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내전
Chilean Civil War of 1829–1830칠레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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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피피올로스 | |||||||
지휘관과 지도자 | |||||||
호아킨 프리에토 마누엘 불네스 디에고 포탈레스 | 라몬 프리어 프란시스코 데 라스트라 프란시스코 라몬 비쿠냐 |
칠레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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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0년 칠레 내전(스페인어: 게이라 시빌 드 1829–1830)은 칠레에서 시행 중인 헌법정권을 놓고 보수파 펠루코네스와 진보파 피피올로스 세력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었다.이 갈등은 1925년까지 시행되었던 1833년 자유주의 세력의 패배와 새로운 헌법의 승인으로 끝이 났다.
배경
1823년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장군의 사임과 자결은 정치적 내분을 종식시키지 못했다.주로 반독재와 지역주의 이슈를 중심으로 시민갈등이 이어졌다.1820년대에 대통령과 헌법이 빠르게 상승하고 하락하였다.칠레 정계는 독립 당시 이미 태아였던 두 집단으로 갈라졌다.오히긴스의 추종자들은 보수당이나 빅위그가 되었다(스페인어: 펠루코네스).이 집단은 주로 식민지 귀족의 잔재들로 구성되었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사상과 전통에 대한 존중,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옹호하였다.그들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호세 그레고리오 아르고메도, 후안 에가냐, 호세 호아킨 프리에토였다.그들에게는 자유당(스페인어: 피피올로스)이 반대였다.이 집단은 주로 조제 미겔 카레라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그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부를 옹호했다.그들의 지도자는 라몬 프레이어, 마누엘 보르고뇨,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였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교회-국가 문제를 중심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교회에 호의적으로 기울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당도 자유당보다 식민 유산, 권위주의 정부, 집행권 패권, 단일 국가 등에 대해 더 동정적이었다.19세기의 양대 정당으로 발전한 이 두 가지 정치적 성향과 함께, 일부 소수 집단도 있었다.그 중 하나가 호세 미구엘 인판테의 지도 아래 연방주의당이었는데, 그는 미국이 채택한 정부 모델을 바탕으로 한 정부 모델을 추진했다.또 다른 집단은 디에고 포탈리스의 지도 하에 있는 매우 이질적인 정치 집단인 에스탄케로스 또는 독점자들(에스탄코는 독점이라는 의미)이었다.그 이름은 그들 대부분이 상인이고, 그들의 지도자 포탈레스가 담배 독점을 담당한다는 사실에서 나왔다.이들의 주요 인물은 후안 프란시스코 메네시스(전 독재자), 마누엘 호세 간다리아(카레라 지지자), 호세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알데아(오하이긴스 지지자) 등이다.
헌법논문
1823년에서 1828년 사이의 시간은 헌법 수필이라고 불린다.이 세 편의 에세이 중 첫 번째 에세이는 후안 에가냐의 모랄리스트 제도(1823년)로, 단일 국가, 민주 국가(상류층 남성에게 프랜차이즈가 제한됨)와 가톨릭을 만들었다.집행권은 4년 동안 선출되고 단 한번만 재선되는 최고이사의 손에 맡겨졌다.이 제도는 연방주의 체제의 지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바로 시행되었다.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 헌법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몇 안 되는 지속적인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들의 조급함에, 연방주의 지도자들은 의회가 지방에 연방 권리를 주는 몇몇 법률을 채택하도록 강요했다.1825년 프레이어 최고 책임자가 왕립주의 세력으로부터 칠로에를 포섭하고 자리를 비운 동안, 호세 미구엘 인판테는 행정부를 관장하는 국장 회의의 의장이 되었다.참의원은 자신들의 입장을 이용해 연방제의 기반이 될 8개의 도의회를 만들었다.8개 주는 코킴보, 아콩카구아, 산티아고, 콜차구아, 마우레, 콘셉시온, 발디비아, 칠로에였다.따라서 두 번째 에세이는 비록 정식으로 채택된 적은 없지만 인판테가 1826년에 쓴 연방주의자였다.
1826년 선거
1826년 7월 14일 의회는 새로운 선거를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최고 국장은 대통령으로 교체될 예정이었다.첫 선출된 대통령은 마누엘 블랑코 앙칼라다로 59.5%의 득표율과 22명의 선거인단으로 40.5%의 득표율과 15명의 선거인단만 얻은 호세 미겔 인판테를 물리쳤다.아구스틴 에이자기레 부통령은 57.1%의 득표율과 20명의 선거인단으로 42.9%의 득표율과 15명의 선거인단을 얻은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를 물리쳤다.그 시스템은 매우 빠르게 실패로 판명되었다.블랑코 엔칼라다는 사임하였고, 1827년 에이자과레로 교체되었다.그는 차례로 엔리케 캄피노 살라망카 대령에 의해 퇴위되었고, 그는 라몬 프리레 장군을 다시 불렀다.
1828년 헌법
새 정부의 첫 번째 조치는 헌법적 전당대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의회는 프리어 장군의 귀환을 확인하고 해산을 진행하였다.그 직후 프레이어는 사임하고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부통령으로 교체되었다.
