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사건

Nancy affair
Le Courage héroïque du Jeune Désilles, Le 31 aoot 1790, ar laffaire de Nancy, Le Barbier, 1794 (Musée de la Révolution francaise)

낸시 사건(프랑스어: Affaire de Nancy)은 흔히 낸시 반란을 영어로 '낸시 반군'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프랑스 군주제의 최종 타도를 2년 앞둔 1790년 8월 31일 프랑스에서 일어난 군사 폭동을 진압한 사건이었다. 이 폭동은 13개월 동안의 혁명적인 혼란으로 인해 왕실의 군대의 기강과 신뢰성이 어느 정도 훼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배경

낸시 반란은 1789년 바스티유의 스톰링, 가드 프랑카이스(프랑스 근위대)의 반란, 왕실의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강제 이전을 계기로 프랑스 육군의 정규 연대 사이에 불안이 확산되던 시기에 일어났다. 군대의 장교들이 여전히 왕실주의자들이 우세한 반면, 계급과 계급은 그들 주위의 혁명적인 혼란에 의해 점점 더 영향을 받고 있었다. 1790년 상반기 동안 여러 부대에서 많은 불복종과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자코뱅과 군대 밖의 다른 정당들과 연계된 정치 연합이 만들어졌다. 주로 가혹한 규율과 복무 조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군인들의 불만이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분개한 것은 1781년 귀족들에게 장교직을 맡기려는 조치였다. 이러한 제한은 현재 기존의 직급 이상으로 승진할 기회가 없는 많은 부사관들을 소외시켰다.

낸시의 반란

1790년 8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낸시의 수비대는 여전히 왕립 군대의 3개 연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레기멘트로이(킹스 연대), 레기멘트샤토비룩스(프랑스 보병대의 스위스 용병 12개 연대 중 하나), 메스트레 데 캠프 기병대였다. 연대 du Roy의 군사위원회는 연대 회계 감사를 요구했고 채석관을 체포했으며 대령과 다른 장교들을 막사에 감금하고 부대의 유급금을 압수했다. 샤토비앙은 그 뒤를 따랐다. 스위스 연대가 군대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왕실의 관점에서 특히 불안한 발전이었다. 샤토비앙의 장교들은 일시적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스위스 군법에 따라 군 위원회 멤버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이 경우 군함을 운영함으로써 말이다. 이 행동은 새로운 소동으로 이어졌고, 현재 3개 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다.

억제

낸시에서의 발병이 국경을 따라 위치한 다른 성전까지 번질 것을 우려하여 파리 제헌국회는 폭동에 대한 진압을 명령했다. 점점 더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우려한 국회는 이미 군 내부의 정치 연합을 폐지하는 투표를 했다. 이에 따라 8월 18일 메츠의 육군 사령관 프랑수아 클로드일레 장군은 정규군인과 국가 경비원 4500명을 이끌고 낸시로 향했다. 헌신적인 왕당파인 드 부일레는 훗날 루이 16세바렌스로 비행을 시도하는데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8월 31일 시에 도착하자마자 데 부유는 그들의 장교들의 석방과 4명의 우두머리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반란군 대표단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용어는 대다수의 병사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행되기 전에 드 부유의 병력 진격 대열이 정지된 스테인빌 문에서 일어난 충돌로, 두 로이 연대 병사들이 유인한 포병이었다. 앙투안-조제프-마르크 데실레 연대장은 정부군에 대한 폭도들의 사격을 만류하기 위해 24파운드의 캐니스터를 실은 대포 앞에 나섰다. 그는 격추되었고 혼란 속에서 대포가 발사되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촘촘히 세워져 있던 의병 60여 명이 사망했다. 그 후 일반 전투가 벌어졌고, 3시간의 전투 끝에 드 부유의 군대는 군인과 민간인들 사이에 큰 사상자를 내며 폭동을 진압했다. 총 사망자 수는 500명으로 추산되었다.

여파

프랑스 연대가 심각한 파장을 면한 반면 스위스 반군들은 자국 장교들에 의해 군법회의에 회부된 후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한 명은 운전대를 부러뜨렸고, 22명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41명은 갤리 노예로[1] 30년형을 선고받았다(실제로 갤리선은 더 이상 복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의 고된 노동), 74명이 추가로 수감되었다. 제헌국회는 드 부일레의 행동을 승인했지만, 급진주의자들은 그것의 심각성에 항의했다. 이러한 드라코니안 조치들의 대중적 의견에 대한 영향은 대규모의 축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중에 풀려난 반역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2] 1792년 8월 군주제가 최종 전복될 때까지 소란이 계속되었던 정규군의 기강과 사기를 더욱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참고 항목

참조

  1. ^ Schama, Simon.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p. 551. ISBN 0-670-81012-6.
  2. ^ Schama, Simon.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p. 606. ISBN 0-670-81012-6.

원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