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나가 사건

Takenaga incident
Black and white photo of Australian troops, armed with rifles, posing in a relaxed manner in front of a group of Japanese prisoners.
일본군이 아이타페로 날아가기 전에 호주군 병사(앞줄)와 함께 투항(뒷줄)한 다케나가의 부대.왼쪽에서 세 번째 호주군 병사는 C 중위다.H. 마일즈.

다케나가 사건(일본어: 竹永件件, 헵번: 다케나가 지켄)은 1945년 5월 3일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발생한 일본 제국 육군 대대의 항복이었다.다케나가 마사하루 중령이 지휘하는 이 대대는 뉴기니 동부의 호주군에 항복했다.[note 1]항복이 매우 불명예스럽게 여겨졌던 일본군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배경

Black and white photograph of two Australian soldiers taking cover behind an embankment. One is aiming his rifle over the top.
1945년 6월 위왁 지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호주군 병사들.

뉴기니 유세에서는 일본 열여덟 군단이 연합군 전선에 밀리고, 그들의 지위는 전략적 가치가 없었지만, 여전히 전투를 계속했다.드리니우모르 강 전투에서 미군이 18군단의 반격을 격파한 후, 일본군은 홀로 남게 되었다.그러나 1944년 하반기 호주군이 뉴기니 캠페인을 인수하자 남은 일본군을 철저히 정리하기로 했다.

해군 보급선이 끊기고 드리니우모르 강에서 기존 보급품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전시의 일본 육군 사단의 통상적인 규모는 2만 명이었지만, 1945년 5월 초에는 겨우 1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2][note 2]

다케나가의 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명목상으로는 대대였지만, 수적으로는 소대 규모였고, 그 부대에서는 보통 보병의 반밖에 되지 않는 규모였다.나머지 부대는 드리니우모르 강에서 총기가 모두 소실되면서 분대가 해체된 41사단의 옛 산악포와 그 중에서도 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타케나가 자신은 포병 전문가였으며, 제3대대대대 41 산악포병연대 사령관직에서 제239보병연대로 옮겨져 있었다.18군단은 1945년 9월쯤이면 그들의 식량과 의약품이 소진되고, 연말쯤이면 무기가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상황이 너무나 비참해서 7월 18군단은 명령(18육군명령 371호)을 내리며 전 병력을 교쿠사이, 즉 항복 없는 명예로운 죽음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제국군들 사이에서도 유례없는 움직임이었다.[3]한 중위는 선거 운동 마지막 단계에서 군대는 군대의 역할을 중단하고 거지의 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반영했다.[4]

일본군이 뉴기니에서 맞닥뜨린 상황의 심각성은 그곳에서 일어난 식인 풍습 사건에서 드러난다.일부 해설자들은 다케나가의 부대가 식인 풍습이 행해진 곳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이들이 항복하기 직전 타케나가 부대가 그곳에서 교전 중 살해된 타우 마을 주민 중 한 명의 시신을 먹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호주군은 조사하기로 결정했다.타케나가 부대의 포로들을 심문할 때, 그들은 일부 부대가 마을 주민을 잡아먹는데 관여하였지만, 그 이후 책임이 있는 군인들이 죽었다는 진술을 받았다.이 때문에 호주군은 포로들에게 식인 풍습 혐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전쟁 후 자신이 관여했음을 시인하는 생존자들의 기록도 있다.타케나가의 부대가 건강하고 질서정연했다고 호주 육군이 기록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다나카 유키씨는 전 부대가 정기적으로 집단으로서 식인 풍습을 실천하고 있다고 분개한다.[5]사토 기요히코는 부대원들 중 일부가 식인 풍습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식인 풍습이 집단적인 관행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병사들이 남긴 메모의 설명과 같은 증거를 지적함으로써 다나카 씨의 결론에 의문을 던진다.[6]

센진쿤 군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뉴기니에서 일본군이 직면한 상황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당시 일본에서 적 포로가 된 것은 극히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일본 육군 형법에서는 투항을 명령하는 지휘관들을 일종의 탈영으로 취급했고, 전장에서 전의를 다해도 투항은 여전히 6개월의 징역형(41조)으로 처벌받았다.18군 사령관 아다치 하타조 중장도 1945년 3월 18일 병사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포로가 되는 수치심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이에 따라 일본군이 집단으로 투항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타케나가 부대를 제외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집단으로 항복한 다른 예로는 아래에서 논의되는 뉴기니의 다른 2개 군단과 오키나와 전투에서 우메자와가 지휘하고 자마미 섬을 방어하는 육군 해군 레이더 편대가 유일했다.[7]그러나 다케나가의 부대는 첫 사례가 아니었는데, 1905년 5월 러일전쟁묵덴 전투에서 1사단의 49보병연대 소속 회사 생존자 42명이 모두 포로가 된 사건이 있었다.[8]

