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자와이 전투
Battle of Long Jawai롱 자와이 전투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결의 초기 전투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아의 대규모 사단이 국경을 넘어 보르네오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롱 자와이의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소규모의 군대와 준군사력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패배했지만, 영국 구르카 증원군은 이 지역과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사이의 정글에 투입되었다. 여러 차례의 매복공격으로 철수한 인도네시아군의 일부가 살해되었다.[1]
배경
1963년 9월 25일, 선장 존 벌린슨은 인구 500명의 롱 자와이 마을에 도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의 병력은 테자바하두르 구룽 상병이 이끄는 6명의 구르카족과 2명의 경찰 야전군 장교, 21명의 현지(모수) 말레이시아 국경수비대 등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한 인도네시아 정찰대가 마을 장작 중 한 곳에 숨어 있다가 곧 본격적인 습격대에 의해 보강되었다. 구르카족과 말레이시아인들은 위험을 의식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200명의 남자들과 300명의 짐꾼들과 함께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전투
9월 28일 새벽, 한 말레이시아 국경 정찰병이 마을에 있는 병든 아내를 방문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마을에 있는 동안, 그는 몇몇 인도네시아 군인들을 발견하고 동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자 구룽 상병은 급히 서명자들에게 달려가 지원을 요청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수류탄 한 상자를 움켜쥐고 언덕으로 돌아왔다. 그가 정상에 오르자마자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들에게 60mm 박격포를 발사했다. 신호수들이 학교 오두막에서 지원을 부르려 하자 인도네시아인들은 총성으로 오두막을 갈퀴로 긁어 구르카 한 명과 PFF 운영자 한 명이 사망했다. 또 다른 PFF 운영자는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동료들에게 비틀거리며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언덕 위의 군대는 거센 화력을 받았으나 다시 화력을 되찾고 기세 좋게 방어 태세를 올렸다. 싸움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구르카 한 명은 박격포 사격으로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다섯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말레이시아 국경수비대는 기세가 꺾이자 슬그머니 달아나려 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혀서 개구리목걸이로 끌려갔다. 남은 구르카스는 후퇴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붙잡힌 국경 정찰대원 10명을 처형하고 마을을 약탈한 뒤 시신을 매장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여파
다른 구르카 부대는 곧 헬리콥터로 공수되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스트래글러와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주군을 사냥했다. 구르카인들은 헬리콥터를 이용해 10월 말까지 지속된 연합작전으로 철군 경로에 매복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7명의 보더 스카우트의 고문당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10월 1일 인도네시아인 26명이 그들의 긴 보트가 매복 공격을 당했을 때, 그 공격의 생존자들은 10월 10일 매복공격으로 사망했고, 다른 2명은 별도의 매복공격으로 사망했다.
이 전투는 영국과 말레이시아가 13명 사망하고 인도네시아가 33명 사망하는 등 양측 모두에게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붙잡힌 국경 정찰대들의 살인을 지켜본 후 인도네시아 사람들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다.
테자바하두르 구룽은 전투 중 지도력을 인정받아 군사훈장을 받았다.
참조
- ^ "Archived copy". www.historicaleye.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5 March 2010. Retrieved 13 January 2022.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외부 링크
- Rees, Simon. "The Gurkha battle in Borneo". Historical Eye.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5 March 2010. Retrieved 1 June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