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트로피모프
George Trofimoff조지 트로피모프 | |
---|---|
태어난 | |
죽은 | 2014년 9월 19일 | (87세)
직업 | 전 미 육군 정보 장교 |
형사고발급 | 스파이 활동 |
벌칙 | 종신형 |
조지 트로피모프(George Trofimoff, 1927년 3월 9일 ~ 2014년 9월 19일)는 러시아 혈통의 미군 정보 장교였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미국 연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1년 9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조지 트로피모프는 간첩 혐의로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미군 역사상 가장 고위 장교다.
배경
조지 트로피모프는 1927년 3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에서 태어났다.[1] 그의 친할아버지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트로피모프 러시아 육군총참모부 준장은 1919년 체카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트로피모프는 페이지 군단 사관학교에 다녔었다. 러시아 남북전쟁 당시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반공산주의 백인군 소령으로 복무했었다. 조지의 어머니 에카테리나 카탈리는 1926년 트로피모프 소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성공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다.[2]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군에서 준장 계급은 버려졌고, 19세기 후반에 준장 계급으로 대체되었다.)
1928년 아내가 죽은 후 트로피모프 소령은 비참한 가난에 빠졌다. 이에 그는 일시적으로 아들을 보내 블라디미르와 안토니나 샤라보프에게 양육을 맡겼는데, 이들은 모두 백인 동료 이민자들이었다. 안토니나의 전혼 아들은 이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수세미흘이었다.[3] 트로피모프는 노년까지도 계속 수세미흘을 '형제'라고 표현했다.[4]
1943년에 블라디미르 트로피모프는 재혼했고 그의 아들은 그와 그의 새 아내와 함께 이사했다. 그러나 곧 연합군의 베를린 폭격으로 가족들은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지 트로피모프가 독일 점령에 배속된 미 육군 장교였던 1949년까지 다시 만나려 하지 않았다.[5]
1944년 가을, 조지 트로피모프는 독일군, 즉 헤어(보통 베흐마흐트군이나 독일군과 교란한다)에 징병 신고를 명령받았다. 순순히 따르기는커녕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채 도망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필센 근처에 숨어 있었다. 트로피모프는 그 후 진격하고 있는 소련군을 탈출하여 미국 점령지 독일로 들어갔다.[6]
트로피모프는 미군 통역관으로 일한 후 프랑스 파리로 불법으로 길을 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리의 백인 이민자 공동체에 의해 포옹을 받았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로피모프는 미국으로 이민을 위해 친구 협회의 후원을 받았다. 1947년 12월, 그는 KLM 로얄 더치 항공기에 탑승하여 암스테르담에서 뉴욕 시로 비행했다.[7]
트로피모프는 1948년 미 육군에 입대했고 1953년 미 육군 예비군에서 임무를 받았다. 1956년 현역에서 명예 제대를 받았으며, 1987년 대령 계급으로 미 육군 예비군에서 은퇴했다. 1959년부터 1994년까지 트로피모프는 주로 라오스 왕국과 서독에서 근무하면서 군사 정보 분야에서 일하는 민간인으로 미 육군에 의해 고용되었다.
