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terni Pat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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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terni Patris Latin for 'Of the Eternal Father' Encyclical of Pope Leo XI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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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ature date | 4 August 1879 |
Subject | On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Philosophy |
Number | 3 of 85 of the pontifica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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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terni Patris (English: Of the Eternal Father) was an encyclical issued by Pope Leo XIII in August 1879, (not to be confused with the apostolic letter of the same name written by Pope Pius IX in 1868 calling the First Vatican Council).[1] It was subtitled "On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Philosophy in Catholic Schools in the Spirit (ad mentem) of the Angelic Doctor, St. Thomas Aquinas". The aim of the encyclical was to advance the revival of Scholastic philosophy.
Introduction
In August 1879, eighteen months into his pontificate, Pope Leo XIII (formerly Joachim Cardinal Pecci, bishop of Perugia), issued the encyclical letter Aeterni Patris. The aim of the encyclical was to aid and advance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philosophy, which he felt had fallen into danger and disrepute by adhering to modern trends in secular philosophy, by urging a return to the scholastic thinkers of the Middle Ages, most especially the Angelic Doctor St. Thomas Aquinas, and the related philosophical system of Thomism.[2] The encyclical attempts to clarify the roles of faith and philosophy, later to be covered again in John Paul II's encyclical, Fides et Ratio (On Faith and Reason), showing how most beneficially each may profit from the other.
레오 13세의 목적은 성도의 부흥이었다. 토마스의 철학과 그의 수사 정신의 지속은, 그러나 반드시 학자들의 작품에서 발견될 모든 주장과 의견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3] 백과사전에 따르면 신앙에 가장 적합하고 유용한 철학은 성(聖)의 철학이다. 토마스. 성(聖)의 활기찬 재도입. 많은 사람들은 토마스가 가톨릭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새 교황에 의해 대담하고 전례 없는 단계로 인식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이후 대부분의 교황들은 현대 철학의 오류를 비난하는 것을 선호해왔으며, 그렇다고 옛 철학에 대한 복귀를 명시적으로 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과사전은 페치 추기경과 아는 사람 누구에게도 놀라지 않았는데, 페치 추기경은 수년 동안 자신의 교구인 페루지아 교구에서 토미니즘 르네상스를 주도하여 레지날드 가리구 라그랑주, 에티엔 길손, 자크 마리테인 같은 신학자와 철학자로 이어졌다.
백과사전의 내용은 1870년부터 1879년까지 안젤리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래 교황 대학인 세인트 토마스 대학에서 토마소 마리아 지글리아라 교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지글리아라는 또한 위대한 백과사전인 에이테니 패트리스와 르룸 노바룸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고 아퀴나스의 온건한 현실주의에 찬성하여 전통주의와 온톨로지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4]
학회 등 7개 로마 집단의 일원인 지글리아라는 1870년 산 토마소 학회의 공동 창립자였다. 지글리아라는 성대학 교직 당시 토미스트 부흥의 선두에 선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873년 이후의 토마스는 로마 등지에 널리 퍼졌다.[5] 이 백과사전이 출판된 후 레오 13세는 성 교황청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1879년 10월 15일, 안젤리쿠스 의사 아퀴나스의 전집, 이른바 '레오닌 판'의 출판을 명령했다.[3] 레오닌 판의 감독관은 지글리아라에게 맡겨졌다.
An overview of the document’s main points
Introduction 1. The opening paragraph begins with a reference to Christ’s command to His Apostles to set all men free by teaching the truth of the faith to all nations (Matthew 28:19). Although philosophy can and has deceived men about important matters, it is also capable of illuminating the other sciences. This, then, is the aim of Aeterni Patris: to promote the kind of philosophy that “shall respond most fitly to the excellence of faith, and at the same time [is] consonant with the dignity of human science.”
2. The errors of philosophy have caused problems in public and private life. Philosophy alone is insufficient to emerge from error or prevent further erroneous conclusions “concerning divine or human things.” The faith of the Christian religion preserves philosophic truth by bringing to men “the grace of the divine wisdom.” Neither reason nor philosophy is destroyed by faith; God, creator of “the light of reason in the human mind,” strengthens man and his reason by faith.