호주군 사이에서도 항복을 시도한 일본군을 죽이는 풍조가 나타났다.포로 한 명도 데려가지 않고 일본군을 모두 죽이겠다는 호주군 최전방 병사들 사이에 무언의 동의가 있었고, 이러한 행동은 호주군 사령부의 묵시적 동의를 받았다.[9]

사건

1945년 3월부터 4월까지 일본 제국군 제18군단에 배속된 41사단 제239보병연대는 뉴기니 동부에서 호주군과 적대행위를 벌였다.호주인들은 북쪽 해안에 있는 아이타페 근처의 남쪽 토리첼리 산맥을 통해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다.41사단의 기록에 의하면, 다케나가 지휘하고 50여 명의 병사로 구성된 제2대대는 동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연대와 분리하여 서쪽으로 향하기로 했다.[10]그러나 대대의 한 병장이 작성한 메모에 따르면 연대 본대는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고 후퇴했고,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줄 알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로 했다.[11]

4월 중순(12일, 마을 주민에 의하면, 다케나가의 부하 중 45명 정도가 식량을 찾기 위해 몇 채의 집밖에 없는 마을인 타우를 습격했다고 한다.창과 수류탄 투척으로 무장한 마을 사람들이 수색하던 중 병사들을 공격해 보복이 일어났다.마을 사람들은 재빨리 퇴각했지만, 군인과 마을 사람들은 각각 두 명의 사망자를 냈다.일본군들은 다음날 아침 타우를 떠났지만, 그 지역에 남아 있었다.[12][5]

호주군은 경찰과 마을 주민들의 신고를 통해 일본군의 주둔을 알게 되었고, 4월 16일 C중위가 이끄는 2/5대대의 소대를 파견했다.H. 마일즈,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1]4월 24일 마일즈의 소대가 다케나가의 대대와 접촉하게 되었고, 쌍방이 불을 주고받은 후 일본군 2명이 전사했다.[13]

Takenaga incident is located in Sandaun Province
Takenaga incident
현대판 파푸아뉴기니 산다운성에 있는 투항지 웜그레러 마을의 위치.

다케나가의 부대는 가까스로 호주인들의 추격을 뿌리쳤지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그들은 병사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항복 통지가 들어 있는 전단을 들고 영문으로 아래에 몇 가지 조건을 붙여 호주인들이 찾을 수 있도록 기둥에 묶은 뒤 그 지역을 떠났다.그러자 마일즈 소대의 정찰병들이 전단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5월 2일, 호주 소대는 워머러 마을 근처에서 타케나가의 부대를 발견하고, 원주민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일본 쪽에서 2명의 휴전선수가 호주인들에게 와서 교섭을 하였고, 다음날 다케나가 부대는 웜그레르에서 항복하여 무장해제를 당했다.투항 당시 다케나가 부대는 장교 5명(타케나가 포함), 영장전담관 4명, 부사관과 군인 33명 등 42명으로 구성됐다.경기관총 5발, 소총 17발, 권총 5발, 탄약 750발을 갖추고 있었다.[13]죄수들은 마일즈의 소대의 호위를 받으며 마프리크 공항까지 질서정연하게 사흘 동안 행군한 뒤 아이타페로 이송되었다.

다른 일본군은 다케나가 부대가 길을 잃은 줄 알고 수색에 나섰지만 호주군이 배포한 선전 포스터를 통해 이들의 항복을 알게 됐다.[14]

항복 결정에 대한 이론들

다케나가 부대를 항복 결정으로 이끈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첫째는 부대원 전원이 결정에 관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장교들만 관여했다는 것이다.