스파이 활동
트로피모프는 미국 육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내내 비밀과 최고 비밀 결재권을 가지고 있었다. 1969년 뉘른베르크 합동 심문 센터(JIC)에서 미군 소자장이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국가의 탈북자와 난민을 심문하기 위한 센터인 JIC는 미국, 프랑스, 서독 정보국이 공동으로 운영했다. 트로피모프는 JIC에서 미 육군 정보국이 받거나 생산한 모든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공소장에는 JIC에서 미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후 트로피모프가 수양 동생 이고르 수세미흘과 다시 친분을 쌓았다고 적혀[8] 있다. 이리니라는 수도자적 이름 아래 수세미흘은 러시아 정교회 내의 상형자와 주교가 되어 있었다. 트로피모프가 만성적으로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이리니 주교는 "KGB의 봉사로 그를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공소장에는 KGB가 소련 내외의 모스크바 총대주교 성직자들 사이에 비슷한 협력자 몇 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당시 이리니는 뮌헨과 서독의 보조 주교였으나, 이후 1975년 빈과 오스트리아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of Vienna and Oustralia)이 되었다. 그는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자리를 계속 유지했다.[9]
1960년대부터 트로피모프와 메트로폴리탄은 자주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트로피모프는 1999년 위장 FBI 요원과의 대화에서 그의 영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70년대였을 거야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공식적이었다. 사진은 없고 그냥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뭔가를 물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뭔가 말했을 것이다. 언어적인 정보. 그는 시사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우선 우리 두 사람의 대화일 뿐이었다. 그는 이것 저것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아마 나에게 '그럼, 너의 부대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아니면, '미국 정부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10]
이리니 주교의 행동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받자 트로피모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처음부터 아니야. 나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내가 가구를 샀는데 나는 돈을 낼 수 없고, 어떻게 돈을 구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뭐라고 말해두는데, 빌려주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내게 5천 마크를 주었고, 그 다음엔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더 많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3, 4주 후에 나는 그에게 '한 번만 더 도와줘야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돌려줄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두어 번 말을 걸었다. 항상 이렇다. 그리고 나서 그는 '글쎄, 있잖아, 내가 말해줄게. 나한테 빚진 거 없잖아 그리고 네가 더 필요하면 내가 더 줄 수 있어. 걱정 말아요. 몇 가지 일이 있어야지, 이것저것.' 이렇게 시작된 겁니다.[11]
1999년 트로피모프는 특별한 카메라와 삼각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 집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기밀 문서를 일상적으로 밀반입했다고 자랑했다.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에서 회의하는 동안 KGB 요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올레그 칼루긴 전 KGB 장군에 따르면 '마키즈'라는 암호명을 받은 트로피모프는 항상 이리니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한다. 기소장에 따르면 트로피모프는 이리니와 다른 KGB 요원들을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자주 이동했다.[12]
트로피모프는 이어 이리니가 매주 7000마르크의 표준 금액을 지급했다고 설명했다. 지불은 항상 중고 지폐로 이루어졌고 트로피모프가 그의 집에 계약금을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할 때, 이리니는 "모스크바에서 그의 연락처를 찾았다"고 말했고 9만 DM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금액은 당시 4만 미국 달러의 가치가 있었다.[13]
2001년 칼루긴은 선서를 통해 1978년 이리니니를 자신의 다차를 방문하도록 초청했다고 증언했다. 칼루긴은 "그는 특히 마르키즈를 영입하는 데 있어서 좋은 일을 했다. 그가 한 일에 대해 감사하고 싶었어."[14]
1999년 트로피모프는 이리니가 1987년 KGB 스파이 활동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더 설명했다. 트로피모프에 따르면 "그가 카메라를 파괴하라고 해서 망치로 부수고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15]고 한다.
독일 BKA, FBI, 미국 연방검찰은 트로피모프가 간첩 활동을 하면서 25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루긴에 따르면 트로피모프는 붉은 기수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 훈장은 구소련의 "유공적이고 위험한 복무에 대한 최고 군사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칼루긴은 "결국 그는 우리를 위해 한 일에 대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16]고 덧붙였다.
독일의 체포
1992년, 은퇴한 KGB 기록 보관자인 바실리 미트로킨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국내외에서 KGB 운영에 관한 수천 페이지의 기밀 문서와 손으로 쓴 메모를 가지고 갔다. 미트로킨 소령의 정보에는 나토 심문센터가 스파이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증거가 포함되어 있었고, "마키즈"라고 부호가 붙여졌다. 그는 25년 동안 5만 페이지에 달하는 80권을 넘는 기밀 문서를 보여주는 KGB 기록을 넘겨주었다. 미트로킨은 이름은 없었지만 반역자의 막연한 스케치를 연출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가 전달한 소련 파일에는 이 첩자를 '경력 있는 미국 정보 장교'로, 그 비밀을 러시아 정교회 '클러지맨'으로 운반한 택배기사로 묘사했다.
