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산달라야
Athanasius Sandalaya아타나시우스 산달라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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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와 전 동방의 시리아크 정교회 총대주교 | |
교회 | 시리아 정교회 |
참조 | 안티오키아 |
설치된. | 756 |
기간이 종료됨 | 758 |
전임자 | 이와니스 아이작 |
후계자 | 조지 1세 |
개인내역 | |
이전 게시물 |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
아타나시우스 산드라야(Athanasius Sandalaya)는 아타나시우스 산드로요(Athanasius Sandloyo) 또는 알 산달리(Al-Sandali)라고도 하며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로 756년부터 758년까지 시리아크 정교회의 수장이었다.
전기
원래 카트민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아타나시우스는 미드필드 메트로폴리탄 주교의 부하인 마이퍼카트의 주교가 되었다.아타나시우스는 주교 재임 시절 칼리프 마르완 2세의 지원을 받아 교회 자금을 활용해 입지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742/743년까지 아타나시우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메소포타미아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는데, 그 이유는 각각 마이퍼캣과 아미드의 성장과 쇠퇴, 그리고 아미드의 주교 세베루스의 노쇠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1]
수도로서 아타나시우스는 세베루스가 교구를 이끌지 못한 결과 아슈파린의 제자인 이사야에게 아슈파린 교구의 더 큰 부분을 행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그러나 740년대 후반에 이 임명으로 아타나시우스가 아흐메드의 새 주교로 아르준 전 주교인 특정 아베이를 서품한 총대주교 이와니스 1세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이와니스가 누니브의 전 현직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한 후 투르 압딘의 빈자리에 아타나시우스가 임명한 디오니시우스를 임명하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1]
752년 텔라의 시노드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주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당국의 보복의 암묵적 위협을 이용하여 옛 로마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부터 상메소포타미아 전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메트로폴리탄으로서의 권위를 확대하였다.아타나시우스는 마이페르카트 시에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면서 그의 성공을 기념했다.그는 후에 자신의 제자인 이와니스 이삭을 하란 주교로 추대하고 사모사타와 싱가라의 주교들을 퇴위시키기 위해 그의 새로운 권한을 사용했다.아타나시우스는 754년 이와니스 이삭을 이와니스 1세의 총대주교 겸 후계자로 추대하는 데에도 성공했다.이후 투르 압딘의 모세의 아들인 다니엘은 아타나시우스가 부정선거를 조직함으로써 이와니스의 가부장적 지위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아타나시우스는 756년 이와니스의 뒤를 이어 758년까지 총대주교를 지냈다.[1]
참조
참고 문헌 목록
- Palmer, Andrew (1990). Monk and Mason on the Tigris Frontier: The Early History of Tur 'Abd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360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