 한국 해병대가 초도 섬에서 본토를 급습했다.[1][2]

7월 6일, 구축함 Frank E. E. Evans는 황토도에 사람을 상륙시켰고, 다른 구축함 2척과 함께 건물과 어뢰정거장을 폭격했다. USS 블루는 다음 날 국토를 점령하고 북한 입장을 감시하기 위한 관측 지점을 구축했다. 7월 11일, 요도 인근, USS 블루와 프랭크 에반스가 공격을 받았으며, 약 50개의 스플래시가 배 근처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맞지는 않았다. 이번 공격, 특히 버즈사우 전투로 인해 미 해군 지휘관들은 배터리 축소를 목표로 원산항 내 기동훈련을 지칭하는 킥오프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1][2]

1951년 7월 17일부터 매일, 폭격조치에 배속된 연합 함대의 원소들은 5노트(9.3km/시)로 항해하여 알려진 적의 진지를 폭격하고 오후 3시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그렇게 했다. 기동 첫날, LSMR USS 클라리온 강USS LSMR-525칼마각, 우미도, 호도 판도 섬에서 적 전지의 무겁고 정확한 사격을 받았다. 두 선박 모두 포탄에 맞아 파손됐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500개가 넘는 포탄이 USS 오브라이언 주변의 물에 튀었고 그녀는 적어도 두어 번의 적중률을 유지했다. 손상은 가볍지만 한 사람이 다쳤다. USS 뉴저지중형 순양함 USS 헬레나도 폭격에 참가했다.[1][2]

7월 31일, 헬레나는 총격전을 벌였고, 그녀는 7개의 총기와 탄약고를 파괴한 카운터 배터리 화재를 전달하기 전에 한 번 맞았다. 포탄이 배를 강타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하마터면 2명이 다칠 뻔했다.

8월 4일에는 영국 왕실 해병대가 북한 해안전지 대응용으로 황토도에 박격포를 설치했고, 8월 11일에는 호프웰호가 해안사격대를 이용해 원산 지역의 적군 집중력과 수송 목표물에 직간접적으로 화력을 발사했다. 같은 호도판도 인근에서 수색작전을 벌이던 중 기뢰탐사선 덱스틸, 헤론, 레드스타트도 해안가 배터리로 공격을 받았다. 덱스터리는 두 번의 직격탄을 맞았고, 1명의 사망자와 3명의 부상자, 그리고 중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1][2]

킥오프 작전은 호도판도 앞바다에서 8월 20일 Uhlmann호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면 새 배터리가 건설될 때까지 차단선에 대한 공격 횟수가 한동안 줄면서 성공임이 입증됐다. 이날 7발의 적포가 울만에게 포문을 열었고 오랜 교전 끝에 총 5발이 소실되고 117발의 스플래시가 해군에 의해 세어졌지만 명중된 것은 없었다. 울만은 연합군 순찰대가 그 지역에 진입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포를 침묵시키지 않고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1][2]

지뢰 제거 작업 갱신

1951년 윌리엄 시버링 USS가 한국을 떠났다.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원산, 흥남의 접근로를 채굴하고 있었기 때문에, 9월 5일, CTF-95 사령관은 지뢰제거단 CTG-95.6에 해안선을 휩쓸어 유엔 선박들이 봉쇄하는 동안 해안포 사격장 내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완성되자마자 연합군 전함들은 더 이상 매일 밤 사거리를 벗어나 철수할 필요가 없었다. 임무에 참여한 지뢰탐사선들을 지원하던 중, 구축함 호위함 윌리엄 시버링호는 9월 8일 지상 포병대에 세 차례 맞았다. 그녀의 화재실은 물에 잠겼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1][2]

9월 10일, 지뢰제거원 레드스타트와 헤론은 다시 원산에서 발포한 포탄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9월 20일 오를레크호는 적군과 박격포 진지를 폭격하여 5안타를 기록하여 탄약고를 파괴했다. 오를레크도 미넬레이잉으로 의심되는 대형 삼판을 공격해 4차례나 총격을 가했다. 9월 24일, ROKN PF-62도 해안 전지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3안타를 친 후, 프리깃함은 적당히 손상되어 불이 붙었다. 세 명의 한국 선원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배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2]

지뢰제거 작전은 수개월 동안 계속될 것이며, 유엔 선박들은 새로운 지뢰밭이 설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여러 지역을 휩쓸었다. 상륙용 배터리가 연합군 함정에 적중하는 사건도 흔치 않게 되었고, 오스프리호가 교전하던 10월 29일까지는 함정이 손상되지 않았다. 오스프리 기관실은 세 차례 부딪친 뒤 침수돼 통신이 두절됐고,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구조됐지만 1명이 중상을 입었다. 11월 9일까지 지뢰제거 임무는 80%가 완료되었고 정확한 해안 전지 화재는 유엔 선박들이 몇 주 더 운항을 완료하지 못하게 했다.[1][2]

해전 격상

유엔 폭격 1년 만에 원산, 1952년 2월

1951년 말과 1952년 말에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한 북한 주민들의 정보는 더욱 빈번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보는 미국에 적군이 삼판을 쌓고 원산 주변의 섬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MiG 항공기도 더 많은 수로 보고되었고 UN 항공기와 차단군을 위협하기 시작할 것이다. 소련과 중국군이 잘 보급한 북한군 병력도 탄약 공급을 입증하는 대형 포격을 하고 있었다.