3. Pointing to the Church Fathers, the encyclical shows how reason and science were used to call people to faith.[3]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Faith: How Philosophy Aids Faith
4. In the fourth paragraph, the encyclical begins to articulate the ways in which philosophy can aid and complement true faith. Reason is characterized as a “steppingstone” to Christian faith, in that philosophy, when used rightly, fortifies the road to faith and prepares the soul for fit reception of revelation. Reason is characterized as rather autonomous, in that the pagans demonstrated and proved conclusions, using only their natural reason, which supported certain truths regarding faith: the existence of God, his power and divinity, as well as the existence of a natural law. A comparison is drawn between the way in which the Hebrews took with them Egyptian treasures to offer to the service of God, and the way in which truths discovered by the philosophy of the pagans are to be turned to the use and purposes of revealed doctrine.
5. 제5항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자연적인 이성으로부터 수집된 위대하고 고귀한 결실에는 "복음의 교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놀라운 징조로 명백하게 되었다"고 인식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의 확산과 신성함, 단결은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또 다른 징조다.
6. 여섯 번째 단락은 성스러운 신학이 진정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진정한 과학의 본질, 형태, 천재성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철학의 견고한 기초를 필요로 한다. 더구나 철학은 신앙과 삶의 진실성에 대한 사랑으로 철학 연구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참된 이해와 지식이 더 좋고 더 쉽게 성취된다는 점에서 신학을 보완한다.
7. 철학은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신앙의 도구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왜곡으로부터 드러난 진리를 방어하고, 드러난 진실에 반하는 주장을 약화시킨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리스 철학을 사용한 사례(17:16–34[permanent dead link][permanent dead link])와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사용한 사례(Samuel 17:50–54[permanent dead link])는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철학을 사용한 문자적이고 은유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교회는 드러난 진실에 반하는 철학적 주장에 맞서 충실하지만 주의 깊게 가르치는 데 기독교 교사들에게 철학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명령'한다.
철학과 신앙의 관계: 믿음이 철학을 어떻게 돕는가
8. 철학과 계시는 지식의 두 실체를 나타낸다. 철학은 자연 진리의 불경한 영역을 나타내는 반면, 계시는 초자연적인 진리의 신성한 영역을 나타낸다. 계시나 초자연적인 진리는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철학은 이러한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은 계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의 손아귀로 특징지어진다. 요한계시는 '어떤 진리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신앙에 반하는 것도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드러난 교리에 반대되는 어떤 결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9. The human mind is limited and needs the truth of revelation to avoid error. Without the supernatural truth of revelation the human mind is subject to error and opinion. The fact that revelation assists the philosopher in reasoning correctly does not detract from the dignity of the human intellect because wisdom is gained in recognizing the limits of reason. “Faith frees and saves reason from error, and endows it with manifold knowledge.” Revelation serves as a lamp for the philosopher’s path toward truth.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Faith in Historical Perspective
10. The history of philosophy is marked by those who lacked “the gift of faith”—an error that led to doubtful claims about the nature of reality but especially divinity. However, Christ, “as the power and wisdom of God,” restores knowledge through his followers, and by their efforts redeems what is true in pagan philosophy. In doing so, Catholic doctrine was developed and defended against heretics and other adversaries who sought to propose contrary views.
11. In combating these adversaries, Catholic apologists even from the early centuries (for example, Justin Martyr) encountered both the power of reason to demonstrate certain attributes of God and the limitation of reason in relationship to revelation.
12. The encyclical continues the list of those early Christian thinkers who have labored to defend the faith from error and develop a philosophically informed account of it: Quadratus, Aristides, Hermias, Athenagoras, Irenaeus of Lyon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Tertullian, amongst others, are listed.
