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 전투

Battle of Kumsong
금송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날짜1953년 6월 10일 - 7월 20일
위치
금송, 대한민국
결과 중국의 승리
호전성

국제 연합(UNC)

중국
지휘관과 지도자
United Nations 마크 W. 클라크
United States 맥스웰 D. 테일러
United States 아이작 D. 흰색
South Korea 정일권[1]
덩화
양용[2]
관련 단위

United States 8군

9군단

18만7000명의 전투병력
수많은 전투기
전투[4] 병력 24만 명
포탄 1360여 개
사상자 및 손실
미국: 305명 사망[5]
남한: 2,689명 사망
부상자 7,548명
4,197명[6] 실종
중국 추정 : 사상자 4만7661명(미국인 2286명)
생포된 2766명(70명의 미국인)
중국: 9,187명 사망
부상자[7] 12,391명
남한 추정: 6만 6천명[8]

진청전투(중국어: 金淸戰戰, 핀인:Jīn zh zh, Jīī ch zh zh)라고도 알려진 금송전투는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였다. 625전쟁 종전을 모색하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유엔군사령부(UNC)와 중·북군은 포로 송환 문제에 합의하지 못했다. 정전협정 체결을 거부한 이승만 대통령은 송환을 거부한 북한 포로 2만7000명을 석방했다. 이 조치는 중국과 북한의 지휘부에 분노를 야기했고 현재 진행중인 협상을 무산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금송연대를 겨냥한 공세에 나서기로 했다. 이는 유엔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마지막 대규모의 중국공세가 될 것이다.

배경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PVA) and the Korean People's Army (KPA) objective was the bulge in the U.S. Eighth Army lines that began roughly about 3 miles (4.8 km) northeast of Kumhwa, extended northeast to the hills south of Kumsong, leveled off to the east for about 10 miles (16 km), then dipped to the southeast for some 13 miles (21 km) 하트브레이크 능선 북서쪽에 있는 문둥리 마을로. 서쪽 400~600m 높이의 야산에서 동쪽 끝 1,000m가 넘는 등 지형이 매우 험난했던 터라 이 지역을 방어하는 대한민국 육군은 통신의 측면선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군 5개 사단이 좌익에 한국군 IX사단, 한국2군단 6, 8, 5사단, 미국 X군단 한국 20사단 등 5개 사단이 배치돼 있다. 한국 3사단은 2군단 예비역이었다. 한국군과 마주한 곳은 PVA군 3개였다. 6월 초에는 68군을 들여와 60~67군 사이에 배치하였다. 게다가 중국군은 제33사단을 붙임으로써 60군을 강화했다. 따라서 PVA는 후방의 비슷한 유형의 지형에서 훈련하고 있던 4개 사단의 새로운 사단에 대한 공격을 이용할 수 있었다.[9]

전투

최초 공격 (6월 11~18일)

6월의 첫 열흘 동안 PVA/KPA는 중앙 전선에서 지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 후 6월 10일 저녁, 포격이 격렬해졌고 PVA는 한국 5사단이 보유한 부문을 대상으로 대대부터 연대까지 연합공격을 했다. PVA 68군과 60군의 원소를 모두 사용하여 PVA는 압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PVA는 전초기지를 뚫고 하트브레이크 능선에서 북서쪽으로 10마일(16km) 떨어진 힐즈 973과 882를 점령했다. 한국2군단은 6월 11일 한국 5사단 작전통제권에 한국 3사단 22연대를 신속히 풀어 PVA 침투를 바로잡았다. 한국 35연대의 원소들은 973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했지만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PVA 부대는 신속하게 다시 공세로 이동했고 한국군은 973년 힐에서 남쪽으로 1,000m 떨어진 곳에서 철수할 것을 강요했다. 22연대 2개 대대는 이날 882고지를 탈환하려 했고, 능선에 접근해 파고들 수 있었다. 한국 5사단은 22, 27, 35연대를 동원해 6월 12일 반격에 나서면서 중국군을 언덕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중포와 박격포, 소형 무기 사격은 PVA의 부대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돌격 부대에 대한 반격 의지와 맞물려 유엔군의 지형적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다.[9]: 466–7