1994년 12월 14일 트로피모프와 이리니는 언급된 몽타주를 바탕으로 독일 연방 경찰, 즉 분데스키리미날람트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받았다. 트로피모프는 구금된 상태에서 지휘관으로부터 그의 보안 허가와 연금 모두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직후 트로피모프와 이리니니는 예비심리를 위해 독일 연방법원의 판사 베른하르트 보데 앞에 끌려갔다. 청문회에서 이리니는 트로피모프 돈을 빌려준 사실은 인정했지만 KGB와의 관련성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KGB는 어디에나 있었고, 교회에도 있었다"[17]고 인정했다. 이리니는 또한 자신의 여성 가정부 구둘라 워커와 "아주 강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인정했다.[18]
독일의 간첩법은 공소시효가 5년이기 때문에 보데는 고발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트로피모프와 이리니 모두 석방되었다. 트로피모프의 다섯 번째 부인인 주타 트로피모프는 남편의 체포로 황폐해졌다. 그는 이후 "조지의 스파이 활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나는 그의 체포에 완전히 놀랐고 그날 아침 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덤에 맹세한다'고 말했다.[19] Jutta Trofimoff는 더 나아가 "만약 내가 그가 나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와 이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20]
이 짧은 소명 후에 조지와 주타 트로피모프는 독일을 떠나 플로리다주 멜버른의 한 동성애자 공동체로 은퇴했다.
은퇴
플로리다에서 트로피모프는 지출을 통제할 수 없었다. 같은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살았던 앤디 바이어스 대령의 말에 따르면 트로피모프도 고급 식사와 고급 와인으로 새로운 이웃을 즐겁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트로피모프는 나중에 회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신용카드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우리를 이 구덩이에 빠뜨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타는 계속 나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단지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고, 우리를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집을 두 번째 저당 잡혔고, 그것은 일시적으로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단지 일시적일 뿐이었다.[21]
트로피모프가 여유가 없다는 아내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새로 사겠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의 부채는 더 커지게 됐다. 트로피모프는 곧 빚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희망에 동네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싸는 것으로 전락했다.
바이어스에 따르면 트로피모프는 메트로폴리탄 이리니에 대해 "형님이 돌아가시면 나에게 돈을 남겨준다고 한다. 보내기는 어려울 것이며 교회 채널을 통해 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22]
스팅
1997년 7월 10일부터 드미트리 드루진스키 FBI 요원이 트로피모프와 연락을 취하며 만남을 모색했다. 러시아계 미국인인 드루진스키 특수요원은 두더지 용의자를 속여 죄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해 KGB 요원을 사칭하며 경력을 쌓았다. 1988년 드루진스키는 KGB와 동독 스타시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해온 미군 영장전담 장교 제임스 홀 3세의 자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23]
드루진스키는 러시아 대사관에 파견된 SVR 요원인 "Igor Galkin"이라고 이름을 밝히며 트로피모프에게 결함 분석가가 자신의 파일 대부분을 훔치거나 파괴했다고 말했다. 트로피모프의 재건 지원의 대가로 드루진스키가 재정적으로 보상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비록 트로피모프는 원래 이 제안에 대해 깊은 회의적이었지만 드루진스키가 마침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1999년 2월 24일 트로피모프는 플로리다주 멜버른의 컴포트 여관 안에서 드루진스키를 만났다. 비디오 테이프가 돌자 트로피모프는 KGB를 위한 그의 서비스와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그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트로피모프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말해줄게. 내 영혼은, 난 러시아인이고, 미국인이 아니야... 난 미국인이 아니었어, 그냥... 조국을 위해 돕다... 나는 조국을 위해서, 볼셰비키들을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여러 번 말했다.[24]
이에 드루진스키 감독은 SVR이 트로피모프를 재정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0년 5월 10일 드루진스키가 5개월의 침묵 끝에 트로피모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로피모프가 자신이 잊혀졌다고 믿었다고 말하자 드루진스키가 "아니다, 아니다. 우린 널 잊지 않았어, 조지 조지, 좋은 소식이 있어 모든 것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세부 사항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리고 6월 14일에 탬파에서 만날 수 있을까?… 일주일 전쯤 전화해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드리도록 하겠다."[25]
트로피모프는 이에 대해 "아, 이고르, 넌 내 목숨을 구하고 있어... 머리에 총알을 박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멋지다... 정말 고마워... 바이바이."[26]
2000년 6월 24일 트로피모프는 현금 2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한 드루진스키를 만나기 위해 탬파 국제공항 힐튼 호텔에 도착했다. 대신 트로피모프는 FBI에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었다. 테리 푸르 미국 법무차관보는 "드루진스키의 작업은 훌륭했다. 이 사람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위장 요원이야. 그와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토벤 같은 예술가니까."[27]
재판과 소신
조지 트로피모프의 재판은 2001년 6월 4일 탬파의 샘 E. 기븐스 미국 법원에서 시작되었다.