13. In paragraph 13, Pope Leo XIII continues his list of those who have advanced the Christian intellectual tradition. He turns his attention first to St. Augustine, who Leo says “[w]ould seem to have wrested the palm from all.” The genius of Augustine was his ability to combat “most vigorously all the errors of his age,” as well as his ability to lay down the “safe foundations and sure structure of human science.” The paragraph ends with mention of John Damascene, Basil, and Gregory of Nazianzen as carrying the tradition in the East, and Boethius and Anselm in the West, all of whom Pope Leo says “[a]dded largely to the patrimony of philosophy.”
14. 14항은 '중세의 의사들'인 '스콜라스틱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전통에 공헌한 것은 "성스러운 성직자들의 방대한 저작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학문의 풍부하고 비옥한 수확물을 후세의 이용과 편의를 위해 한 곳에 모아 저장한 것"이었다. 아버지들." 교황 레오 13세는 교황 식스토 5세의 말을 인용하며, 교황은 특히 "천사적인 성"이라고 명명했다. 토머스와 세라피크 세인트. '서핑 천재'와 '무관한 근면'이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뛰어난 의사로서의 보나벤츄어(Bonaventure)가 있다.
15. 식스투스 5세의 인용문은 15항까지 계속되는데, 여기서 신성한 글, 즉 "주교 교황, 성부와 의회"의 저작들을 함께 그리고 편찬하는 학문주의가 (1) 성경의 이해와 해석, (2) 이해를 위한 세 가지 방법으로 후세에 유익하게 그려진다. 아버지들, 그리고 (3) 이단과 실수에 맞서 싸우는 것. 마지막 방법은 "가톨릭 신앙의 신념을 확인하고 이단을 교란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하다"는 점에서 문단에서 강조되어 있다.
16. 16항에서는 학문신학에 대한 찬사를 그 기초가 되는 철학으로 확대한다.
17. 다음 단락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문의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그는 학문의 다른 주장들을 모두 모아 칭찬받았고, 그 후 귀중한 추가도 했다. 신학에 대한 그의 공헌과는 별도로, 백과사전적 주장인 토마스 또한 철학의 모든 점에 세심하게 손을 대었다.
18. 18항에서 토마스는 이전의 과오를 이기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다른 과오를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또한 "적합하다"는 믿음을 이성과 구별하여 그들 둘 중 어느 한쪽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대신 다른 한쪽의 도움을 통해 각각을 강화했다.
성인의 권위 토마스 아퀴나스
19. 19절은 수세기 동안 아퀴나스의 권위가 인정되어 온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백과사전은 얼마나 많은 종교적 명령이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의무화했는가를 묘사한다: 물론 도미니카인 뿐만 아니라 베네딕토인, 카르멜인, 아우구스티누스인, 예수회인. 이것은 성 때문에 행해진 것이다. 토마스는 그런 건전하고 방어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20. 백과사전 제20항은 토머스 신학이 두각을 나타냈던 학문의 모든 대대학을 가리키며 그의 가르침에 따르는 모든 학교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게 한다.
21. 백과사전의 21번째 단락은 성에게 추천서 목록을 계속한다. 토마스의 위대함은 그동안 성(聖)의 작품을 기리고, 빌려 쓰고, 찬미했던 일부 교황들을 언급하면서부터이다. 토마스.
22. 토머스 아퀴나스는 라이온스, 비엔느, 피렌체, 바티칸의 의회 등 에큐메니컬 평의회에서 오랫동안 "단순한 영광으로" 치러져 왔다. 이러한 높은 경의는 트렌트 평의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때 그의 수마가 "성경과 최고 폰티프들의 규례와 함께 제단 위에 올려졌다"는 것이다.
23. 아퀴나스는 "토머스 아퀴나스의 가르침만 빼앗긴다면 모든 가톨릭 교사들과 쉽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 교회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동등하게 존경을 받아왔다.
24. "16세기의 투쟁적 혁신가"는 신앙을 고려하지 않고 철학을 했다. 그들의 발명은 그들 자신의 변덕에 따른 것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그러한 가장 중요한 인간 지식의 문제에서도 "분노하고 충돌하는" 철학의 다양성이 생겨났다. 레오 교황은 많은 철학자들이 고대의 견고한 철학적 토대를 버리고 '변화에 열려 있는 토대'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또 다른 위험: 레오는 장학금의 중요한 일을 긍정하지만, 철학적 추구가 "미어 박식"으로 특징지어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진정한 학습의 발전이다.