중국인들은 6월 12일 한국 5사단 왼쪽 측면에 있는 한국 8사단의 요소들을 공격함으로써 한국 2군단에 대한 압박을 확대했다. 21연대가 방어한 힐 973번지에서 북서쪽으로 9.7km 떨어진 캐피톨 힐 부문에서는 PVA가 처음에는 2개 회사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3개사로 보강한 뒤 전초기지를 먼저 뚫고 연대의 주요 진지를 뚫었다. 한국 10연대 2개 대대는 6월 13일 새벽 반격을 위해 전진했으나 원상복구하지 못했다. 오후 들어 두 개로 추정되는 기업의 또 다른 PVA 공격으로 인해 회사 전초기지를 포기하고 한국군의 추가 철수가 불가피해졌다. 다음날 아침, 중국인들은 21연대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고용하는 등 공세를 계속했다. 비록 한국 부대가 이 드라이브들을 물리쳤지만, 6월 14일 저녁 재난이 발생했다. 먼저 강화된 대대가 21의 3대대를 포위하여 유엔군 전선을 되찾기 위해 독립적으로 싸우는 소규모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이어 PVA 업체 2곳이 1대대의 주력 전선을 들이받아 강제로 철수시켰다. 강화대대의 세 번째 공격이 2대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줄 뒤에 모여 21일의 잔당들은 간신히 단명함을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의 본선을 구축했다. 한국 5사단의 오른쪽 측면에는 882번 힐에서 남동쪽으로 4마일(6.4km) 떨어진 크리스마스 힐로 알려진 지역을 지키고 있는 미 20사단도 공격을 받았다. 6월 10일, PVA 33사단 소속 두 회사는 크리스마스 힐 지역인 힐 1220에 접근하는 회사의 전초기지를 점령했다. 한국 61연대는 반격하여 재승전한 후 전초기지를 다시 주둔시켰다. 한국 5사단 전선에 대한 상황의 중대성이 높아지면서 이 자리를 되찾기 위한 추가 조치가 중단됐다. PVA가 서쪽으로부터 힐 1220으로 이어지는 주요 능선에 위치한 힐즈 973과 882를 보유할 의향이 있음을 보여주자, X군단장 이삭 D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화이트는 예비역인 한국 7사단을 위로 이동시켜 한국 20사단의 왼쪽 측면에 배치했다. 한국 7사단이 북진하는 동안 61연대는 한국 5사단에 대한 압박을 일부 완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인들은 재빨리 반응하여 매 공격을 무디게 할 수 있었다.[9]: 467

6월 14일 PVA 33사단은 한국 5사단과 20사단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고 전자를 북한강 이남으로 후퇴시키도록 강요했다. 이번 철수로 막 방어선에 도달한 한국 7사단의 옆구리가 드러났다. 이번에 중국인들은 충분히 빨리 공격력을 재정비하지 못했다. 한국 5사단이 대치하고 있는 PVA 부대에 X군단 포병과 5공군 근접공군 지원이 집중됐고, 한국 7군단은 한국 5사단이 신설한 PVA 부대와 연계하기 위해 전방 위치를 재조정했다. 한국 8사단은 5일 다른 측면에서도 6월 15일 자매사단과 본진을 묶기 위해 1마일(1.6km) 이상 후퇴해야 했다. 3사단의 남은 2개 연대는 6월 15일 5사단의 왼쪽 측면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 북한강 남쪽 제방을 따라 8사단의 동쪽 지역을 책임지도록 지시했다. 한국 3사단이 방어 태세를 이어받으면서 한국 22연대는 모부대 장악으로 돌아섰다. 동시에 한국 5사단은 북한 동쪽의 지상을 책임지게 된 X군단에 붙었다. X군단은 즉시 한국 5사단에 보급과 장비 진격을 가속화하고, 인원 감축을 대체하기 위해 노력했다. 측면 도로가 부족했기 때문에, 12대의 H-19 헬리콥터가 도움을 위해 할당되었고 그들은 25만 파운드의 자재를 전방으로 들어올렸다. 6월 16일 한국 11사단은 한국 1군단 지역에서 한국 2군단 예비역으로 전환했다.[9]: 467–8