해안 배터리도 효과를 높였는데, 이제 화재 진압이 갖추어져 공기 폭발 회진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뢰제거 작전이 대부분 완료되면서 미국의 폭격단체들은 다시 도시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USS 뉴저지호는 1951년 11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원산 등 인근 해안 표적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원산의 석유 정제소, 기차, 다리, 터널, 철도, 병력 집중도, 해안 전지 등을 목표로 삼았다.

11월 22일부터 24일까지 LSMR 401, 403, 404 등 LSR 31사단이 화력임무를 수행했고 11월 24일과 25일에는 북한 포로 여러 명이 납치된 가도섬에서 해상사격이 게릴라 공격을 지원했다. 11월 28일과 29일 북한 주민들이 소규모 공격작전을 펼쳤고, 그 안에서 무장한 삼팔수들이 황토도의 섬 정착지를 공격해 민간인 1명이 숨지고 민간인 5명이 포로로 잡혔다.[1][2]

이 공격으로 섬의 대부분의 집들이 파괴되었고 북한 주민들은 인명피해는 없었다. 12월 20일 원산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폭격이 일어났고, 전함 위스콘신호가 참가했다. 6일 후, 원산항의 토도 앞바다에서 지뢰가 떨어져서 ROKN PC-740이 분실되었다.[1][2]

1952년 1월 11일, 다음 유의미한 총격전이 시작된 것은 레드스타트덱스터리가 호위함 없이 항해하던 중 호도판도로부터 정확한 배터리 화재를 받았을 때였다. 화재는 덱스터리에게 집중되었고 그녀는 상당한 피상적인 피해와 한 명의 사망자와 두 명의 부상자를 냈다. 나중에, USS 그레고리USS 조지 K. 맥켄지는 76mm 배터리 4개를 들고 1시간 동안 결투를 벌였다. 맥켄지는 36발로 바짝 긴장했지만 피해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녀는 또한 북한 지휘소에서도 세 번의 직격탄을 날렸다.[1][2]

조지 K. 맥켄지는 1월 24일 한도판도에서 USS 마샬과 함께 다시 약혼했다. 두 척의 배가 모두 파손되지 않았고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마샬에서 1000야드 떨어진 곳에서 76mm 박격포 2발이 튀었다. TF-77은 원산 외곽 25마일 떨어진 2월 8일 헬리콥터 추락사고에서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RESCAP의 보고에 따르면 관련자들이 명백히 적군에 속해 있었다. 그 지역의 심한 낙인이 유력한 원인이었다. 착륙한 헬기도 TF-77 항공기에 의해 파괴됐다. 봉쇄 1년이 될 때까지 원산 폭격은 일상적으로 발생했지만 때로는 유엔 함대가 대규모 교전을 위해 화력을 결합하기도 했다.[1][2]

봉쇄가 시작된 지 정확히 1년이 지난 2월 16일, 그레고리함, 트윈닝함, 로완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통상적인 폭격으로 공격했다. 적의 해안 전지는 3월 13일 원산 칼마각에서 유엔군 포위에 대항하여 활동했다. USS Manchester, USS James E의 카운터 배터리 계약 Kyes, USS McGinty, USS Douglas H. Fox와 더불어 Fast Carrier Task Force 항공기의 도움으로 적의 포를 침묵시켰다. 해안 배터리 화재는 현재까지 화재 통제 장비의 사용 가능성을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화재였다.[1][2]

USS WiltsieBrinkley Bass는 3월 20일 원산에서 해안에 기반을 둔 스폿을 이용해 해안에 배터리를 장착했다. 브링클리 배스는 원산시 인근에 위치한 배터리 중 하나에 7개의 직격탄을 날렸다. 두 배는 충돌하지 않았지만 브링크리 배스는 파편을 받았다. 3월 20일은 북한 포병의 봉쇄에 대한 나흘간의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5월 21일, 오스프리함은 기뢰를 수색하던 중 적의 해안 전지에 의해 포격을 받았다.[1][2]

오스프리는 해변에 기반을 둔 스폿터를 사용하여 배터리 3개를 소거했으며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브링클리 배스USS 스틱웰은 3월 22일 칼마각에서 배터리를 침묵시켰다. 윌치함은 3월 23일 칼마각 동쪽의 배터리에서 발포를 받았고 브링클리 배스와 함께 적의 포를 침묵시키기 위해 배터리 대응 사격으로 대응했다. 다음날 브링클리 배스는 호도판도에서 다시 한 바퀴를 얻어맞아 남자 5명, 중상 1명이 부상을 입었고, 배의 무전기와 전자제품에 피해를 입혔다. 3월 28일 호도판도에서 벌링턴호가 발사되었고, 함정에 총탄이 날아갔지만 회피 기동훈련은 예상 적중률을 막았다. 벌링턴은 자신의 123발로 대응해 작은 산불이 났다.[1][2]

