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덴 전투

Battle of Mukden
묵덴 전투
러일 전쟁의 일부
Russian Field Gun during the Battle of Mukden.jpg
묵든 전투 중 러시아 야전포 발사
날짜1905년 2월 20일 ~ 3월 10일
(2주 4일)
위치
만주 묵덴(현대 선양) 남쪽
결과 일본의 승리[1]
영역
변화들
만주 남부의 전역을 일본인이 점령하다.
러시아군은 만주 북부로 후퇴한다.
호전성
Empire of Japan 일본 제국 Russian Empire 러시아 제국
지휘관과 지도자
오야마이와오 알렉세이 쿠로팟킨

27만250명 병력

  • 26만2900명의 보병
  • 7,350 기병
992포
기관총[2] 200여 발포
34만 명의[3] 병력
총 1219발
88 기관총[2]
사상자 및 손실

총 77,504개:

  • 15,892명 사망
  • 부상자 59,612명
  • 2000명[4][5] 캡처

총 88,352개:

  • 8,705명 사망
  • 부상자 51,438명
  • 2만 8209명의 MIA, 그 중 2만 2천명이 포로로[6] 잡혔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치러지는 최대 규모의 육상전투 중 하나이자 러일전쟁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주요 육상전투묵덴 전투(奉天会, 호텐카이젠)[7]는 1905년 2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 만주 묵덴 부근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 벌어진 전투였다. 이 도시는 현재 중국 랴오닝 성의 수도인 선양이라고 불린다.

61만 명의 전투 참가자와 16만4천 명의 전투원 사상자를 낸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벌어진 가장 큰 현대식 전투였으며, 아마도 그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전투였을 것이다.[8] 특히 전투의 규모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일본측만 해도 불과 열흘 남짓의 교전 끝에 2011만 발의 소총과 기관총, 27만9394발의 포탄을 발사해 191일간의 프랑코-프러시아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의 탄약 소모량에 필적했다.[9]

배경

랴오양 전투(1904년 8월 24일 ~ 9월 4일)에 이어 러시아군은 묵덴 남쪽 샤호 강으로 후퇴하여 다시 집결하였다. 1904년 10월 5일부터 1904년 10월 17일까지 샤호 전투 중 러시아군은 반격에 실패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늦출 수 있었다. 1905년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싸운 두 번째 러시아 반격전인 산데푸 전투도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했다.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연합군은 미완성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해 증원군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일요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국내에서의 소요사태의 영향으로 이제 그 자원의 상당 부분이 업리시 진압에 투입되어야 할 만큼 제국군 전체의 인력에 부담이 되었다.그 영토 전체에 걸쳐서 ngs. 따라서 러시아군은 본국으로부터 증원 및 물자를 거의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인들의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아서항 포획으로 당시 북진했던 3군단이 공격에 대비해 묵덴 부근의 왜선을 보강하기 위해 진격했지만 1905년 2월경에는 일본군의 인력 비축량이 소진된 상태였다. 노기장군의 3군단이 도착함에 따라 일본의 전 전투력이 묵든 부근에 집중되었다. 러시아 발트해 함대의 심각한 사상자와 혹독한 한랭 기후, 접근은 러시아군이 만주 더 먼 곳으로 철수할 수 있는 또 다른 승리보다는 러시아군의 완전한 파괴를 초래하도록 오야마 마샬에게 압력을 가했다.

힘의 처분

일본 사단 구성

묵덴 남쪽의 러시아 노선은 길이가 140km로 깊이가 거의 없고 중앙 보호구역이 있었다.

따라서 쿠로파트킨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순전히 방어적인 배치로 처분했는데, 그 배치로부터 라인의 큰 격차를 벌리지 않고서는 공습을 감행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측(일본 만주군)에서는

압록강군은 전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IJA 11사단(포트 아서 출신)과 예비군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해주 크라이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일본 만주군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 총사령부 산하에 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실질적으로 만주 본부의 산하에 있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일본군이 그러한 지형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산악지대인 동부 지역에서 주요 일본군의 추격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 지역에서 11사단 출신의 전 3군 참전용사들이 그의 소신을 강화했다.

