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Uija of Baekje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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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한자
義慈王
수정 로마자 표기법의자왕
매쿠네-라이샤워지자왕

백제 의자(599년?–660, r. 641[1]–660)은 삼국 중 하나인 백제31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였다.그의 통치는 백제가 경쟁국인 한국의 신라중국의 당 왕조의 동맹에 의해 정복되면서 끝났다.

배경

시기에 연개소문의 지배하에 있던 고구려 북쪽 왕국은 신라와 당나라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신라는 결국 당나라와 밀접하게 교접하여 백제를 중간에 위협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는 무왕의 장남.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무는 신라 선화공주(의자의 어머니)와 결혼한 백제 농민이었으나, 이것은 정통 역사로 여겨지지 않는다.의자는 632년 1월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64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왕이 되었다.

군림하다

처음에는 당나라와 우호적이었지만, 의자는 곧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642년 신라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40여 개의 성을 정복하였다.[2]또 신라의 대야성함락시키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이려고 만 명의 병력을 보냈다.이듬해 고구려와 함께 백제는 신라를 다시 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외교 루트를 막으려 하였다.645년 신라탕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그는 신라를 공격하여 7개의 성을 빼앗았다.백제와 고구려는 655년에 신라의 북쪽 국경을 강타했다.

왕이 되자마자 의자는 귀족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그러나 그의 치세는 귀족들 사이의 내부 권력 투쟁과 법원 내부의 부패와 퇴폐로 인해 시달렸다.

법정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거듭 좌절했던 신라-탕 동맹은 전략을 바꿔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백제의 가을

660년 백제의 해군은 당나라의 해군에 패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백제의 수도 사비(현 충청남도 부여시)는 신라-탕 연합군에 포위되었다.의자와 세자는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피신했다가 사비가 쓰러지자 항복했다.

그는 아들 부여효부여융, 88명의 가신, 1만2807명의 백제 농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그의 아들 중 또 다른 아들인 부여 풍은 후에 아버지의 왕국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2000년 그의 유해가 중국에서 수습되어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 근처에 있는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의 새 무덤에 묻혔다.

의자는 그의 개인 이름이었다. 그는 사후의 이름을 받지 않았다.

가족

  • 아버지: 백제 무왕
  • 어머니: 사택부인(沙aek夫人, ?–642) - 사택적덕부 장관의 딸로 아들 재위 때 문정황후(文正皇后, 文正皇后)가 되었다.
    • 이복형제:부여 교기(李扶翹, ?– ?) – 642년 40명의 귀족과 그의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 왕비: 은고(은고, 恩古) – 의자의 부인은 백제의 몰락의 큰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니혼쇼키에만 언급되어 있다.
      • 부여영(李 buyeo永, 615–682) – 644년 장남, 왕세자를 임명하였다.성을 서씨(書氏)로 바꾸었으며, 부여 서씨(李 seo書氏//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뤄양에서 사망하였다.일본에서는 푸유류라고 불린다.
      • 부여태(扶扶太, ?–?) – 차남,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
      • 부여효(扶扶孝, ?–?) –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 부여연(扶扶 yeon, ?–?) –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
      • 부여 선광( buyeo扶善光, 621–687) – 643년 형 풍과 함께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으나 일본에 머물며 "젠코"라고 불리며 쿠다라노 고니키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 부여 풍(扶扶豊, 623–668) – 643년 동생과 함께 일본에 인질로 보내어 그를 푸유호쇼라고 불렀으나 백제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귀실복신(귀실복신)이 풍장왕(風長王)이라는 이름으로 선포하였으나 곧 붙잡혀 남중국으로 유배되었다.
        • 부여사(扶餘寺, ?– ?) – 부여 풍의 아들로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신라 요원에 의해 암살당했으나 여러 일본 일족의 조상이다.일본에선 데이카오( teika王)라고 불렸다.
      • 부여용(李扶龍, ?– ?)은 형인 풍과 함께 백제 혁명군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유배되었다.
      • 부여 충승(扶餘忠承, ?–?)은 운명을 알 수 없는 부흥운동에 참가했다.
      • 부여청지(李扶淸之, ?– ?)는 운명을 알 수 없는 부흥운동에 참가했다.

대중문화

참고 항목

참조

  1. ^ 일연의 번역가:삼국유사:고려삼국의 전설과 역사, 하태흥과 그라프톤 K가 번역하였다.민츠, 1권 (실크 파고다, 2006), 66. ISBN1-59654-348-5
  2. ^ Whiting, Marvin C. Imperial Chinese Military History: 8000 BC-1912 AD. iUniverse. p. 257. ISBN 9780595221349. Retrieved 2 November 2016.

외부 링크

의자왕
고씨 집 생도 분관
출생: c. 599사망: 660년
섭정 직함
선행자 백제
641–660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