핀토의 집권 첫해인 1828년 8월 칠레는 입법부, 집행부, 사법부가 따로 있는 단명 연방주의 체제를 단일한 형태의 정부를 위해 포기했다.새 헌법은 1828년 호세 호아킨 데 모라가 멜초르 산티아고 콘차(Melchor Santiago Concha)와 함께 최종 확정했다.이것이 세번째 또는 자유주의 에세이가 되었다.정부는 단합체제가 되었지만 연방주의 에세이가 만든 8개 도의회를 유지했다.이 행정관은 5년간 재선출이 금지된 대통령의 손에 맡겨졌다.
1828년 적당히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핀토는 연방주의자와 자유당파 모두를 소외시켰다.그는 또한 영장류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폐지함으로써 옛 귀족들을 화나게 했고, 그의 반정체주의로 공분을 일으켰다.
1829년 선거
혁명을 일으킨 군사 사건이 아니라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 단순한 정치적 불협화음이었다.1829년에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소집되었다.확실한 승자(후보 9명 중)는 1827년 프레이어 사임 이후 진보적이고 이미 임시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장군으로 선거인단 118명, 득표율 29.1%를 기록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 때 일어났다.당선자는 1위 프란시스코 루이즈 타글(선거인단 98명, 24.1%), 2위 호세 호아킨 프리토(José Joaquin Prieto) 장군이 돼야 하며, 두 번째 2위 모두 보수인 61표(15.0%)를 얻어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자유당에 의해 통제되었고 또한 자유당인 프란시스코 라몬 비쿠냐가 주재했다.부통령 후보가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선거인단 48명(득표율 11.8%)에 그쳤는데도 원로원 대통령의 동생인 호아킨 비쿠냐를 뽑았다.그것이 보수주의자들이 반항할 명분이었다.
1829년 혁명
자유당의 최고 지도자인 라몬 프레이어 장군은 여러 차례(1823–27, 1828, 1829, 1830) 대통령직을 오갔지만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1827년 5월부터 1831년 9월까지 프리레의 간단한 개입을 제외하고는 프리레의 전 부통령인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장군이 대통령직을 맡았다.보수적인 쪽은 호세 호아킨 프리토 장군의 군사지도와 디에고 포탈스의 정치적 지도하에 있었고, 진보적인 쪽은 라몬 프레이어, 프란시스코 데 라스트라의 지휘하에 있었다.핀토 대통령은 7월 14일 부통령이 아닌 그의 동생인 프란시스코 라몬 비쿠냐 상원 의장에게 대통령 직무대행을 넘겨주면서 즉각 사임했다.
1829년 12월 7일 프리토 장군 휘하의 보수군이 남쪽으로부터 산티아고에 접근하였는데, 이 군대는 프리토의 사촌인 마누엘 불네스(Manuel Bulnes)의 노력으로 주로 집결되었다.보수군은 행군을 잠시 중단하기로 하고 시내 몇 마일 밖까지 진을 쳤다.비쿠냐 대통령 휘하의 정부는 즉시 무너졌고 그들은 먼저 발파라이소로 피신한 뒤 코킴보로 북상했다.1829년 12월 14일 프리에토 장군과 그의 부대는 프란시스코 데 라 라스트라 휘하의 자유주의 군대를 만나 오차가비아 전투에서 격파했다.한편 비쿠냐 대통령과 그의 장관들은 승리한 보수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칠레는 몇 주(1829년 12월 7일 ~ 24일) 동안 지도자가 없었다.오차가비아 전투 후 프리레 장군은 프리토와의 휴전에 동의했다.중립적인 인물인 호세 토마스 오벌레(José Tomás Ovalle) 아래, 적대관계의 지속을 피하기 위해 정부 준타가 조직되고 장악되었다.이 군정은 1829년 12월 24일부터 1830년 2월 18일까지 나라를 통치했다.권력은 새로운 총선과 새로운 의회 구성을 촉구할 목적으로 진보적인 전당대회를 조직한 라몬 프레이어에 의해 유지되었다.동시에 산티아고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들도 자신들의 전당대회를 요구했고, 그곳에서 프란시스코 루이즈-태글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루이즈-타글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자유당 쪽의 주요 지도자들(마누엘 보르고뇨, 프란시스코 데 라스트라, 후안 그레고리오 데 라스 헤라스)은 군대에서 제거되었다.이로써 적대관계의 재개가 보장되었다.루이즈 타글 대통령과 내각은 모두 4월 1일 사임했고, 부통령으로 호세 토마스 오벌레가 정권을 잡았다.
마지막 약혼은 1830년 4월 17일 탈카 근교의 레스트레이 전투에서 일어났다.자유주의자들은 완전히 패배했고, 그들의 지도자 라몬 프레이어 장군은 먼저 페루로 유배되었고, 그 다음엔 타히티로 유배되었다.후에 그는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다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아무도 정부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벌레 대통령은 디에고 포탈레스를 그의 보편적인 장관으로 임명했다.포탈레스는 남은 세기 동안 칠레의 형성을 위한 정치 사상을 그와 함께 가져온 정부의 운영을 이어받았다.루레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유당측은 마침내 협상을 결심하고 쿠즈-쿠즈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은 무정부 상태와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30년간의 보수정부를 떠받쳤다.
참고 항목
원천
- 세르히오 빌랄로보스, 오스발도 실바, 페르난도 실바 이 파트리치오 에스텔; "칠레 히스토리아 데 칠레, 토모 3", 편집 유니버시아스, 에드.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