하타가 연구를 위해 의존했던 하타 이쿠히코와 다카하시 후미오에 따르면 대대장이 항복에 동의한 후, 다케나가 부대의 다른 병사들은 이 계획에 동의할지를 보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다카하시와 하타에 의하면, 살아남은 회사 지휘관 중 한 명에 의하면, 투항은 다케나가로부터 명령이라는 말을 들은 후, 찬성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그러던 중 절반가량의 병사들이 손을 들지 않자 수류탄(수류탄)을 발급받아 스스로 운명(자살을 위한 일본식 완곡어)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이 일이 있은 후, 모든 병사들이 항복 계획에 동의했다.[15]

사토 기요히코에 의해 반대되는 관점이 잡히는데, 사토 기요히코는 대대장들에게만 그 계획에 동의했느냐고 물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사토에 따르면 하타와 다카하시가 언급한 목격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더욱이 갓 진행된 인터뷰와 병장의 메모로부터 사토는 장교와 영장전담관만이 항복 결정에 관여하고, 다른 병사들은 명령만 받았다고 분개한다.[16][note 3]

여파

타케나가 부대는 아이타페에서 한 달 정도 억류됐다가 해체돼 와 호주의 수용소로 보내져 좋은 대우를 받았다.모두 심문을 받았고, 특히 다케나가 중령은 자세한 심문을 위해 마닐라로 이송되었다.다케나가는 18군 사령관들에 대한 인물 정보 제공과 함께, 연합군이 히로히토 천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전하면서, "황제가 살해되면 일본 국민은 끝까지 저항하겠지만, 천황의 명령이 있다면 아마도 평화롭게 항복할 것"[18]이라고 말했다.심문에 대비하여 다케나가 부대의 병사들은 항복하기 전에 거짓된 개인명과 부대명을 발명하였지만, 호주군 위왁 구역에서 압수한 문서로부터 이를 거짓으로 인정했다.일부 수감자들은 압류된 문서의 번역과 일본군의 항복을 촉구하는 선전방송도 도왔다.[19]

다케나가의 항복 이후, 18군단은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뉴기니에서 전투를 계속했다.타케나가 부대를 대체하기 위해 239 보병 연대 제2대대를 새로운 대원으로 개편했다.[note 4]그러나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개혁 2군단 소속 2개 기업이 호주인들에게 잇달아 항복했다.호주 육군의 기록에 따르면 8월 10일 12명의 군인과 선장이 포로로 잡혔으며, 8월 11일 16명의 군인과 선장이 포로로 잡혔다.[21]그 이유로는 일본군의 항복에 대한 호주군의 간청, 다케나가 부대가 정한 선례, 죽을 때까지 진지를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22]드리니우모르 강 전투 이후 18군단의 생존율은 25%에 불과해 다케나가 부대(드리니우모르 생존 50명 중 42명)의 84%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23]

다케나가 부대의 투항은 일본군의 극히 불명예스러운 행동으로 비쳐졌다.아다치 중장은 그 사실을 알고는 41사단 지휘관들을 강하게 질책하고 [14]황제에게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덕이 없는 것을 사과했다.[24]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케나가에게는 대부분 치욕으로 여겨졌고, 다케나가 사건에 어떤 빛도 비치기에는 한참이 지난 뒤였다.반면 Takenaga의 항복 다이 Yonjūichi Nyū Ginia Sakusenshi(그 41st과의 뉴기니 운전의 역사), 사람들은 41과와 관련된 컴파일되고 전사 삼 Sōsho, 태평양 전쟁의 군사적 역사는 국방 Agency,[10]에 의해 발표에 기록되었습니다도 비록 Takenag가 이 행사를 기록했다 역사 있었다.한의유닛이 전멸된 상태였다.1986년 다카하시 후미오의 글이 발표된 후 이 사건에 대한 경각심은 점차 높아졌지만,[25] 2009년 현재도 투항 사실을 부인하는 군인들이 있었다.예를 들어, NHK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18군 참모장이자 소령이었던 호리에 마사오는 "지금까지 투항 같은 것은 들은 적이 없고, 투항한 병사는 없었다고 믿는다.항복한 사령관이 있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오."[26]

타케나가 부대의 전 멤버들은 다른 부대의 포로들과 함께 전쟁 말기에 송환되었다.이들 중 상당수는 참전용사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면접도 받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다케나가는 개인 노동자로 일하다가 196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전 학우들과 특별한 차별을 겪지 않았고, 그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27]

참고 항목

메모들

  1.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공식 전쟁사에서 그 이름은 다케나가 대신 타게나카(Tagenaka)[1]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2. ^ 41사단과 20사단의 병기도 박격포 1기, 중기관총 20기, 경기관총 24기로 축소됐다.권총도 부족했고, 각각 20~30발만 사용할 수 있었다.
  3. ^ 사토에 의하면, 타카하시에게 연구 상황에 대해 접근했을 때, 다카하시가 자신이 인용한 증인들이 그 후 죽었다고 거짓으로 주장하면서, 자신의 논문에, 진부쓰에게의 레키시(Rekishi)의 글(역사·사람)에 어느 정도 극화가 들어 있다.[17]
  4. ^ 서류상으로는 개혁된 대대는 대대 본부와 보병 2개 중대, 기관총 1개 중대 등으로 구성됐다.실제는 타케나가 부대와 같은 규모였다. 즉, 중기관총 한 자루만 가지고 한 소대 정도의 규모였다.[20]

