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사흐리르 내각
Third Sjahrir Cabinet제3차 사흐리르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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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제4차 내각 | |
인도네시아 정부(집행부) | |
형성된 날짜 | 1946년 10월 2일 | )
해산일자 | 1947년 6월 27일 ( |
사람과 조직 | |
국가 원수 | 수카르노 |
정부수반 | 수탄자흐리르 |
No. 장관들 중에서 | 26 |
회원당 | 파르타이 소시알리스 인도네시아 파르타이 크리스텐 인도네시아 마젤리스 슈로 무슬리민 인도네시아 파르타이 나시오날 인도네시아 파르타이 코문리스 인도네시아 파르타이부루흐 |
입법부 현황 | 연합 |
역사 | |
전임자 | 스자히르 2세 |
후계자 | 아미르 자리후딘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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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 | ||
캐비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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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 ||
가족 | ||
미디어 및 레거시 | ||
제3차 스자히르 내각(인도네시아어: Kabinet Sjahir Ketiga)은 인도네시아의 제4차 내각이었다. 1946년 10월부터 1947년 6월까지 활동했는데, 이 때 링가드자티 협정의 이행과 그에 따른 네덜란드와의 협상과 관련한 이견으로 인해 무너졌다.
배경
수탄 스자히르 총리 납치사건 이후 탄 말리카가 이끄는 최고정치회의와 수다르만 대통령의 군사력이 수다르만 장군에게 넘어가는 등 책임자들이 수카르노-하타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시도했다. 유괴를 감행한 수다르소노 장군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무함마드 야민과 함께 자카르타로 이동했지만 둘 다 체포됐다. 수카르노는 결국 수디르만을 설득하여 스자르를 지지하고 탄 말리카를 비롯한 반란군의 체포를 지지하였다.[1]
1946년 8월 중순, 중앙 인도네시아 국가위원회는 상황이 현재 의회 내각의 복원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자히르는 다시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임명되었지만, 처음 두 개의 캐비닛을 가지고 즐겼던 것보다 회원을 선택할 자유가 덜했다. 6주간의 협상 끝에 10월 2일 새 내각이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당 출신 의원, 중국과 아랍계 대표, 여성 의원 등이 포함됐다. 같은 날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취소하고 스자르 정부수반장을 임명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10월 5일 서자바 시레본에서 공식적으로 내각을 출범시켰다.[2][3]
구성
수상
부서 장관들
- 외무부 장관: 수탄 자흐리르
- 내무부 장관: 모하마드 롬 (마스유미당)
- 법무부 장관: 소산토 티르토프로도조(인도네시아 국민당 - PNI)
- 재무장관: 사프루딘 프라위라네가라 (마스유미)
- 복지부 장관 : A. K. 가니 박사 (PNI)
- 보건부 장관: 달마 세티아완 박사
- 교육부 장관: 수완디
- 사회부 장관 : 마리아 울파 산토소 (Perwari/PPI)
- 종교부 장관: K. H. Fathoerrachman (마스유미)
- 국방부 장관: 아미르 자리후딘 (사회당)
- 정보부 장관: 무하마드 나츠르 (마스유미당)
- 교통부 장관: 주안다
- 작업장관: 마르티누스 푸투헤나 (인도 기독교당 - 파킨도)
국무 장관(포트폴리오 미포함)
- 국무 장관: 스리 술탄 하멩쿠부와나 9세
- 국무 장관: 와히드 하심 (마스유미)
- 국무 장관: 위키나 (청년회의원)
- 장관 : 소에다르소노 박사(사회당)
- 국무 장관: 탄포관 (사회당)
- 국무 장관: 세티아부디
주니어 장관들
- 외무부 차관: 아구스 살림
- 내무부 차관: 위조노 (인도네시아 농민 전선)
- 법무부 차관: 하디
- 재무부 차관: 루크만 하킴 (PNI)
- 후생부 장관 : 조소에프 위비소노 (마스유미)
- 보건부 차관 : 요하네스 레이메나 박사 (파킨도)
- 교육부 차관: 괴나르소
- 사회부 차관: 압둘 마지드 조조아디닝랏 (사회당)
- 국방부 장관: 하소노쵸크로미노토 (마스유미)
- 정보부 차관: A. R. 바스웨단
- 교통부 차관: 세티아드지드(PI)
- 공공사업부 차관: 헐링 라오 (인도네시아 국민당 - PNI)
내각의 끝
1947년 3월 25일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링가드자티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병력을 철수시킬 계획이었던 영국으로부터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인들과 합의에 이르도록 압력을 가한 결과였다. 이 협정은 자바와 수마트라에 대한 사실상의 인도네시아 주권을 인정하고 인도네시아 연방의 미국 설립을 요구했다.[5] 그러나 양측은 이 합의에 대해 점점 더 이견을 보이며 서로를 위반으로 고소했다. 이후 판 무크 중장이 밝힌 1947년 5월 27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쟁 위협으로 본 네덜란드의 최후통첩에 이어 스자히르는 중간적인 네덜란드 주권과 대외정책 통제 등 일련의 양보를 했다. 아미르 스자리푸딘, 위키나 등 내각의 많은 좌익 인사들은 이러한 양보를 비난했고, 군소 정당들이 하나둘씩 스자리르를 버렸다. 이후 마스유미가 합류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자히르는 6월 27일 이른 시간에 사임했다. 수카르노는 다시 한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내각에 교체될 때까지 유임할 것을 요청했다. [6][7]
참조
- 카힌, 조지 맥터넌(1952) 인도네시아 코넬 대학 출판부의 민족주의와 혁명, ISBN0-8014-9108-8
- Ricklefs (1982년), 맥밀란 동남아시아 재인쇄, ISBN 0-333-24380-3
- Simanjuntak, P. N. H. (2003), Kabinet-Kabinet Republik Indonesia: Dari Awal Kemerdekaan Sampai Reformasi (in Indonesian), Jakarta: Djambatan, pp. 41–51, ISBN 979-428-4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