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Sinmun of Silla신문왕 | |
한글 | 신문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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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文王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신문왕 |
매쿠네-라이샤워 | 신문왕 |
출생명 | |
한글 | 김정명 style 일소 |
한자 | 金政明 style 日怊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김정명 스타일 일소 |
매쿠네-라이샤워 | 김충명 스타일 일소 |
신라의 신문(재위 681~692년)은 7세기 중엽에 서남한반도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한 한국 국가인 [1]신라 제31대 왕이다. 그는 신라 통일왕 문무왕후 재의왕후의 장남이었다. 신문의 통치는 통일 이후 왕권을 공고히 하고 신라의 통치 기구를 재편하고 체계화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특징지을 수 있다.
신문은 665년에 문무에 의해 왕세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라가 당나라의 군사원조로 경쟁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이후 당나라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려는 야심을 견제하는 데 이어 한반도 통일의 즉시 집권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681년 늦여름(최근 사망한 문무왕에게는 아직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남아 있었다), 왕권에 대한 심각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지도자의 이름을 딴 이른바 '김흠돌 金흠돌 金 revolt aristocratic 반란'도 귀족의 일파에서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지만, 신문이 특정 귀족의 숙청을 통해 권력을 굳히려는 동기를 제공했다. 김씨의 반란의 원인은 논란이 되고 있다. 김흠돌은 딸과 결혼한 신문사의 장인이었다. 그녀를 통해 남성 후계자를 배출하지 못한 신문의 실패, 그리고 이후 법정에서 김 위원장의 호감과 영향력이 잠식된 것이 핵심 요인이 됐을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통일전쟁의 성공적인 종결에 따라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지위가 침식된 군 지도자들(일부 연루자들)의 입장에서 더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귀족적 불평의 근원을 점점 더 정부 직책에 익숙해지고 있던 비 귀족적 관료들의 영향력 상승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681 반란은 곧 진압되고 김흠돌과 연루자들은 처형되었다.
신문이 중앙 권위를 떠받치려는 야심찬 시도의 또 다른 증거는 689년 칙령에 있는데, 이 칙령에는 노업 錄邑, 즉 "스티펜드 마을"이라고 불리는 관급제가 대신하여 토지와 그들의 수행인구를 할당받아 그들의 수입을 빼내게 되었다. 노업신문에 대신하여 관리들에게 오직 "사무용지"(직전 職田)만을 할당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곡물에 대한 세금만 조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분명히 귀족 관료의 지주 권력 기반을 단절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왕실의 계획은 그 힘의 원천을 보호하려는 결단에 단결된 귀족과 견줄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결국 (신문의 재위에는 아니지만) 옛 급료 마을 제도가 부활하게 될 것이다.
또한 689년 신문이 신라의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다 결국 무산된 것도 689년이었는데, 지금의 대구는 신문이 귀족 가문으로부터 왕권력의 저변을 탈피하고, 그렇게 해서 힘을 실어주려고 열심이라는 증거가 다시 나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자본 귀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자본이전 시도의 원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신문이 일찍이 고구려의 왕으로 추대될 안승에게 부여한 도읍지를 폐지하고 683년 신라 수도 경주에서 살게 한 것은 김흠돌의 반란 미수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도 이와 관련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듬해 안승과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당했을 때 신문은 다시 반란을 맞았다. 그 후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빼고 반란을 일으켜 현재 안승의 도읍지인 익산을 점령하였다. 이 반란 역시 진압되었다.
신문의 재위에도 신라 정부의 확대와 신라 영토의 개편이 있었다. 몇 개의 부서가 신설되었고 처음으로 9개 국도(하나라의 전설적인 창시자 유씨왕 때 중국 9개 국도에 대한 명확한 암시를 가졌던 조직)가 조직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패배로 예속된 많은 민족을 이주시킨다는 것이 신문의 정책이었던 '2차 수도'도 설립되었다. 682년 신문도 유교 고전의 관리 양성에 전념하는 국학(國學)을 세웠다. 그는 곧이어 현재 우황후의 통치하에 있는 당나라에 대사관을 파견하여 예서 등 고전의 사본을 요청하였다.
신문은 692년 왕권에 대한 여러 가지 심각한 도전을 극복하고 확장된 신라 국가의 조직과 통치의 틀을 마련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그의 권위에 대한 귀족적 도전은 후기 신라의 특징인 사회 불안과 정치적 격변의 전조였다.
가족
- 할아버지: 무열왕
- 할머니: 문명왕후(한글:문명왕후,한자: 文明王后)
- 아버지: 신라 문무왕
- 어머니 : 김씨 가문의 재의왕후(한글 : 자의왕후, 한자 : 金氏)
- 형제:소명왕자(한글: 소명子, 한자: 昭明)
대중문화
- 2012-2013 KBS1 TV 시리즈 The King's Dream에서 조용진이 연기했다.
참고 항목
참조
- ^ "List of Rulers of Korea". www.metmuseum.org. Retrieved 25 April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