1952년 4월

USS 레오나드 F. 메이슨은 지난 4월 1일 깊이 충전 우현 기폭장치 보관함에서 폭발을 경험했으며, 호도판도를 폭격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윌티, USS 맥긴티, USS 콘도르도 이번 작전에 참여했다. USS 심볼머렐렛, 에드먼즈함은 지난 4월 2일 원산 인근에서 적화사격을 받았으며 또다시 피해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같은 날 윌치함콘도르에 화재를 지원하면서 칼마각 동쪽 해안가 배터리에서 10건의 근접실수를 받았다. 윌츠는 그 후 며칠 사이에 몇 번 더 공격을 당했고 그들은 모두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접촉자였다.[1][2]

지난달 10일 원산 일대에서 TF-77은 세인트폴호한손호의 포를 이용해 연합공격을 실시했다. 호도판도 북쪽에 위치한 실버스타인호는 함정에서 50~300야드(46~274m) 떨어진 사거리가 1만2400야드(1만1300m)로 30발의 적화사격을 받았으나 그녀를 해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북한 주민들이 화재 진압을 더 규칙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4월 11일, WiltsieMcGinty는 원산 해안 배터리의 공격을 받았다. 두 함정은 각각 별도의 지역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했고, 대응 배터리 화재를 전달했다.[1][2]

실버스타인, USS 카빌도, USS 아파치는 호도판도에서 배터리에 대한 진압 사격을 했다. 맥긴티는 4월 17일 원산 인근으로 이동하면서 적의 해안가 배터리에 걸려 넘어졌다. 맥긴티USS 매독스가 맞대응 사격으로 응수하자 적의 포성이 멈췄다. USS 카빌도는 4월 29일 호도 판도에서 해안 전지 공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빗맞은 배 3척과 직격탄을 맞은 선박 1척이 구조물과 전기 배선에 가벼운 손상을 입었고 2명이 부상했다.[1][2]

같은 날, 요도 남쪽의 휩쓸린 지역에 있는 실버스타인호매독스호우미도에서 온 우미도에서 온 우미도 삼판 두 척의 철수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의 배터리가 발사되었다. 삼판들은 총 30여 대의 첫 번째 살포를 받았기 때문에 실버스타인매독스는 불을 돌려 배터리를 진압했다. USS Valley Forge의 항공기들도 근접 공중 지원을 위해 소집되었다. Silverstein은 손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5밀리미터로 추정되는 배터리 110발을 받았고, Maddox는 2발을 받았다. 그 행동에는 연합군의 사상자는 없었다.[1][2]

다음 날 USS 왁스빌호가 해안 배터리를 공격했고, 4월 28일 실버스타인USS 컨서버는 호도판도로부터 화재를 받았다. 한국 소형 선박으로 연합 함정은 상대 전지를 폭격하고 인근 다른 선박들이 철수하는 동안 연막을 쳤다. 컨서버는 122mm로 추정되는 화력을 10발이나 받았다. 5월 7일, 왁스빌함은 12발의 화살을 맞았지만, 분명 돌아오지 않았고, 5월 10일에는 원산항을 휩쓸고, 메르간서, 레드헤드함 등이 칼마각으로부터 10발의 적화사격을 받았다.

이날 매독스래피함은 북한 철도 목표물을 공격해 많은 안타를 기록했고, 2개의 건물과 함께 2대의 철도 차량이 파손됐다. 칼마각의 배터리는 76밀리미터의 화력을 10발 발사했는데, 가장 가까운 화력은 배에서 100야드 떨어진 곳에 착륙한 것이다. 매독스의 맞사격이 2안타를 더 기록했다. 다음날 매독스, 래피, USS 허버트 J. 토머스에반스빌함은 75mm와 155mm의 화력 206발과 1시간 동안 교전을 받았다.[1][2]

북한 주민들은 찾기는 어렵지만 한도판도, 합친리, 칼라마각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닉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귀환 사격으로 적의 포진 3개와 허버트 J가 파괴되었다. 토마스는 한 번 맞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인명피해도 없었다. 5월 17일 TG-95.2는 전날 호도판도 앞바다에서 나포된 7명의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적이 가까운 장래에 요도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허도판도의 두 곳에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80여 대의 어업 삼판을 수송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5월 27일 원산 앞바다 전지는 카빌도호오즈번호에 맞서 싸웠다. 전형적인 결투에서 미국 선박들은 해안을 폭격했고 두 명의 북한 병사의 항복을 받아들인 다음날에는 손상되지 않았다.[1][2]

원산 앞바다에서 포격을 받고 있는 USS 맨체스터.