참조

  1. ^ a b 1963년 장 "14장: Maprik and Wewak Taked Archived 2015-02-17 Wayback Machine", 페이지 334.
  2. ^ 1975년 군사기록원 페이지 397.
  3. ^ 1975년 군사 기록 보관소 402쪽
  4. ^ 1975년 군사기록원 페이지 408.
  5. ^ a b 다나카 1993, 페이지 233–235.
  6. ^ 사토 2003, 페이지 154-155.
  7. ^ 하타 & 다카하시 1998 페이지 466–467.
  8. ^ 푸키우라 1990, 페이지 170–171.
  9. ^ 다나카 1993, 페이지 247–248.
  10. ^ a b 1975년 군사기록원 페이지 385.
  11. ^ 사토 2003, 페이지 142.
  12. ^ 사토 2003, 페이지 143.
  13. ^ a b 하타 & 다카하시 1998 페이지 393.
  14. ^ a b 하타 & 타카하시 1998 페이지 388.
  15. ^ 하타 & 다카하시 1998, 페이지 392–393.
  16. ^ 사토 2003, 페이지 136, 138, 143–144.
  17. ^ 사토 2003, 페이지 109–111.
  18. ^ 하타 & 다카하시 1998, 페이지 400–401.
  19. ^ 사토 2003 페이지 148.
  20. ^ 사토 2003, 페이지 162.
  21. ^ 1963년 장, "15장: 타자키와 시부랑구 2015-02-17을 웨이백머신보관" 페이지 367–368.
  22. ^ 사토 2003, 페이지 155, 167.
  23. ^ 사토 2003, 페이지 114.
  24. ^ 사토 2003 페이지 156-157.
  25. ^ 사토 2003 페이지 106.
  26. ^ NHK 2009, 페이지 263–264.
  27. ^ 사토 2003 페이지 160–161.

참고 문헌 목록

  • NHK "Sensō Shōgen" Project (2009). Shōgen Kiroku: Heishi-tachi no Sensō 3 [Witness Records: The Soldiers' War 3] (in Japanese). NHK. ISBN 978-4140813447.
  • Satō, Kiyohiko (2003). Dotanba ni Okeru Ningen no Kenkyū: Nyū Ginia Yami no Senseki [Researching Man's Last Moments: The Dark Battlefields of New Guinea] (in Japanese). Fuyō Shobō. ISBN 978-4829503348.
  • Tanaka, Yuki (1993). Shirarezaru Sensō Hanzai: Nihongun wa Ōsutoraria ni Nani o Shita ka [Unknown War Crimes: What the Japanese Army did to Australia] (in Japanese). Ōtsuki Shoten. ISBN 978-4272520305.
  • Hata, Ikuhiko; Takahashi, Fumio (1998). "Dai 19-sho: Nihongun Zendai Mimon no Shūdan Tōkō" [Chapter 19: A Group Surrender, Unprecedented in the Japanese Army]. Nihonjin Horyo: Hakusukinoe kara Shiberia Yokuryū made [Japanese Prisoners of War: From the Battle of Baekgang to Siberian Internment] (in Japanese). Vol. 2. Hara Shobō. ISBN 978-4562030729.
  • Military Archives, National Institute for Defense Studies, Japanese Defense Agency (1975). Minami Taiheiyō Rikugun Sakusen 5: Aitape, Puriaka, Rabauru [The Army's Strategy in the South Pacific 5: Aitape, Puriata, Rabaul]. Military History Series (in Japanese). Asagumo News. ASIN B000J87R9A.{{cite book}}: CS1 maint : 복수이름 : 작성자 목록(링크)
  • Fukiura, Tadamasa (1990). Horyo no Bunmeishi [History of Prisoners of War]. Shinchō Sensho (in Japanese). ISBN 978-4106003875.
  • Long, Gavin (1963). "Volume VII: The Final Campaigns".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Series 1: Army, Australian War Memorial. Retrieved 2010-08-06.

추가 읽기

  • Takahashi, Fumio (1986). "Nihongun Zendai Mimon no Shūdan Tōkō" [A Group Surrender, Unprecedented in the Japanese Army]. Rekishi to Jinbutsu (in Japanese) (Summer ed.). Chūō Kō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