그 행동은 그 후 며칠 동안 서서히 사라졌다. 6월 16일, PVA는 북한 서쪽의 한국 8사단 영토에서 국회의사당에서 동쪽으로 3.2km 떨어진 핑거리지에 있는 한국 제0연대의 전초기지를 공격했으나, 중국 부대는 연락을 끊고 그날 저녁 철수했다. 한국 21연대는 이날 여러 차례의 중대 규모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한국 6사단 19연대의 지원을 받아 21연대가 반격에 나섰고 PVA는 후퇴했다. 핑거리지 남동쪽에 있는 한국 16연대 8사단 주력 전선에 PVA업체 2곳이 침투했지만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지 않았다. 6월 16일 저녁 무렵, 8사단 전선의 PVA 작전은 산발적으로 되었다. 그 후 이틀 동안 PVA는 한국 20사단과 8사단에 몇 차례 경미한 공격을 가했고, 약간의 침투가 있었다. 6월 18일이 되자 사태는 안정되기 시작했고 8군은 9일간의 공세의 피해 상황을 조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9]: 468

PVA는 13km 전선을 따라 한국군을 평균 3km 후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강 동쪽 언덕을 점령했다. 중국군의 추진 결과, 한국군 3개 사단이 보강과 반격 역할에 재배치되었다. 이 조치 동안 한국 부대는 총 7,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PVA의 손실은 6,600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유엔사 방위의 긴밀한 지원으로 공군, 해군, 해병대 항공기가 9일 동안 810개의 출격식을 했고 전략적인 항공 프로그램이 지연되었다.[9]: 468

인터폴(6월 26일~7월 12일)

유엔사는 한국 5사단을 재편성하는 조용한 기간을 보냈고 6월 26일까지 사단은 다시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어 한국 2군단에 통제권이 반환되었다. 그 동안 한국 7사단은 한국 5사단의 오른쪽 측면에 있는 한국 20사단의 위치를 넘겨받았다. 6월 26일 밤, 60군단 PVA 179사단은 1220고지를 잇는 주요 능선에서 한국 5사단 동쪽에 있는 한국 7사단 부대들에 대한 1개 연대와 2개 연대를 급파했다. 중포와 박격포 사격이 동반되었고 PVA는 한국 양 사단의 확고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압박했다. 5호선이 완강하게 땅을 내주고 다음 지형선으로 후퇴하면서 7호도 왼쪽 측면을 지키기 위해 후퇴해야 했다. PVA는 1220 힐 서북쪽 938 힐에 있는 한국 7차 진지를 압박해 침투시켰다. 며칠 동안 한국 7군단은 938 힐을 되찾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PVA는 점유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PVA는 작은 병력으로 언덕을 잡고 한국군의 입주를 허용한 뒤 이 지역에 중포와 박격포 사격을 지시하고 대규모 반격을 가했다. 이 노선을 따라 여러 번의 경험과 증가하는 한국 사상자 명단에 대한 연구 끝에, 화이트 장군은 7월 3일 봉쇄 정책으로 전환했다. 후방의 지형은 방어를 위해 준비되었고 헬리콥터는 추가 공격을 위한 새로운 요새를 준비하기 위해 재료와 탄약을 급히 준비했다. 중국군은 7월 4일 1220 힐에 근접하기 위해 두 차례나 진입을 시도했으나 한국 7사단은 이 두 차례의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9]: 471–2

