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자 자한기르
Mirza Jahangir미르자 자한기르 바흐트 바하두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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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샤자다 | |||||
태어난 | 1776 델리 레드 포트 | ||||
죽은 | 1821년 7월 18일 (44~45) 알라하바드 | ||||
매장 | |||||
와이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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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술라이만 자 시프르우두라 자파 야브 장 추크타이 칸 바하두르(1810-1857) 나와브 아사 라파트 술탄 베굼 사이바 나와브 쿠라이샤 술탄 베굼 사이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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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티무리드 | ||||
아버지 | 악바르 샤 2세 | ||||
어머니 | 뭄타즈 마할 |
Shahzada Mirza Muhammad Jahangir Bakht Bahadur (also known as Prince Mirza Jahangir Bakht) (1776 – 18 July 1821)[1] was the son of Prince Mirza Akbar, who became the Emperor Akbar Shah II in 1806 and his wife Empress Mumtaz Mahal, he was also the younger brother of Emperor Bahadur Shah II and older brother of Mirza Jahan Shah.[citation needed] 어머니 뭄타즈 베굼의 압박에 악바르 샤는 그를 후계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가 붉은 요새에서 영국 거주자인 Archibald Seton을 공격한 후, 동인도 회사는 그를 추방했고 결국 바하두르 샤 2세는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1837년에 인도의 마지막 무굴 통치자가 되었다.[2] 그는 1813년부터 1818년까지 아삼의 수브다르였다. 그는 아삼의 32대 무굴 통치자였다.
전기
미르자 자하기르의 아버지인 무굴 황제 악바르 샤 2세(재위 1808–1837)는 장남 시라즈 우딘 '자파르'(바하두르 샤 자파르 2세)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작은 아들 미르자 자하르를 명백한 후계자로 지명하고 싶어했다(왈리-아하드).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레드 포트의 영국 레지던트에게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법원에 있는 영국 주재원이 아크바르 2세를 만나러 갔을 때, 승계의 화두가 다시 떠올랐지만, 주재원은 동인도 회사의 알려진 입장을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이 미르자 자한기르는 붉은 요새를 막 떠나려는 순간에 영국 레지던트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놓쳤다.레지던트는 말을 뒤로 돌려 왕자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왕자는 거절하고 대신 "루, 루하이비"를 외치며 그를 조롱했다. 그러자 레지던트는 다시 돌아가 모욕을 복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영국군 전체를 이끌고 돌아왔다. 왕자는 체포되어 1812년경 알라하바드로 망명했다.[3]
그의 어머니는 그를 애타게 바라며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메흐라울리에 있는 쿠자 바크티아르 '가키'의 다르가에서 꽃다발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몇 년 후 미르자 자한기르가 풀려나 마치 독실한 부인 뭄타즈 마할 베굼이 그녀의 맹세를 갚기 위해 메흐라울리로 갔다. 그녀와 함께 황실도 메흐라울리로 옮겨갔고 델리 전체 인구도 그렇게 되었다. 7일 동안 메흐라울리에서 망고 숲에 있는 줄라스(스윙)와 닭싸움, 황소 미팅, 연날리기, 레슬링, 수영장 등 온갖 놀이가 이어졌다. 이 모든 흥겨운 흥겨움 속에서 꽃으로 만든 차드가 화자 바크티아르 카키 다가에서 제공되었다. 무굴왕은 세속적인 마음을 가졌고 그의 명령 아래 꽃판카 모양의 꽃 제물을 메흐라울리에 있는 유명한 요그마야 사원에서 바쳤다.[4]
백성들의 반응을 보고 그 발생된 열기를 감지한 결과, 비가 내린 후 매년 축제를 개최하기로 결정되었고, 모든 지역 주민들이 화자 바크티아르 카키 다가에서 판카, 차다르를, 요그마야지 사원에서 판카, 꽃 제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다르바도 축제 기간 7일 동안 메흐라울리로 옮겨졌다. 이 축제는 마지막 무굴 황제인 시라즈-U-ddin "자파르"가 통치하던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바하두르 샤 "자파르"는 델리가 영국군의 포위 공격을 받을 때인 1857년에 조차 "Fool Walon Ki Sair"를 기념하기 위해 갔다. 이것이 무할스 휘하의 마지막 "풀 와알론 키 사이르"였다.[5][6][7]
죽음
델리로 돌아온 미르자 자한기르의 행동은 더욱 악화되었고 악바르 2세는 (형 바하두르 샤 자파르를 두 번이나 독살하려 한 후) 알라하바드로 돌려보내기로 영국인과 합의했다. 그곳에서 그는 호프만의 체리 브랜디를 마시고 춤추는 소녀들과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냈다. 1816년, Col Sleeman은 그가 나쁜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이스팅스 경은 총독과의 면담을 얻기 위해 매일 포트 와인 한 병으로 제한하기로 약속했다." 헤이스팅스 경은 비록 여름의 절정이었지만, 그가 타르타르 원피스와 진홍색 겉옷, 파란색 조끼를 입고 모피로 줄지어 있고 보석으로 장식된 높은 원뿔모자를 쓰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는 머리가 길었고 옆구리를 잘랐다. 잘생긴 젊은이가 길을 잃었다. 왕자는 부모보다 훨씬 앞선 1821년 사망해 니자무딘다르가 인근 델리의 무덤에 묻혔다.[8]
참조
- ^ Smith, R. V. (2013-10-27). "The other Jahangir". The Hindu. ISSN 0971-751X. Retrieved 2021-05-11.
- ^ Husain, MS (2006) Bahadur Shah Zafar; 그리고 델리, Aakar Books, Delhi, P87-88 델리에서의 1857년의 전쟁.
- ^ Smith, R. V. (2013-10-27). "The other Jahangir". The Hindu. ISSN 0971-751X. Retrieved 2021-05-11.
- ^ Smith, R. V. (2013-10-27). "The other Jahangir". The Hindu. ISSN 0971-751X. Retrieved 2021-05-11.
- ^ "Mehrauli Bomb Blast And Phool Walon Ki Sair Indian Muslims". Indianmuslims.in. 2008-09-29.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07-09. Retrieved 2014-02-14.
- ^ [1][데드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120218104532/https://www.ajourneytoindia.com/delhi-tourism/fairs-and-festivals-of-delhi/phool-walon-ki-sair.html.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February 18, 2012. Retrieved August 18, 2012. 누락 또는 비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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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 Smith, R. V. (2013-10-27). "The other Jahangir". The Hindu. ISSN 0971-751X. Retrieved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