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2세
Yohannes II요한네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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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황제 | |
군림하다 | 1769년 5월 7일 10월 18일 |
전임자 | 이요아스 1세 |
후계자 | 테클 하이마노 2세 |
태어난 | 1699 |
죽은 | 1769년 10월 18일 에티오피아 제국 암하라 주 곤다르 |
배우자 | 월레타 셀라시에 |
집 | 솔로몬 왕가 |
아버지 | 이야스 1세 |
어머니 | 케다스테 크레스토스 |
종교 | 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헤도 |
요한네스 2세(Ge'ez: ዮሐንስ; 1699년 – 1769년 10월 18일)는 에티오피아의 황제였으며 솔로몬 왕조의 일원이었다. 이야스 1세의 아들이며, 테클 하이마노 1세, 도이트 3세, 바카파 황제의 동생이었다.
군림하다
제임스 브루스에 따르면, 그의 형 바카파(1721-1730)의 통치 기간 동안 황제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바카파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케그나즈마흐 기요르기스는 이를 위해 웨니에 있는 왕실 감옥에서 요한네스를 끌어내려서 통치하게 하였으나,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포되기 전에 바카파는 자신을 밝히고, 두 사람, 즉 죽음을 가진 기요르기스와 요한네스는 손을 베어서 벌을 받도록 명령했다.[1] 그러나 브루스의 작품 판에서 알렉산더 머레이는 브루스의 말을 왕립 연대기의 요약으로 대체하였는데, 이 요약본은 요한이 이 사건 이전에 웨니에서 탈출하여 손을 놓쳤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대신 다른 웨니 왕실 포로들과 함께 황제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2] 어느 경우든 요한네는 1720년대나 1730년대에 황제가 되지 않았다.
그 후, 1769년 이요아스 1세를 살해한 데 이어, 라스 미카엘 세훌은 베니에서 고 황제의 대부인 요한네스를 소환하였는데, 비록 요한네스는 그때 적어도 70대였을 테지만, 황제에 대한 선택으로 왕실의회에 그를 상정하였다. 평의회 중 한 사람이 요한네스의 한쪽 손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웨니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에 대한 처벌로 끊겼음) 미카엘은 요한네스가 말을 타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스스로 요한네스를 돕겠다고 대답했다.
미카엘은 요한네스를 미카엘의 어린 손녀인 월레타 셀라시에와 결혼시켰다.
요한네스의 통치는 E. A. 월리스 버짓에 의해 간결하게 설명된다.
- 존은 모든 군사적 문제를 싫어했고, 군대와 함께 행진하는 것을 거부했고, 몸을 숨긴 후 마이클에게 그를 와니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마이클은 반드시 자신의 부대와 함께 진군할 예정이었으나 곤다르에 존과 같은 왕을 떠나려는 계획에 치명적일 것을 보고 어느 날 아침 아침 식사 시간에 독약을 먹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