PVA 작전의 격화와 PVA가 화촌저수지를 목표로 한국2군단-미X군단 분야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정보 소식통들의 보고에 따라 화이트 장군은 한국2군단의 우익을 떠받치기 위한 노력으로 병력을 재배치하게 되었다. 7월 1일부터 그는 한국 20사단과 한국 7사단의 1개 연대를 구제하기 위해 미 45사단을 서쪽으로 보냈다. 후자는 전방의 작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고 한국 2군단 산하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 한국 20사단은 하트브레이크 능선 지역의 미 40사단과 서부 40사단을 교대시켜 45사단의 오른쪽 측면을 강화했다. X군단도 7월 1일 IX군단으로부터 미 5연대 전투단의 움직임에 의해 강화되었다. X군단이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는 동안 군단 전선에 대한 조치는 재배치에 지장을 주지 않는 수준으로 가라앉았다. 후방지역과 포로수용소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마크 W.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6월 말 제24보병사단에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일시적 이동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7월 3일 제34연대 전투단이 한국에 도착했고, 7월 11일 제19보병연대가 뒤따랐으며, 7월 12일 제21보병연대가 부산에 하차했다.[9]: 472

7월 초순에 PVA/KPA는 힘으로는 거의 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8군단은 미래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PVA/KPA 라인 뒤편에서 병력 이동, 교통 혼잡, 비축물량에 대한 보고는 모든 지휘관들에게 그들이 다시 무력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PVA 역추적 화면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금송을 중심으로 한 중앙전선에서 농도가 가장 컸다. 그러나 첫 공세는 금송부문이 아닌 철원에서 나왔다. 7월 6일 PVA 73사단의 요소들이 PVA 69사단의 방어 태세를 뚫고 공격해 한국 2사단 전초기지 2곳을 화살머리로 타격했다. 30시간 이상 수비수들은 종종 근거리에서 중국군을 격퇴해야 했다. PVA는 7월 8일 후퇴하여 재결집했으나, 그날 밤 6500발의 포병과 박격포 사격으로 귀환하여 능선 중 한 곳의 북쪽 비탈을 점령하였다. 7월 9일 한국군의 반격은 그들을 축출하는 데 실패했고 행동은 간헐적이 되었다. 7월 11일 새벽, 거의 3시간 동안 지속되는 싸움에서 두 개의 한국 회사가 PVA를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애로우헤드 전투 중 한국군 사령관은 돌격부대를 순환시켰고, 7월 11일 만남에서 그는 4개 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압력을 가하고 새로운 부대의 지속적인 흐름을 제공했다. 애로우헤드를 위한 6일간의 투쟁으로 한국 2사단은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중국군의 예상 피해 규모는 750명을 약간 넘었다.[9]: 472–3

1953년 7월 6일부터 8일까지의 전투 중에 4 탱크 연대, 2 탱크 사단의 중국 탱크 215 T-34호가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M46 패튼 전차를 또 한 대 파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벙커 26개, 대포 9개, 트럭 1대도 파괴했다.[10] 그 탱크는 현재 중국 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11]

공격 갱신 (7월 13~20일)

7월 13일 저녁 무렵 PVA는 5개 군대의 요소를 금송연대를 아우르는 중앙부문의 공격과 지원 위치로 이동시켰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들을 마주보고 있는 한국 9단과 미국 IX군 수도사단과 한국 6·8·3·5사단이 있었다. 7월 13일 포병 및 박격포 사격 속도가 빨라진 것은 PVA가 중부 전선에서 주로 한국 부대를 겨냥한 대규모 작전을 개시하려 한다는 포로, 탈영병, 요원, 정찰병 등의 초기 첩보보고를 뒷받침했다. 어둠이 내린 후 PVA군은 일제히 전진했다. 육군 24사단 72사단의 강화연대가 한국 9사단의 오른쪽 측면을 타격하는 한편 68사단의 203사단은 금송호 왼쪽 어깨를 지키던 한국 수도사단을 박살냈다. 한국 전초기지는 중국군의 파상공세가 이어지자 파도로 점령됐다. 자정 무렵 PVA 부대는 일부 지역에서 최대 1000m까지 저항의 본선을 관통했다. 오랫동안 분쟁의 골이 되어온 저격리지 부문에서 한국군은 단절되지 않기 위해 철수해야 했다. 밤새도록 양쪽에서 엄청난 양의 포병과 박격포 사격을 퍼붓는 등 압박이 계속되었다. 수도사단과 인접한 한국 6사단 지역에서는 PVA 204사단 소속 4개 대대가 한국 19연대 중대 규모의 전초기지를 타격했다. 7월 14일 아침이 되자 그들은 연대의 본진 진지를 침투하여 1개 친위대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204사단의 요소들은 한국 6사단 부문을 거쳐 서쪽으로 휘둘러 수도사단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다. 7월 13일 동쪽으로 PVA는 4개 기업을 파견하여 한국 8사단 전초기지와 1개 대대를 금송연대의 오른쪽 어깨에 있는 한국 3사단 전초기지에 배치했다. 이들은 또 주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5, 7사단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했다. 7월 14일 아침 PVA 공격 패턴은 한국 3사단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킴으로써 발전했다. 중포와 박격포 지원을 동반한 대대 및 2전투 공격이 한국 3사단의 전초기지를 뚫고 본선으로 진입했다. 22연대와 23연대는 폭행 후 폭행을 당했지만 18연대의 지원으로 차단의 위치를 지켜 가까스로 버텨냈다. 그 후 네 개의 PVA 회사가 인접한 한국 5사단 부문을 통과하여 23d연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중봉쇄의 징후가 뚜렷해지자 한국 3사단은 철수하기 시작했다.[9]: 474–5