도나 부셀라 플로리다 남부 지방 검사는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인이 근무하는 나토 시설인 뉘른베르크 센터의 민감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요인이 중대한 보안 위반을 시사했다"고 말했다. 트로피모프의 사실상 모든 문서를 볼 수 있는 허가, 그리고 그의 장수는 그 일에."
그의 법정 재판은 검찰 측 증인이 KGB제일총국(KGB)의 해외 방첩 책임자였던 올레그 칼루긴 전 KGB 장군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칼루긴은 마키즈 요원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랬지. 그의 이름은 조지 트로피모프였어."[28] 칼루긴 장군은 콜과의 만남으로 추정되는 자신의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오스트리아의 한 장소에서 트로피모프.
검찰의 또 다른 증인은 클레이튼 로네트리 전 미 해병이었으며, 그는 KGB의 채용 기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29]
2001년 6월 26일 플로리다 주 탬파의 연방 배심원단은 트로피모프가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것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마크 킹 판사는 "무고한 사람이 갈킨의 연락을 받고 FBI에 알렸을 것"이라며 "그는 종종 그는 트로피모프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30]
그의 변호사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트로피모프는 그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유죄 판결에 따라 트로피모프는 죽는 날까지 결백을 계속 유지했다. 트로피모프는 항상 충성스러운 미군 장교였으며 "46년 반 또는 47년 동안 이 나라를 위해 복무한 애국자"라고 말했다. 그는 또 드루진스키 요원에 대한 스파이 입회를 철회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에서 돈을 받기 위해 스파이로 자신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트로피모프는 드루진스키가 그런 비참한 상황에 처해야만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죽음
조지 블라디미로비치 트로피모프는 2014년 9월 19일 빅터빌 미국 교도소에서 사망했다.[31]
다른 주목할 만한 미국 점들
KGB 또는 SVR의 몰로 일했던 미국 정부 또는 군대의 다른 요원은 다음과 같다.
- 제임스 홀 3세 -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동독과 소련에 도청과 암호기밀을 판매한 독일의 육군 영장 담당자 및 정보 분석가.
- 알드리히 아메스 - 1985년과 1994년 사이에 소련과 그 후 러시아에 고도의 기밀 정보를 판매한 CIA 첩자.
- Robert Hanssen - 연방 수사국에서 27년 중 22년간 소련과 러시아를 위해 파견되었다.
- 에드윈 피츠 - FBI 요원은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소련과 러시아에 기밀 문서를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 해롤드 제임스 니콜슨 - 1994년 러시아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고, 기밀 문서를 반출하려다 체포된 중앙정보국 고위 간부.
추가 읽기
- 앤디 바이어스, 불완전한 스파이: 2005년 반다메레 출판사의 유죄판결을 받은 스파이의 내막 이야기.
각주
- ^ Byers(2005) 불완전한 스파이: 유죄판결을 받은 스파이의 내막 이야기. 8 페이지
- ^ Byers(2005년), 5-8페이지.
- ^ Byers(2005년), 8-10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3페이지.
- ^ 바이어스 (2005), 15-16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6-19페이지.
- ^ Byers(2005년), 17-31페이지.
- ^ 2008년 6월 27일 웨이백머신에 보관된 조지 트로피모프 아피다비트
- ^ ире ( ( (узе () ROC 웹 사이트의 웨이백 머신 전기 정보에 2007년 11월 09년 기록 보관
- ^ Byers(2005년), 111-112페이지.
- ^ Byers(2005년), 112페이지.
- ^ 한때 육군 사원은 러시아를 위해 최소한 25년 동안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뉴욕 타임즈, 2000년 6월 15일.
- ^ 바이어스(2005년), 114쪽.
- ^ 바이어스 (2005), 172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13-114페이지.
- ^ 바이어스 (2005), 172페이지.
- ^ Byers(2005년), 80페이지.
- ^ 바이어스 (2005), 82페이지.
- ^ 바이어스 (2005), 83페이지.
- ^ 바이어스 (2005), 83페이지.
- ^ Byers(2005년), 88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3페이지.
- ^ 존 O. 쾰러, The Stasi: 1999년 Westview Press, 동독 비밀경찰의 내막 이야기. 225-236페이지.
- ^ Byers(2005년), 112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26쪽.
- ^ 바이어스(2005년), 126쪽.
- ^ 바이어스 (2005), 105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69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57-159페이지.
- ^ 바이어스(2005년), 189페이지.
- ^ 연방교도소 수감자 로케이터, 죄수 # 3909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