오야마 야전사령관의 계획은 무크덴을 포위하기 위해 군대를 초승달로 편성해 러시아군의 도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크덴 시 내에서 전투는 피하라는 명령을 분명히 했다. 전쟁 기간 내내 일본인들은 민간인 사상자를 피하고 중국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두기 위한 치밀한 민정 정책을 추구해 왔었는데, 이는 이전의 중일 전쟁과 이후의 중일 전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전투

2월 23일까지의 군대, 적색으로는 일본 제국군 만주군, 녹색으로는 러시아 제국군.
3월 2일까지 군대의 위치: 만주 일본군은 북쪽으로 진격하고 3, 2군을 통해 서쪽으로 넓은 측면 작전을 수행하여 북쪽에서 묵덴 쪽으로 철수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포위하여 더 나은 방어 자세를 취한다.
3월 7일까지 군대의 위치: 러시아군은 마침내 훈강 북쪽과 시베리아횡단철도 앞에서 무크덴 시를 중심으로 진지를 통합하고, 이후 적들의 처지를 탈구하기 위해 수많은 공격을 감행한다.
3월 8일까지의 군대의 위치: 연이은 공격 후, 일본군은 마침내 러시아 전선의 중앙에 균열을 일으켜 러시아 국방의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결론, 3월 10일: 전반적인 상황이 절망적인 가운데 러시아군은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일본군의 상당수는 묵든 서쪽 포켓의 잔해를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지쳐서 정지할 때까지 적을 추격한다.
묵덴 전투 중 정찰 임무를 받고 있는 러시아 기병대

이 전투는 일본 5군이 2월 20일 러시아군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2월 27일 일본 4군은 오른쪽 측면을 공격했고, 다른 일본군은 러시아 전선도 공격했다. 이날 일본 3군단은 묵덴 북서쪽 넓은 원형으로 이동을 시작했다.[citation needed]

1905년 3월 1일까지 동부전선과 중부전선의 활동은 대체로 정적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작은 진전을 이루었지만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3월 7일까지 쿠로파트킨 장군은 일본 3군의 무크덴 서쪽 측면에 대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노기 장군의 움직임에 대해 너무 염려해 스스로 반격을 주도하기로 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세력 이동은 러시아군에 의해 잘 조정되지 않아 제1·3만주군은 거의 혼란으로 해체되었다. 그 후 쿠로파트킨은 무크덴을 향해 북쪽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시 남서부와 시 남동부의 훈강둑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정했다.[citation needed]

그러자 오야마 야전사령관은 기다리던 기회를 붙잡았고, "공격하라"는 그의 명령은 "습격하고 파괴하라"로 바뀌었다. 날씨가 늦게 풀려서 일본인들은 운이 더 좋았다. 미하일 알렉세예프 소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좌익이 지키고 있는 훈강은 얼어붙은 채 남아 있어 일본군의 공격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을 건너면서 현재 폴 폰 레넨캄프 장군이 지휘하고 있는 러시아군으로부터 오는 경직된 저항과 중포 사격에 부딪히면서 일본의 공격은 방해를 받아, 아직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강 북쪽 둑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둑을 방어하는 러시아 방어선이 무너지고 왼쪽 측면의 먼 가장자리가 쿠로팟킨 군대의 나머지 본대와 부분적으로 단절되었다. 동시에 묵덴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경사가 형성되어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오른쪽 측면에 있는 러시아인들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citation needed]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군

포위된 채 승리에 대한 희망도 없이 쿠로패트킨 장군은 3월 9일 18시 45분에 북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군의 철수는 노즈 장군이 훈강 상공의 러시아 후미선을 뚫으면서 복잡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흐트러진 패주로 변했다. 패닉에 빠진 러시아군은 타이흘링을 향해 북쪽으로 날아가는 과정에서 부상자와 무기, 보급품을 버렸다.[citation needed]

3월 10일 오전 10시, 일본군이 묵덴을 점령했다. 그들이 무크덴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강경 추격을 계속했으나, 오야마가 자신의 군대의 보급선이 너무 얇게 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이 방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게으르고 느리지만, 적의 추격을 계속하였다. 추격은 무크덴에 20km 모자랐지만 러시아군은 이미 타이흘링에서 더 북쪽의 중-러 국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고, 일본군을 승자로 삼아 전투는 끝났다.[citation needed]

전투 내내, 많은 외국 군사 관측자들이 다음 대전이 어떻게 펼쳐질지 관찰하기 위해 참석했다. 묵든 전투는 제1차[citation needed] 세계대전에 쓰일 전술을 예감케 했다.