5월 29일, 북한 주민들이 우호적인 섬에 포격을 가하자, USS 오배넌은 적 전지를 진압했다. 지난달 29일과 30일에도 오즈번, 래드포드, 헤론호가 교전했다. 오즈번호는 155mm 6발, 래드포드함은 75mm로 추정되는 10발을 맞았고, 가장 가까운 1발은 배에서 50야드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 헤론은 기관총에 맞아 함정의 후방을 강타했다. 그 어떤 행동에도 우호적인 사상자는 없었고 모든 경우에 그 배들은 해군 총으로 화살을 되돌려 주었다.[1][2]

6월 5일, 오배넌래드포드, 그리고 USS 로프버그는 호도판도 남쪽 75밀리 포대의 포대를 공격하여 침묵시켰다. 그 포병들은 몇몇 미국 지뢰제거원들에게 사격을 개시했지만 호위병들에 의해 재빨리 조용해졌다. 6월 7일 원산의 북한 포병들이 황토도에 포격을 가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21개의 포탄이 황도 상공의 깃발을 통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앨버커키호6월 12일 적의 포화에 걸려 1명이 부상을 입었고 6월 19일 북한 주민들은 황토도를 향해 또다시 포격을 가했다. USS 파크스는 이날 원산 남쪽 철도를 보수하는 적군 300명을 붙잡아 28발을 발사했다.[1][2]

그녀는 74명의 사상자를 냈고 철교와 선로에서 득점했다고 보고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팍스는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한 폭격 작전 장소에도 별 포탄을 발사했다. 원산 포위에서의 다음 교역은 한 달 뒤인 1952년 8월 10일에 일어났다. 헤도 판도에 있는 적의 포진지점은 약 250 75mm에서 155mm의 포를 가지고 바톤함자비스함을 향해 발사되었다. 바톤은 피상적인 피해를 입었고,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다쳤다. 자비스는 손상되지 않았고, 대 배터리 화재로 2개의 총기가 소실되었다.[1][2]

이틀 뒤, 그랩플함은 약 30발의 105mm 포병의 표적이 되었다. 배가 수선 아래로 한 번 부딪쳐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USS 바톤은 이에 대응해 89발을 발사했고, 북한 배터리 2개에 3안타를 기록했다. ROKN FS-905도 5월 12일에 공격을 받았다.[1][2] 요도 앞바다에 정박하던 중 모터 어뢰정용 가솔린과 탄약을 싣고 있던 ROKN FS-905가 적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우현 기관총 배터리에 1안타를 맞았다. 피해는 가벼웠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황토도는 8월 16일 칼마각에서 155mm 포탄 4발과 대형 박격포로 북한 주민들로부터 다시 폭격을 받았다. 그 총들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서 연합군 군함들 중 누구도 대응할 수 없었다.[1][2]

태풍 카렌

태풍 카렌이 이후 며칠 동안 한국 해역을 휩쓸면서 차단활동도 중단됐다. 폭풍우가 한창일 때 유엔 군함 몇 척이 파손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기회를 이용해 황토를 다시 공격했다. 태풍이 지나간 후 루이스호는 원산 지역의 우호적인 섬에 포격을 가하던 칼마각의 적 전지를 향해 5인치 포탄 7발을 발사했다. 적의 포병들은 비록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을 부상시켰지만 침묵했다.[1][2]

1952년 9월 11일, 우미도의 배터리는 USS 루이스에 105mm 18발을 발사해, 피해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9월 13일, 본 옴므 리처드호의 항공기가 원산 근교에서 130피트 길이의 해군 함정을 공격하여 로켓과 20밀리미터 스트래핑으로 침몰시켰다. 적함은 전쟁 중에 유엔군에 의해 침몰된 몇 안 되는 배 중 하나였다. 이틀 뒤 바톤은 원산항 동쪽 100마일 해상에서 항해 중 부유 기뢰로 의심되는 사람을 들이받았다. 5명의 사병들이 실종되었고 나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6명의 다른 사병들이 부상을 입었다. 소방실이 물에 잠겼고 다른 심각한 피해도 덜했다. 홍수는 통제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사세보를 향해 진로를 잡았다.[1][2]

USS 알프레드 A. 커닝햄은 9월 19일에 5개의 안타를 맞았다. 3500야드 떨어진 거리에서 105~155m로 추정되는 원산의 총기가 알프레드 A를 명중시켰다. 커닝햄이 첫 번째 샷을 날리며 4명이 더 따라붙었고 인근 공중 폭발도 7차례 있었다. 5인치와 3인치 포로 159발의 회신사격을 할 수 있었지만 8명의 미국인이 다쳤지만 사망자는 없었고 배는 적당히 파손됐다.[1][2]

1951년 9월 USS 톨레도

젠킨스함테일러함은 황토도 인근 해안의 정확한 배터리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두 함정은 약 21발의 90mm, 3발의 105mm를 받았으나 피해는 없었다. 북한군은 또 옌킨스로부터 39발을 발사해 배터리가 방전됐음에도 불구하고 황토도를 폭격했다. 며칠 후 북한 사람들은 요도를 포격으로 공격했고 9월 23일 아이오와호가 공격을 받았지만 그녀의 16인치 포는 재빨리 가해자들을 침묵시켰다. USS 테일러도 9월 25일 배터리를 침묵시켰고 헤론은 105mm의 화재를 맞았지만 파손되지는 않았다. 배 가까이에서 세 개의 비산물이 세어 있었다.[1][2]