토머스쿨 르네상스의 필요성
25. 이러한 위험 앞에서 이미 일부는 성(聖)의 우월한 철학으로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25항. 토마스 아퀴나스는 26항의 원예적이고 고무적인 발언을 뒤따른다.
26. 두 단락 모두 "안젤릭 닥터의 이전 분수령"에서 나온 "순수천"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관상어를 사용한다. 그 언어는 선과 진리와 불가분의 초월적 자질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토머스적 이해에 암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27. 27항에서 백과사전은 특히 "교회의 커져가는 희망"인 젊은 세미나자들에게 학문적 철학과 신학의 가르침을 촉구하기 위해 계속된다. 스콜라스틱 사상은 "어떤 그릇된 지혜의 기교와 기교"에 의해 그녀에게 가해진 폭행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에 비유된다. 학문적 철학은 신앙을 수호하는 능력에서 '신의 초자연적 도움' 다음으로 제시된다.
28. 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의 복원과 이것이 학생들에게 제공할 강력한 토대 또한 '더 평화롭고 안전한 존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비뚤어진 의견의 혹평'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29. '건전한 판단' '올바른 방법' '정신'으로 문과와 체육을 포함한 모든 다른 학문 분야를 강화하고 지도할 학문이다.
30. 특히 학문철학은 '자연과학의 선진화와 발전'에 반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철학은 현대 물리학의 결론과 일치한다. 이러한 합의는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다른 학자들 중에서도 "자연적인 것에 대한 지식의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개방한 것이 예시하고 있다.
31. 이 단락은 학문의 부활, 특히 백과사전이 부르는 토미즘은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와 사상에 대한 슬라브적인 집착을 실천하라는 권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년의 발견에 동의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시대의 모방을 위해 그것을 제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미 오류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파생 작품보다는 아퀴나스 자신의 글을 읽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론
32.–34. 백과사전에서 권하는 중요한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축복을 발기하는 것으로 문서는 끝난다.
백과사전의 효과
백과사전의 해석과 효과는 다양했으며, 일부는 이를 이용해 성(St)에 대한 엄격한 준수 상태로 돌아가도록 승인했다. 토마스, 다른 이들은 이 문서가 토마스의 사고 정신으로 더 복귀하도록 촉구한다고 믿고 있다. 비록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문서는 공포된 St. 이후 적어도 재정립에 성공했다. 토마스는 가톨릭 철학의 중심인물이다.
아이테니 패트리스의 주된 목적은 신앙과 이성을 다시 유익한 변증법 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토마즘을 가톨릭 교육센터에 재도입한 것이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성이 신앙보다 특권이 있을 때 사회와 종교 모두에 해로운 영향을 인식했었다. 토미즘적 학문을 장려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교황 레오 13세는 아퀴나스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판을 의뢰했는데, 이를 "레오닌" 판이라고 한다. 토미즘은 이미 카를로 마리아 쿠르치(d. 1891년), 조반니 마리아 코놀디(d. 1892년), 토마소 지글리아라(d. 1893년) 등의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1879년 이전에 반세기 동안의 부흥을 누렸지만, 애테리니 패트리스는 여전히 현대 신학적, 철학적인 담론에 울려 퍼지는 토미즘의 부흥을 예고했다.