결론

전투 후 중-러 국경을 향해 러시아군 후퇴

러시아의 사상자는 거의 9만 명에 달했다.[4][5] 러시아군은 또한 대부분의 전투 물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포와 중기관총도 잃어버렸다.[citation needed] 쿠로파트킨 장군은 더 이상의 일본의 진보를 우려하여 티엘링 마을을 성화봉송에 투입할 것을 명령하고, 남은 부하들을 열흘 더 북쪽으로 흐싱카이(중국 지린 성 현대 시핑)의 새 방어선으로 진군시켰는데, 그곳에서 미하일 바티야노프(본 빌들링 장군을 제3만주군 사령관으로 대체했다)가 조직되었다.일본의 새로운 공격에 대한 강화된 방어책 그러나 쿠로파트킨은 이 노선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했고, 곧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완전한 철수를 조직했다. 일본군은 7만5천명의[4][5] 사상자를 냈는데, 여기에는 러시아인들보다 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58개의 포를 포획했다.[10]

이 전투 이후 육지에서 벌어진 심각한 전투는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모두 이 전투로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여파

전쟁으로부터의 일본의 선전: 차르 니콜라스 2세가 전투로부터 복귀한 후 구타당하고 부상당한 러시아군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목판화. 화가 코바야시 키요치카, 1904년 또는 1905년.

묵든에서 러시아 만주군이 패배하면서 러시아군은 만주 남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과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일본군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쿠로파트킨의 군대는 심각한 사기가 저하되고 물자가 부족하고 해체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여전히 대부분 온전했다. 그러나 무크덴 전투는 러시아인들의 사기를 꺾을 만큼 결정적인 전투였고, 현재 일본 수중에 있는 미완성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인해 차리스 정부의 전쟁 노력을 약화시켰다.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전쟁의 전투는 결국 쓰시마 해역에서 치러질 것이다.[11]

이번 승리는 러시아군이 더 많은 인력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내내 일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유럽 군대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자동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며, 심지어 결정적으로 전투에서 우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세계에서 6번째로 큰 군대를 확인시켜 주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특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 소식이 세인트의 궁전에 전해졌을 때였다.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대륙의 약 2%인 작은 아시아 섬나라 일본이 강력하고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차르주의 정부는 전투 중 지휘관들의 무능과 무뚝뚝함에 짜증을 냈다. 삼소노프가 매우 공개적으로 폰 레넨캄프가 자신을 돕지 않았다고 비난하자 장군 알렉산드르 삼소노프와 폴 레넨캄프는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 장군들은 훨씬 더 참혹한 탄넨베르크 전투에 관련된 두 군대를 지휘할 것이다.

참고 항목

인용구

  1. ^ 터커 2009년, 페이지 1542: "그렇지만, 묵든 전투는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다."
  2. ^ a b 클로드펠터 2017, 페이지 359.
  3. ^ 메닝, 페이지 187
  4. ^ a b c 메닝 페이지194
  5. ^ a b c 마틴 페이지 207
  6. ^ 러시아 주요 군사 의료국(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통계 보고서. 1914.
  7. ^ 파머, 콜튼 & 크레이머 2007, 페이지 673
  8. ^ 사상자별 전투 목록을 참조하십시오.
  9. ^ 존 스타인버그(편집자) "세계적 관점에서의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권. 브릴 아카데믹 펍: 2005년 5월. 191-192페이지.
  10. ^ 제임스 D 소령의 88페이지 "루소-일본 전쟁, 배우지 못한 교훈" 시즈모어. 일본군은 무크덴에서 비교적 적은 양의 러시아 포를 포획했다.
  11. ^ 터커 2009, 페이지 1542.

참조 및 추가 판독

  • Clodfelter, M. (2017). Warfare and Armed Conflicts: A Statistical Encyclopedia of Casualty and Other Figures, 1492–2015 (4th ed.). Jefferson, North Carolina: McFarland. ISBN 978-0786474707.
  • 코노턴, 리처드(2003년). 라이징 선과 텀블링 베어. 캐셀. ISBN 0-304-36657-9
  • 히긴스, 데이비드 R. "묵든 전투: 전략전술분석=일본의 떠오르는 제국은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육상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전략전술 270(2011): 26+.
  • 카오너, 로템(2006년). 러일전쟁의 역사사전. 허수아비. ISBN 0-8108-4927-5
  • 마틴, 크리스토퍼 러일 전쟁. 아벨라르 슈만 ISBN 0-200-71498-8
  • 메닝, 브루스 W. 전투 전의 베이오네츠: 1861년–1914년 러시아 제국군. 인디애나 대학교 ISBN 0-253-21380-0
  • 니시, 이안(1985년). 러일 전쟁의 기원. 롱맨. ISBN 0-582-49114-2
  • Palmer, R. R.; Colton, Joel; Kramer, Lloyd (2007). A History of the Modern World (10th ed.). Boston: McGraw-Hill. ISBN 978-0-07-310748-6.
  • Tucker, Spencer (23 December 2009).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ABC-CLIO. ISBN 978-1-85109-672-5. Retrieved 25 April 2015.

좌표: 41°47°N 동경 123도 26도 / 41.783°N 123.433°E / 41.783; 123.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