북공 공격

7일 원산과 흥남에서 벌어진 첫 해전. 미그-15s는 TF-77 항공기를 세 차례 공격했고, 미그 1대가 미국 AD기 2대에 사격 패스를 해 사격을 했다. 어느 쪽도 피해나 인명 피해는 없었고 미그스는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4대의 MiG-15s가 F4Us 비행을 공격했고, 다른 2대는 흥남 인근 8대의 AD를 공격했다. 이들 교전에서는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날 오후 마지막 공격에서는 MIG-15 한 대가 흥남 인근에서 또 다른 행동으로 F4U 4대 중 1대를 격파했다.[1][2]

10월 16일, USS 톨레도는 75mm 포와 122mm 포로 추정되는 4발의 총격을 받았다. 함정에서 1000야드 정도 떨어진 물속에 모든 포탄이 떨어져서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맨스필드함도 약 40 75mm의 포탄 공격을 받았다. 11월 20일 USS Kite와 USS 톰슨호가 120mm 포에서 발사될 때까지 한 달 넘게 포대는 교환되지 않았다. 톰슨 부부는 그녀를 괴롭힌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맞았고, 한 명은 상처를 입었고, 작은 물질들이 손상되었다. USS Kite는 다음 날 또 결투를 벌였다. 그녀는 55발의 75mm 탄환을 받았지만 다시 한 번 인명피해는 없었다.[1][2]

1952년 10월 20일 미 해군 항공기가 원산 상공을 비행한다.

10월 21일 루이스는 적의 포탄에 의해 공격을 받은 원산항에서 활동 중인 두 명의 한국 기뢰탐사선들에 대한 포격을 지원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기뢰를 막기 위해 총기를 돌려주고 연기를 피우며 보조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75mm 포탄 두 개에 맞았다. 한 명은 상부에 착지해 경미한 피해를 입혔고 한 명은 경상을 입었다. 다른 한 명은 폭발이 아니라 증기 폭발을 일으켜 6명이 즉사했고 7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루이스는 총성을 돌려주고 연기를 피우기 위해 도움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일본에서 비상 수리를 했다. 10월 27일,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기내에서 열렸다.

11월 25일, 톰슨은 이번에는 적기를 상대로 전투에 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트기는 300야드(270m) 떨어진 가장 가까운 곳에 착륙한 미국 선박 위로 6~8개의 폭발물을 떨어뜨렸다. 톰프슨 망보는 소리에 항공기가 들렸지만 레이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2월 6일 남천강 하구에서 미 해군 메르간세르함이 총에 맞아 총격을 당했고 윌리엄 시버링은 101발을 맞았고, 자신도 칼마각에게 총격을 받았다. 이어 56발의 포탄이 추가로 그 방향으로 보내졌다.[1][2]

다음 날, 메르간서는 칼마각으로부터 75밀리 화력 30발을 더 받았으나 그녀는 손상되지 않았다. USS Shields, USS William Seiverling, UN 지뢰제거원들이 12월 11일 약 75발의 총격을 받았다. 그 작은 지뢰제거원들은 어쩔 수 없이 기어를 풀고 연기냄비를 사용하여 몸을 가리는 것을 도와야 했다. 같은 날, USS 왁스빌과 USS 마샬이 요도 서쪽에서 충돌하여, 왁스빌은 선체 부속물에 상부 현측 손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가동 중이었고, 그 외 다른 피해는 없었다.[1][2]

12월 12일 마샬은 다시 공격을 당했고, 20발이 그녀의 방식대로 발사되었지만, 여느 때처럼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없었다. USS HarchWilliam Seiverling 또한 공격을 받았으며 그들 역시 해를 입지 않았다. 12월 13일 약 40발의 북한 포병들이 남총강 어귀 부근에서 순찰을 하던 중 왁스빌과 마샬을 겨냥했다. 정확한 화재였지만 안타는 나오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격이 왁스빌에서 10피트(3.0m) 떨어진 물에 튀어 파편이 손상됐다. 그 답례로 12발의 총성이 미국인에 의해 발사되었다.[1][2]

왁스빌은 12월 19일에 다시 공격을 받았는데, 세 발의 총알이 그녀의 길을 따라 발사되었지만, 그 배에 부딪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며칠 뒤 톨레도호는 도시를 폭격하면서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역시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월 23일, 맥고완함마셜호 원산항의 지뢰탐사선에 대한 포격을 지원하던 중 약 30발의 75mm 포탄을 받았다. 발포 도중 4~9발의 기폭제가 맥고완 근처, 60~70발의 기뢰제거원들 사이에 몇 차례 떨어졌다. 교전 기간 내내 북한 주민들은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맥고완은 이틀 후 또 다른 해안 전지 작전을 펼쳤다.[1][2]

전투의 높이

1953년 1월 2일은 원산항에 있는 유엔의 섬들에 대한 북한의 대규모 폭격의 첫날이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원산 안팎에서 적의 해안전지가 주로 황토도와 요도를 상대로 수백 발을 발사했다. 그 수술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산발적으로 덜 진행되었다. 유엔 정보당국은 북한 해안가 배터리의 90%가 차단함대보다는 우호적인 섬에 대해 활동적이었다고 추정했지만 거의 매일 발생한 폭격 내내 4명의 우방국들만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했다. 작전 기간 동안 유엔 함정은 끊임없이 대응 배터리 발화로 대응했다.

