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포페 우르시시누스
Antipope Ursicinus우르시누스라고도 알려진 우르시니누스는 366년 다마스쿠스 1세의 라이벌로 격렬한 경쟁을 벌인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366–367년에 로마에서 몇 달 동안 통치했으며, 그 후 항정신병 판정을 받았으며, 381년 이후 사망했다.
배경
355년 아리아인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아누스의 완고한 적수인 생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비난의 형벌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리베리우스를 추방하였다.[1]
리베리우스는 트라이스의 베레아에 있는 감옥에 보내졌다. 콜렉리오 아벨라나는 다마스쿠스가 로마의 집사였다고 말한다.[2] 알바 버틀러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그를 로마 교회의 집사라고 부른다.[3][4] 어쨌든 다마스쿠스는 라이베리우스가 로마로 즉시 돌아왔지만, 그를 따라 망명했다. 로마 성직자들은 라이베리우스를 제외하고는 교황이 없다고 맹세하고, 그의 후계자로 펠릭스 대 집사를 선택했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행동이었다. 라이베리우스가 돌아오기 전 기간 동안 다마스쿠스는 교회 정부에 큰 몫을 했다.
357년 5월, 다수의 저명한 로마인의 주장으로 리베리우스는 귀국을 허락받았다. 분명 황제는 펠릭스와 라이베리우스가 공동으로 통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리베리우스가 펠릭스를 귀환시키자 로마 근처의 포르투로 은퇴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로마에 정착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365년 11월 22일 사망했다.[4] 그러나 로마에서는 여야의 양극화가 극심했다.
역사
리베리우스는 366년 9월 24일에 죽었다. 펠릭스의 상류 계급의 빨치산들은 다마스에게 지지를 던졌지만, 라이베리아스의 반대파 지지자들인 데아콘과 평신도들은 우르시니누스를 지지했고, 두 사람은 폭동의 분위기 속에서 동시에 선출되었다. 지지자들은 이미 10월 초에 충돌했다. 그런 폭력과 유혈이 있었기에 도시의 두 프래이피티(praepici)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1차 후퇴 후 교외로 쫓겨나 137명의 학살이 시치니누스의 바실리카(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에서 인용)에서 자행되자 현관들은 우르시치누스를 가울로 추방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더 많은 폭력이 있었는데, 우르시니우스가 다시 유배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제롬과 루피누스와 같은 교회 역사가들은 다마스쿠스의 일부를 차지했다. 378년 유대교 회당에서 우르시니누스를 비난하고 다마스쿠스를 석방하고 진정한 교황으로 선포했다. 이전의 대척점은 이후 몇 년 동안 다마스쿠스를 상대로 음모를[vague] 꾸몄고, 다마스쿠스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주장을 되살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암브로즈(Epistle iv)에 따르면 우르시니누스는 밀라노의 아리안당 중 한 명이었다.
교황 시마코스(Cymmacus) 휘하의 502년 선언은 평신도들은 더 이상 교황에게 투표해서는 안 되며, 더 높은 성직자들만이 자격이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참고 항목
참조
- ^ 찰스 A. 쿨롬베, 그리스도의 제사장 (Challombe, Vicards of Christ) ISBN0-8065-2370-0), 페이지 73
- ^ "리베리우스와 펠릭스 사이의 교황의 분열" 1 대 4 콜렉시오 아벨라나
- ^ 성 다마스쿠스, 교황, 고백자 (A.D. 305–384) 알바니아 버틀러. 생명 또는 아버지, 순교자 및 기타 주요 성도들, vol. III, ewtn
- ^ a b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펠릭스 (II)
외부 링크
- 헨리 와이스, 기독교 전기 사전: "우르시누스"로, 균형 잡힌 역사적 설명으로, 공평한 이교도 역사학자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의 상세한 인용구를 곁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