PVA가 중앙전선을 따라 한국 전선을 관통하고 모조직에서 부대를 차단하면서 상황은 혼란스러워졌다. 6, 8사단과 수도사단의 병사들은 함께 강점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좌우간 통신 라인은 곧 통용되지 않고 라디오와 풋 메신저들은 지시사항과 정보를 주고받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자매 연대는 종종 연락이 끊기고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한국 지휘관들이 그들의 체면을 잃게 만들 수 있는 불리한 소식을 전달하기를 꺼리는 관례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전방에서 흘러나오는 보고들은 종종 지연되고 대개 불완전했다. 세부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격 첫날부터 6개 사단의 주요 요소인 PVA의 활용이 한국 수도와 3군단 분야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들 부대가 근위대의 어깨를 지켰기 때문에 한국 6사단과 8사단은 옆구리가 이중포장에 노출될 위기에 처했다. 8군 사령관 맥스웰 D. 따라서 테일러는 7월 14일 한국 수도, 6, 8, 3, 5사단에 불루 밑의 금송강 남쪽에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하면 방어선이 곧게 펴지고, 가려질 앞부분이 짧아진다. 그러나 테일러의 지시에 따르는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은 일부 부대와의 접촉과 통제를 상실했고, 그 결과 상당수는 금송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8군단의 함대를 대신하여 더 남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클라크와 테일러 장군은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중국 공세의 강도와 투지는 인상적이었다.187공수연대전투단(187 RCT)은 급히 한국에 파견돼 7월 14일 테일러가 미 2사단에 부대를 파견했다. 후자는 미 3사단의 진지를 이어받았고, 187 RCT는 한국 9사단의 요소를 완화해 한국군의 전선을 좁히고 후퇴하는 수도사단의 왼쪽 측면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사이 미 3사단은 PVA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도사단의 뒤쪽에서 차단 위치로 전환했다. 캐피탈 부대가 후퇴하면서 3사단을 거쳐 후방에서 재편·재복구되었다. 7월 15일 3사단은 수도사단의 부문을 책임지고 사단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했다. 한국2군단 지역에서는 테일러가 한국 11사단을 한국 3사단을 구제하기 위해 사단을 전진 파견한 정일권 중장에게 석방했다. 한국 6사단도 이 노선에서 철수하고, 한국 3사단과 함께 재편성·재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7월 15일 8군단은 수도사단과 한국 11, 8, 5사단의 잔당들을 서쪽에서 동으로 최전방에 배치해 PVA 공세를 견제했다.[9]: 475–6