2월 9일과 2월 10일에는 원산에서 송진을 거쳐 청진, 회령까지 보급 집중 및 수송 목표물에 대한 미 해군 항공기의 최대 공세가 실시되었다. 작전에는 미군 필리핀해, 오리스카니, 키어사게이 참여해 공산주의 물류 시스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원산 지역에 대한 공산군의 폭격의 일환으로, 2월 14일 적의 포탄으로 미군 1명을 포함한 2명이 사망하고, 유엔 육군에 대한 북한의 가장 성공적인 포격으로 9명이 부상했다. 요도의 지휘소도 파손되었고, DUKW 1대가 파괴되었고, 다른 2대는 선체에 손상을 입었다. 구호소와 텐트 2개, 통신선도 파손됐다. 벙커 두 개가 황토도에 포개졌다.

USS De HavenUSS Moore는 그들 자신의 폭격으로 대응했고 그들은 400야드 떨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포탄들이 튀는 공격을 받았다. 2월 16일은 봉쇄 2주년이었다. 원산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지만 강제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핵심 교통 중심지로 남아 유엔군에 봉쇄 임무를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계속되는 수륙양용 위협으로 약 3만 명의 북한군 병력과 6천 명의 민간인이 정박해 최전방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1][2]

지난 3월 5일 원산항에서 유엔이 집중 포격하는 동안 미주리호는 105mm 해안 전지 5발의 화재를 맞아 난관에 봉착했다. 미주리는 치이지 않았고 급히 배터리를 조용하게 했다. 5일 후 미주리주는 도시를 폭격하는 동안 75mm에서 155mm의 대포 15발을 더 발사받았다. 그 미국 배는 또다시 피해를 면했고, 가장 가까운 샷이 500야드(460m)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 USS 메르간세르 역시 자신으로부터 200야드(180m) 떨어진 곳에서 무해하게 튀는 가장 가까운 슛과 교전했다.[1][2]

전쟁 중 순양함 USS 로스앤젤레스

1953년 3월 18일, 로스엔젤레스호는 원산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두 차례의 공기와 한 차례의 표면이 함선 근처에 착륙했다. 3월 22일, 또 다른 폭격이 있을 때, 90mm 공기의 두 발과 105mm 공기의 두 발이 미주리 근처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손상되지 않았다. 프리체트왁스빌함도 화재를 맞았지만 피해는 없었다. 프리체트는 3월 25일 다시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셸턴, USS 에버솔, ROKN AMS-502, ROKN AMS-515 등도 다음날 비슷한 행동을 했다.[1][2]

USS LA는 3월 27일 적전 1발을 맞았지만 피해는 가벼웠고 부상자는 없었다. 하루 뒤 프리체트에서 200야드 떨어진 곳에 두 차례 공중폭발이 떨어졌고, 3월 30일과 3월 31일 프리체트는 35발의 적포도 피해 없이 더 피했다. 그 후 8일간의 해군과 공군 연합 작전은 원산 방어를 상대로 시작되었다. TF-77 항공기가 도시를 강타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4월 2일, USS LA는 원산 해안 배터리의 또 다른 타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13명의 남자가 부상을 입었지만 메인마스트에는 가벼운 구조적 손상이 있을 뿐이었다. 방탄복을 입고 있던 다른 14명도 맞았지만 다치지는 않았다.[1][2]

북한 전지는 지난달 5일 해군 함정을 겨냥한 것으로 매독스함은 75㎜ 6발을 맞았고, ROKN AMS-515는 105㎜ 방사포 50발을 피했지만 두 척 모두 맞지는 않았다. 이틀 후인 4월 7일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봉쇄선을 노렸지만 성과가 없었다. 로스엔젤레스함맥코드함은 두 차례나 피했고, 적군은 원산 앞바다의 우호적인 섬들에 대한 폭격도 계속했다. 4월 8일, 적어도 64발의 총성이 함대를 향해 발사되었고 며칠 후, USS 에버솔LA는 해안 배터리와 결투를 벌였다.[1][2]

4월 16일, 매독스는 10발의 배터리에 대한 40분간의 액션 도중 156발 중 1발을 그녀에게 발사해 맞았다. 76mm인 이 총알은 메인 데크의 좌현 쪽에 명중해 16인치짜리 구멍을 찢고 3명이 부상했다. 매독스는 대응 사격으로 대응했지만 적대적인 총기를 침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USS Shelton은 4월 17일에 세 차례나 발사되었다. 4월 19일은 원산 봉쇄 때 활기찬 하루였다. 105mm 포에서 25발이 에버솔을 향해 발사됐지만, 전형적으로 북한 주민들은 배를 치지 않았다. USS Curlew뉴저지USS Renshaw에서 3발과 41발을 맞았다. 그날 전투 중에 파손된 배는 USS 제임스 E호뿐이었다. 예스. 155mm 1바퀴, 60개 중 1바퀴가 제임스 E를 관통하는 3피트짜리 구멍을 뚫었다. 과정에서 남성 4명을 다치게 했고, 1명은 중상을 입혔다.[1][2]

USS 위스콘신호가 한국 해안에 발포했다.