Joseph Maréchal (1878–1944), Karl Rahner (1904–1984), Bernard J. F. Lonergan (1904–1984)과 같은 예수회 신학자들은 때때로 "트랜스첸탈 톰리즘"이라고 불리는 포스트 Kantian Thomism을 개발했다. 프랑스의 신학자 찰스 주르넷(1891~1975)과 자크 마리테인(1882~1973), 에티엔 길손(1884~1978)이 토미스트적 방법론에 크게 기여했다. Journet은 Maritain과 함께 잡지 Nova et Bettera를 창간했고 바티칸 II에서 세션에 기여했다. 길슨은 온타리오 주 토론토에 폰티피컬 메디컬 연구소를 설립했다. 길슨의 존재와 일부 철학자들(1949년)과 마리타인의 지식학부(1932년)는 여전히 토미즘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길슨과 마리타인은 함께 "존재하는 토머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도미니칸스 피에르 만돈넷(1858–1936), 마리 도미니크 체누(1895–1990), 이브 콘가르(1904–1995)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과의 관계를 탐구했다. 20세기의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령 도미니칸 중 하나는 레기날드 가리구-라그랑주(1877–1964)로, 성 폰티피컬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의 세대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토마스 아퀴나스(안젤리쿰). 이러한 전개와 기여는 믿음과 이성을 결실 있는 변증법 속에서 하나로 모으려는 애테리니 패트리스의 목적의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백과사전이 주창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과 사상은 현대 생활의 문제에 대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짊어지게 하는 데 가톨릭 철학과 신학에 귀중한 자원을 증명해 보였다.
세 가지 경쟁판 도덕 탐구 (1990)에서 알래스카 맥킨타이어는 세 가지 주요 경쟁상대의 전통인 백과사전, 계보학, 전통학을 고찰한다. 각각은 19세기 후반에 출판된 정식 작품(백과사전 제9판 브리타니차, 니체의 도덕 계보, 교황 레오 13세의 에테리니 패트리스)으로부터 방어를 받았다. 맥킨타이어는 철학적 토미주의를 가장 설득력 있는 도덕적 탐구 형태라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궁극적으로 백과사전적, 족보적 입장에 대한 내외부적 비평의 복잡한 시리즈를 수행한다.
참고 항목
메모들
- ^ 오리오단, 마이클 "제네티 패트리스." 가톨릭 백과사전 1권 뉴욕: Robert Appleton Company, 1907. 2016년 10월 4일
- ^ 길리, 셰리던 "The Papacy," Cambridge History of Christian, Vol. 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페이지 20 ISBN 9780521814560
- ^ a b c 오리오단, 마이클 "제네티 패트리스." 가톨릭 백과사전 1권 뉴욕: 로버트 애플턴 컴퍼니, 1907. 2015년 11월 18일
- ^ 베네딕트 애슐리, 도미니카인 9명 "타협의 시대" 2013년 19월 12-13일 웨이백 머신에 보관
- ^ 프란시스코 J. 로메로 카라스키요 2013년 2월 6일 접속된 "Ite ad Thomam"
참고 문헌 목록
- 브레지크, 빅터 B 100년간의 토미즘: 애터니 패트리스와 그 후에. 심포지엄(Houston: 토머스 연구 센터, 1981년)
- 브루니, 게라르도 & 지부라, 존 S. 누진학. 백과사전 "에테리 패트리스" 50주년 기념에 대한 기고 (St. Louis: B. 헤르더 북 주식회사, 1929년)
- 에를, 프란츠. 주르 에이지클리카 "에테리니 패트리스." 텍스트와 코멘타, 에드. Franz Pelster, S.J. (롬: Edizioni di Storia e Letteratura, 1954년)
- 가건, 에드워드 T 레오 13세와 현대 세계 (백어, 산: 케신저 출판, 2006)
- 힐, 하비 가톨릭 역사평론 89:1(2003년) : 39-59
- 크나사스, 존 F. X. "누구 신토미스트 부활?" 로고스: 카톨릭 사상 문화 저널 3:4 (2000): 121–49
- 맥쿨, 제럴드 A, S.J. 유니티에서 다원주의로: 토미즘의 내부 진화 (뉴욕: 포드햄 대학 출판부, 1989년)
- 페레이라, 호세. "토미즘과 마기스테리움: "에테리니 패트리스에서 베리티타티스 화려함에 이르기까지" 로고스: 가톨릭 사상문화 5:3(2002): 147–83
추가 읽기
- 히팅어, 러셀 "Pope Leo XIII", "법, 정치, 인간 본성에 관한 현대 기독교의 가르침" (존 위트, 프랭크 S) 알렉산더, 에드스),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 2006. ISBN 978023113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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