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디스 전투 (기원전 547년)
Siege of Sardis (547 BC)사르디스 전투 (기원전 54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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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대왕 캠페인의 일부 | |||||||||
크로이소스가 마침내 포로로[1] 잡혔던 사르디스의 아크로폴리스의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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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리디아 제국 | 아케메니드 제국 | ||||||||
지휘관과 지도자 | |||||||||
크로우스, 미지의 다른 사람들 | 키루스 대왕 하파거스, 미지의 다른 사람들 | ||||||||
힘 | |||||||||
알 수 없는 | 알 수 없는 | ||||||||
사상자 및 손실 | |||||||||
알 수 없는 | 빛 | ||||||||
사디스의 포위 (기원전 547년/546년)는 리디아 크로수스와 키루스 대왕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심브라 전투 이후 마지막 결정적인 충돌로, 키로스는 크로수스를 따라 자신의 도시로 가서 14일 동안 포위하여 점령했다.[2]
배경
그 전 해에 리디아 왕 크로이수스는 여러 가지 고려에 사로잡혀 키루스 대왕국을 침공했다. 크로에소스는 점점 커지는 아차메니드 페르시아의 세력을 잠재우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처남 아스티야게스의 퇴진을 복수하기를 바랐다.[3] 또한 크로에소스는 델피에서 아폴로 신임이 분명한 신탁의 애매한 확약에 현혹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을 확신한다고 생각했다.[4]
크로에소스는 할리스 강을 건너 카파도키아에 있는 프테리아에서 키루스를 만났으나 어느 쪽도 승리를 얻지 못하는 우세한 세력과의 장기전 끝에 크로에소스는 겨울로 후퇴하여 새로운 동맹군을 소환하고 다음 봄에는 증원군으로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5] 그 사이에 군대를 해산하고 사르디스로 돌아왔다. 그는 카파도키아에서 벌어진 상투적인 전투가 끝난 후 키루스가 물러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력적인 키루스는 크로우스의 군대가 분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할리스 강을 건너 그렇게 빠른 속도로 진격해 리디아 수도 사르디스에 도착하여 크로우스가 접근하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6]
크로에소스는 굴하지 않고 가용한 병력을 소집하고 성벽 밖의 심브라 전투에서 키루스를 만났다. 키로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자신의 낙타를 보고 말을 겁을 주어 라이디아인들에게 마지막 자원인 기병대를 빼앗으려 했다. 리디아군의 잔당들은 시내로 몰려서 즉시 포위되었다.[7]
포위 공격
크로에소스는 사르디스가 결코 붙잡히지 않을 고대의 예언에 의해 성결된 잘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기회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국가이자 그의 확고한 동맹국인 스파르타로부터 즉각적인 원조를 요청했고,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의 연합에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사실 스파르타인들은 그 후 이웃 아르고스와의 전쟁에 점령당했고, 그들뿐만 아니라 크로에소스의 어떤 동맹국도 제때에 모이지 않았다.[8]
사이러스는 그동안 전투에 임해야 할 첫 번째 병사들에게 거액의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군대를 자극했지만, 거듭된 페르시아의 공격은 패배로 인해 거부당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도시는 결국 페르시아 군인의 기관에 의해 함락되었는데, 그들은 나머지 도시들의 방어를 난공불락으로 바친 고대 의식에 의해 적절히 수비되거나 보호되지 않는 성벽의 한 구역을 올라갔다. 성벽 밖에 인접해 있는 지반이 가파르다는 것이 그 리디아 자만심의 한 조각의 원인이 되었다. 페르시아 병사인 히로이데스는 떨어진 투구를 되찾기 위해 벽을 타고 내려오는 라이디아 군인을 보고 그 예를 따르려 했다. 그의 등정의 성공은 키로스의 나머지 병사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그들은 노출된 성벽 위로 몰려들어 즉시 도시를 점령하였다.[9]
여파
키로스는 크로수스를 살려달라는 명령을 내렸고, 크로수스는 그를 격파하는 적 앞에서 포로로 끌려갔다. 피리 위에 크로에소스를 산 채로 불태우려는 키루스의 첫 번째 의도는 쓰러진 적에 대한 자비의 충동, 그리고 고대 판에 따르면 적절한 시기에 강우를 일으킨 아폴로의 신의 개입에 의해 곧 전환되었다.[10] 전통은 그 후 화해한 두 왕을 나타낸다; 크로이소스는 포로에게 그것이 크로이소스의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군인에 의해 약탈된 소유물이라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자루의 최악의 고비를 막는 데 성공했다.[11]
리디아 왕국은 사르디스가 함락되면서 종말을 고했고, 그 굴종은 이듬해 키루스의 부관들에게 즉각 압살당한 성공하지 못한 반란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리디아 지류였던 아시아-미노르 연안의 아이올리언과 이오니아 도시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복되었다. 그로 인해 그레코-페르시아의 적대감은 다음 세기에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기원전 498년, 이오니아 반란 때 사르디스의 두 번째 포위 공격이 있었다.
참조
- ^ CROESUS – Encyclopaedia Iranica.
- ^ Briant, Pierre (January 2002).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Eisenbrauns. p. 36. ISBN 9781575061207.
- ^ 헤로도투스, 더 히스토리, (펜구인 북스, 1983), I. 페이지 57, 69
- ^ 헤로도투스, I. 페이지 58-60
- ^ 헤로도투스, I, 페이지 71
- ^ 헤로도투스, I, 페이지 72
- ^ 헤로도투스, I, 73 페이지
- ^ 헤로도투스, I. 73, 74
- ^ 헤로도투스, I, 페이지 75
- ^ 헤로도투스, I, 76페이지
- ^ 헤로도투스, I, 7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