북, 유엔 보유 섬 포격

지난 4월 22일에도 유엔이 보유한 섬에 대한 북한의 폭격은 계속돼 매일 수십 발이 발사됐고, USS 맨체스터도 배터리로 인한 약간의 피상적인 피해를 입었다. 4월 23일 오후 2시 30분에서 4시 사이에 도 섬은 칼마판도의 포진지대에서 맹렬한 적의 포화를 받고 있었다. 미국인 1명을 포함해 5명의 해병대가 부상을 입었다. 오웬이 사상자를 내는 동안 헨더슨함은 대응사격을 제공했다. 임무 수행 중에 헨더슨오웬이 발포되어 철수했고 TF-77 항공기가 그 지역을 폭격하여 점령했다.[1][2]

다음 날 원산포들은 제임스 C호를 향해 76㎜~105㎜ 함포 100여 발을 발사했다. 오웬스헨더슨 USS는 피해나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제임스 C. 오웬스는 4월 25일 공격을 받았으나 또 다시 피해는 없었다. 지난달 29일 유엔이 보유한 섬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원산항 상공에서 기뢰정찰비행 중 HU-1 헬기가 14발의 VT를 받아 적의 포탄을 살포했다. 이 항공기는 파손된 것은 아니지만, 이 만남은 북한군에 의해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었다. USS 구르케도 이날 적의 포탄 6발을 피했다.[1][2]

1953년 4월, 미 해군은 적군이 봉쇄에 저항하여 2,000여 발의 포탄을 발사하고, 우호적인 게릴라 보유 섬에서 1,000여 발을 더 쏘는 3년간의 전투의 정점으로 보고되었다. 보통 한 달에 평균 500발 정도였다. 북한군은 호도판도에 몰래 배터리를 만들었는데 미국인들은 효과 없이 5인치 포를 퍼부었다. 이 때문에 유엔 해군에게는 순양함과 전함 또는 해군 항공기에 의해 무기가 파괴될 수 있을 때까지 일광욕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2]

광산 전쟁도 4월 한 달 동안 증가했는데,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원산항에서 32개의 새로운 지뢰가 발견되었다. 5월 2일, 매독스오웬 USS에서 숨겨진 총기가 각각 2회 안타와 2회의 근접실수를 기록했는데, 두 배 모두 약간의 피해를 입었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적군이 쏜 포탄은 200발이 넘었다. 구르케는 다음 날 친근한 원산항 섬들과 함께 포격을 받았다. 브레머튼함은 76mm에서 105mm 포탄 18발을 날려 적 전지를 향해 중공포 공격을 감행했다. 하마터면 미스 한 명이 두 명의 남자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고 배는 표면적인 손상을 입었다. USS Samuel N. Moore는 5월 8일 90mm 포탄을 맞았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수선 바로 위에 있는 둥근 우현 쪽. 같은 배터리가 USS 브러쉬에서 발사되었는데, 모두 64개였다.[1][2]

연합군의 요도 공습

5월 15일, TF-77 항공기가 요도의 비행장을 공격했고, 미국 선박들은 요도의 배터리를 침묵시켰다. USS 브러쉬도 이날 마운트에서 명중해 운전불가능한 상태가 됐고, 9명이 부상당해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뉴저지함은 5월 27일에 발포되었지만 그녀의 16인치 포는 재빨리 그것을 중단시켰고, 반면 섬들은 6월에 계속하여 매일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유엔의 모든 공격에 저항했지만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6월 3일, 원산해안전지는 USS John A에서 15 105밀리 포탄 전지를 한다. 볼레와 USS 롭버그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 총들은 귀환 사격으로 조용해졌다.[1][2]