7월 16일 한국 2군단은 금송강 노선의 반격과 복구 명령을 받았다. PVA의 공세는 이때가 되자 느려졌고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형의 방어를 조직하여 한국군의 진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입은 막대한 사상자를 대체하고 있었다. 한국 11, 8, 5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가하며 같은 날 반격에 나섰다. 가변적인 PVA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금화 동쪽 금송강 쪽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7월 16일에서 19일 사이에 한국 6사단과 3사단과 7사단이 예비군에서 경계 태세를 갖추고 강 이남의 고지대에 올랐다. 7월 19일 한국 6사단은 5사단을 통과하여 한국 6사단의 임무를 맡았다. 금강을 건너 금강의 북쪽 둑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려는 노력은 증가하는 PVA 저항에 부딪혔고 7월 20일 이후 포기되었다.[9]: 476

여파

전쟁 마지막 주 동안 한국 2군단은 사소한 PVA 압력에 맞서 금송강 라인을 유지했다. 반격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금송연대를 없애고 중앙전선에 선을 곧추세웠다. 그들의 침투는 약 9.7km였고, 그들의 공격의 무게는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많은 한국 부대를 단절시키고 해체시켰다.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유실된 지형을 일부 되찾기 위해 한미 9개 사단이 차단과 반격 역할을 해야 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편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크게 선언했다. 반면에, PVA가 주요 드라이브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한 가격은 매우 높았다; 제8군단은 PVA가 그들의 돌파와 그 여파 동안 2만 8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PVA에 가해진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2군단이 반격을 감행하는 동안 PVA/KPA는 휴전협정 체결에 앞서 오랫동안 경쟁해 온 언덕과 전초기지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8군선을 따라 흩어진 여러 지점에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압박의 배경은 비무장지대에 모든 위협 지점이 떨어졌고, 어쨌든 유엔군에 의해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추측하기 어려웠다. 밝혀진 바와 같이, PVA/KPA는 곧 그들의 새로운 이익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전쟁 마지막 주 동안의 전선을 따라 전개된 작전은 이제 양측 모두 한국 정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조사와 순찰으로 다시 가라앉았다.[9]: 476

클라크 장군은 이후 "공산주의 공세가 단 한 가지 이유는 아니더라도 한국의 피비린내 나는 코를 주고, 그들과 세계에 'PUK CIN' - 고 북[이성만]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말처럼 쉽다는 데 내 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9]: 477

인 더 미디어

2020년 영화 '제물'은 금송해전을 배경으로 미 공군과 포병대가 건널목 중단을 시도하는 동안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중국 인민의용군이 반드시 지켜야 할 다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모들

  1. ^ 채, 정&양 2001 페이지 612.
  2. ^ 중국 군사 과학 아카데미 2000 페이지 579.
  3. ^ 중국 군사 과학 아카데미 2000페이지 579-581.
  4. ^ 웨이백머신에 2015-04-23 보관된 "새로운 중국을 위한 전투"
  5. ^ https://books.google.com/books?id=Sv5mjrOixbsC&pg=PA180#v=onepage&q&f=false 페이지 180
  6. ^ 채, 정&양 2001 페이지 679.
  7. ^ a b Xue 1990, 페이지 148.
  8. ^ 채, 정&양 2001 페이지 680.
  9.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Hermes, Walter (1992).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 466. ISBN 9781410224842. Public Domain 글은 공개 도메인에 있는 이 출처의 텍스트를 통합한다..
  10. ^ Lai,P.39
  11. ^ Lai,P.39

참조

  • Chae, Han Kook; Chung, Suk Kyun; Yang, Yong Cho (2001), Yang, Hee Wan; Lim, Won Hyok; Sims, Thomas Lee; Sims, Laura Marie; Kim, Chong Gu; Millett, Allan R. (eds.), The Korean War, Volume III, Lincoln, N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ISBN 978-0-8032-7795-3 volume= 추가 텍스트(도움말)
  • 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2000), History of War to Resist America and Aid Korea (抗美援朝战争史) (in Chinese), Volume III, Beijing: 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Publishing House, ISBN 7-80137-390-1 volume= 추가 텍스트(도움말)
  • Xue, Yan (徐焰) (1990), First Confrontation: Reviews and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War to Resist America and Aid Korea (第一次较量:抗美援朝战争的历史回顾与反思) (in Chinese), Beijing: Chinese Radio and Television Publishing House, ISBN 7-5043-0542-1
  • 벤자민 라이가 1949년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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