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흐리스티치
Nikola Hristić니콜라 흐리스티치 Никола Христи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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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대통령 | |
재직중 1867년 12월 3일 – 1868년 7월 3일 | |
모나크 | 밀라노 1세 |
선행자 | 조반 리스티치 |
성공자 | 조르제 세니치 |
재직중 1883년 10월 3일 – 1884년 2월 19일 | |
모나크 | 밀라노 1세 |
선행자 | 밀란 피로치차나크 |
성공자 | 밀루틴 가라샤닌 |
재직중 1888년 4월 27일 – 1889년 1월 19일 | |
모나크 | 밀라노 1세 |
선행자 | 사바 그루지치 |
성공자 | 코스타 프로티치 |
재직중 1894년 10월 27일 – 1895년 7월 7일 | |
모나크 | 알렉산더 1세 |
선행자 | 스베토미르 니콜라예비치 |
성공자 | 스토얀 노바코비치 |
개인내역 | |
태어난 | 1818년 8월 10일 오스트리아 제국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
죽은 | 1911년 11월 26일 (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 ) (93)
국적 | 세르비아인 |
정당 | 보수주의자들 |
서명 | |
니콜라 흐리스티치(Sremska Mitrovica, 1818년 8월 10일 – Belgrade, 1911년 11월 26일)는 세르비아의 정치인으로 4선 동안 세르비아 총리를 지냈다.
전기
흐리스티치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1] 1840년 그는 베오그라드에서 생활하고 일하기 위해 왔으며, 그곳에서 그는 사법부의 사무원으로 공무원직에 들어갔다. 후에 그는 세르비아의 총대장이 되었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Mihayo Obrenovichi)는 1860년에 그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2] 1862년 6월 15일, 흐리스티치는 교전으로 시작되었지만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 겐다메리와 터키군 사이에 큰 갈등으로 발전한 사건의 목격자였다. 체쿠르 분수(Chukur Chesma)에서의 사건은 항아리를 든 소년이 터키군 병사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칼레메그단 요새에 포위된 터키군의 포격에 의해 세르비아 수도가 폭격되었다. 흐리스티치는 회고록에서 그 사건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뒤에 일어난 비범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썼다. 세르비아의 사실상의 독립은 1867년 오스만 군대를 모두 국외로 추방한 이후 이어졌다. 흐리스티치는 1868년 미하일로 암살 전까지 세르비아의 새로운 공국의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 비극적인 날, 흐리스티치는 암살자들의 체포를 명령했고, 그들을 총살단 앞에서 시도하고 유죄를 선고하고 총격을 가했다. 그는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에게 완전히 충성했다. 전국적으로 경찰력을 재편성하고, 자유주의 반대를 견제하고, 여단을 척결하고, 자치단체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밀라노 1세 산하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자 미하일로가 죽은 후 은퇴했다. 밀라노 1세는 티모크 반란을 맞닥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니콜라 흐리스티치를 정년퇴직에서 꺼내어 새 총리로, 내무장관으로 설치했다. 티모크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고, 그 지도자들, 특히 인민 급진당의 니콜라 파시치는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반란이 진압된 후 1884년 초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고, 밀루틴 가라사닌 산하에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1884년 흐리스티치는 국무원 으로 임명되었다 밀란은 이혼 문제에 대해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급진당과 사바 그루지치의 견해를 확인하는 데 실수를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내각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다시 밀란은 1888년 4월에 내각을 구성한 니콜라 흐리스티치라는 시간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관료로 눈을 돌렸다. 흐리스티치는 이듬해 은퇴했고, 1894년 정년퇴직에서 나와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 1895년 중반에 그는 해임되고 국무위원장으로 재선임되었다. 흐리스티치는 1901년에 마침내 영원히 은퇴했다.
니콜라 흐리스티치는 세르비아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토마 부치치 페리시치의 손녀 줄리아나(하디 조바노비치 출생)와 결혼했다. 흐리스티치의 아들 코스타(1852~1927)는 변호사, 외교관, 법무부 장관이었으며, 딸 폴크시자(1861~1933)는 세르비아의 유명한 의사 작가인 라자 라자레비치와 결혼했다.
니콜라 흐리스티치는 1911년 11월 26일 베오그라드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니콜라 흐리스티치는 매우 유능한 행정가로 기억되며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정직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참조
- ^ Schmaus, Alois; Koschmieder, Erwin (1953). Münchener Beiträge zur Slavenkunde: Festgabe für Paul Diels. Isar Verlag. p. 52.
- ^ a b Mišković, Nataša (2008). Basare und Boulevards: Belgrad im 19. Jahrhundert. Böhlau Verlag Wien. p. 178. ISBN 978-3-20577-566-9.
참고 항목
- 세르비아어 위키백과 번역 및 각색: :ккаааааћћћћ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