USS LSMR-409는 6월 4일 타격을 받아 어지러운 구획과 무전실에 중간 정도의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5명이 부상당했다. 적군은 76mm 화력을 30발 쏘다가 LSMR 200여 발의 로켓포로 침묵했다. USS PC-706는 호도판도 북쪽 끝 해변에서 북한 어선 5척을 격파했다. 3일간 TF-77의 운항을 방해한 태풍 주디로 인해 날씨가 매우 뿌옇게 변했다. 롭버그와 존 A. 볼레는 6월 8일 배터리에 의해 공격을 받았지만, 또 다른 결론 없는 접촉이었다. 존 A. 볼레는 다음날 적의 포격을 퍼부으며 보냈다. 6월 11일, USS Wiltsie는 약 45발의 105mm의 화재를 받았다. 그 배는 그녀의 본갑판의 우현 쪽에 한번 부딪혔지만 여전히 완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파편이 파손되어 갑판에 4인치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미군에게는 사상자가 없었다.[1][2]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일 뒤 브레머튼, 로프버그, 존 A. 볼레는 배터리와 불을 주고받았고, 여러 발의 총이 파괴됐으며, 우호적인 인명피해는 없었다. 롭버그, 존 A. 볼레와 USS 해류는 다음 날 110발의 화력을 무효로 받았다. 호도판도의 해안전지는 점점 연합군의 봉쇄를 위협하고 있었고, 6월 17일 원산항의 구축함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어윈함로완함은 75개의 발견으로 다시 탈출했고 헨더슨은 또 다른 75개의 발견을 피했다. 헨더슨은 헨더슨에서 10야드 떨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착륙했다.[1][2]

어윈로완은 다음날 또 다른 전투를 치르곤 했다. 그 안에서 북한 사람들은 한 번의 교전으로 가장 많은 수의 히트곡을 기록했다. 어윈함은 칼마각에서 1라운드를 맞아 주갑판에 3피트(0.91m)의 구멍이 뚫렸다. 다섯 명의 미국 선원들이 부상을 입었다. 로완은 5안타 1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그 중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그녀는 모두 45발의 각기 다른 구경거리를 받았다.[clarification needed] 그 구축함은 적당히 파손되었다. 36발의 포탄이 세인트 폴을 향해 발사되었지만 그녀는 맞지는 않았다.[1][2]

USS 세인트 폴은 1953년 7월 27일 봉쇄의 마지막 사격을 했다.

같은 날 작은 표면 접촉이 일어났다. 무장한 국군 정보선이 북한 30피트 경비정과 충돌해 10분 동안 북한 주민들이 포대를 덮고 철수할 때까지 교전했다. 초계선은 속도가 20노트, 무전기를 달고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했으며 선원들은 다양한 소형무기를 탑재했다. 6월 19일 로완브레머튼은 슛을 날렸지만 안타는 나오지 않았다.[1][2]

USS 맨체스터는 3일이나 7월 3일께 원산 폭격을 감행하고 있었는데, 거의 놓친 파편이 뒤편 스택에 2인치 구멍을 내고 화약실 문을 통과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7월 7일, 호도판도의 북한 포병들이 봉쇄에 사격을 가했다. 76mm~122mm의 300여 발의 화재가 USS 로프버그, USS 토마슨, USS 햄너 인근에 떨어졌다. 토마슨은 공중 폭발로 윗부분이 움푹 패이고 구멍이 났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미국인들은 이 행동이 끝나기 전에 880발의 배터리 방전사격을 되돌려 주었다.[1][2]

며칠 뒤 북한 포병들이 세인트폴함을 향해 76㎜~105㎜ 포탄 48발을 발사해 포탄에 명중시켰다. 총 두 발이 손상되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후 며칠 동안 북한 주민들은 7월 23일까지 우호적인 섬 공격에 주력했는데, 이때 세인트 바울은 12발의 155mm 화력을 뽑아 모든 총탄이 배에서 10~50야드 떨어진 물에 튀었다. 7월 27일 세인트 폴은 해안 전지와의 전투의 마지막 미국 슛을 발사했다. 휴전 협정으로 861일 간의 전투가 끝났다.[1][2]

여파

원산에 있는 유엔 선박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적대적인 영토에 대한 봉쇄를 유지함으로써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다. 유엔 해군은 북한군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비교적 적은 사상자를 냈다. 원산을 방어하던 북한 포병들은 대부분 무능했고 수천 달러어치의 포탄이 낭비됐다. 원산은 전후 몇 년 동안 파괴되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그 위치 때문에 결국 재건되었고 지금도 중요한 전략 요충지다.[1][2]

참고 항목

참조

  1.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Korean War: Chronology of U.S. Pacific Fleet Operations, June–December 1950".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Retrieved 2012-09-18.
  2.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U.S. Navy Ships: Sunk & Damaged in Action during the Korean Conflict (Partial)".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12-16. Retrieved 2012-09-18.
  3. ^ "Two U.S. Navy Minesweepers Sink After Striking Mines Off Korea" (Press release). United States Navy. October 17, 1950.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5 December 2010. Retrieved 19 November 2010.
  4. ^ a b "Korean War Educator: Memoirs - Jake Huffaker". www.koreanwar-educator.org. Retrieved Oct 23, 2020.
  5. ^ a b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03-22. Retrieved 2011-03-30.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6. ^ a b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1-06-10. Retrieved 2011-03-30.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7. ^ a b c d "Korean War: Chronology of U.S. Pacific Fleet Operations, June-December 1950 (ma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Retrieved 2012-09-18.
  8. ^ a b "The USS O'BRIEN DD-725". members.tripod.com. Retrieved Oct 23,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