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분쟁
Sochi conflict소치 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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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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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군사 지원: | | ||||||||
지휘관과 지도자 | |||||||||
조르기 마즈니아쉬빌리 이오셉 게데바니쉬빌리 발리코 주겔리 프리드리히 크레센슈타인 | 유수프 이제트 파샤 | ||||||||
사상자 및 손실 | |||||||||
알 수 없는 | 알 수 없는 |
소치 분쟁은 반혁명적인 백러시아군, 볼셰비키 적군과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참여한 3자 국경 분쟁으로 각각 흑해읍 소치에 대한 통제를 모색했다. 이 분쟁은 러시아 내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1918년 7월부터 1919년 5월까지 다양한 성공으로 지속되었고, 현재의 러시아와 조지아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을 설정하는 영국의 중재로 끝이 났다.
배경
그루지야의 주장은 이 지역이 중세의 조지아 왕국에 의해 위신과 힘의 절정기에 정치적으로 지배되어 있다가 후계자인 이메레티 왕국과 결국 압하지아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관광객의 관심이 높아지는 지역, 이 지역의 일부는 1904년 12월 25일 차르의 칙령에 의해 수쿠미 지구(쿠타이스 주)에서 분리되어 흑해 총독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에는 상당한 수의 아르메니아인과 게오르기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장군 안톤 데니킨과 그의 동료들은 그루지야(백인이나 소비에트 지도부에 의해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와 백인이 지배하는 쿠반 인민 공화국의 경계는 쿠타이스와 흑해(흑해)의 옛 러시아 총독들, 즉 북쪽에 있는 비스브 강까지 약간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등
이 분쟁은 지역 혁명 후 정부인 압하스 인민위원회가 그루지야 민주 공화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자치 단체로 가입하게 한 압하스에서의 친 볼셰비키 반란이 선행되었다(1918년 6월 8일). 조르지 마즈니아쉬빌리 소장의 휘하에 있는 그루지야 군대가 이 지역에 배치되었고, 지역 귀족들이 제공한 압하스 기병대가 합류했다. 마즈니아슈빌리는 지난 6월 말 소치에서 볼셰비키 공격을 거부했으며 압하스와 그루지야 당국의 지시에 따라 볼셰비키 기지를 파괴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했다.[1]
독일의 군사임무에도 고무된 그루지야 군사작전은 흑해 해안선을 따라 아들러(7월 3일), 소치(6일), 투랍(27일)을 점령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즈니아슈빌리는 곧 투압스-메이코프 철도 노선을 장악하고 백러시아 쿠반 정부 및 데니킨의 자원부대와 남러시아에서 붉은 군대와 전면전을 벌이는 그의 행동을 조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초 조지아는 백군을 볼셰비스트 모스크바의 공동위협에 대항하는 동맹국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곧 데니킨이 코카서스와 재결합한 "위대한 러시아"를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요구함으로써 흐려졌다.
9월 초, 그루지야인들은 퇴각하는 홍타만군에 의해 투압스에서 쫓겨나 예피판 코브티우크의 지휘를 받고 데니킨의 군대에 의해 추격당했다. 곧 백인 부대가 9월 8일 마을을 장악하여 볼셰비키 부대가 아르마비르 쪽으로 더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9월 18일, 소치 협의회(지역 멘셰비키와 SR이 8월에 구성한 입법부)는 레닌과 데니킨 모두의 위협에 대한 "임시 조치"로서 도시와 그 지역을 조지아 민주공화국으로 통일한다고 선언했다. 그루지야에 의한 합병은 곧바로 이어졌고, 백인 세력 지도자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일으켰다.
1918년 9월 25일, 백인 지도자들과 DRG 대표들은 에카테리노다르에서 만나 분쟁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데니킨은 그루지야인들이 다시 비지브 강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인들은 다음날 협상을 중단했다. 같은 날 데니킨은 소치 북쪽 변두리에서 라자레프스카야를 점령했으나 북캅카스에서 적군이 패배할 때까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1919년 2월 6일 그루지야군은 지휘관 코니예프(코니아슈빌리)와 그의 참모들과 함께 가그라에서 러시아인들에게 붙잡힌 채 비집강으로 강제 귀환했다. 그루지야는 증원군을 보냈지만 영국 대표들은 비지브 강을 따라 경계선을 세우는 데 개입했다. 붙잡힌 그루지야 장교들은 석방되었다.
1919년 3월 14일, 그루지야 대표단은 파리 평화회의에서 옛 흑해 지역의 일부를 남동쪽 14km의 작은 강인 투압세까지 요구했던 국경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러나 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919년 4월 12일, 수쿠미에 본부를 둔 그루지야 인민수비대와 마즈니아슈빌리 장군 휘하의 육군 부대가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영국군이 보유한 bzyb강 평화유지군 초소를 피해 유혈충돌 끝에 가그라(Gagra)를 탈환했고, '그린' 러시아 게릴라들과 협력해 멕하디리 강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영국의 개입으로 그루지야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프소 강에 있는 아들러 남쪽으로 새로운 경계선이 설치되었다. 국경을 따라 영국 원정군이 추가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입장을 취했다. 5월 23-24일, 그루지야와 러시아 자원봉사자, 영국 대표들이 트빌리시에서 만나 평화 해결책을 찾았다. 사실 갈등의 끝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1919년 말까지는 이따금씩 교전이 벌어졌다.
psou를 따라 현재의 공식 러시아-조지아 국경선이 설치된 것은 아마도 소치 분쟁의 주요 결과였을 것이다. 새로운 국경선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1920년 5월)과 연합국(1921년 1월)이 인정한 드 쥬레였다.
참고 항목
참고 문헌 목록
- R. H. 울만, 영국 및 러시아 내전(Principton, 1968), 페이지 219–20
- 1918-1921년 그루지야-아브하스 관계 A의 기사. 멘테샤시빌리
- (러시아어로)
- (러시아어로)
- (러시아어로)
참조
- ^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09-28. Retrieved 2007-09-28.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외부 링크
문학의 소치 분쟁
-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철의 홍수" (1924년)
- 알렉상드르 본다르, 빅토리아 로슈코바 "Three Days in Tuapse"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