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쿠노

Wilhelm Cuno
빌헬름 쿠노
Wilhelm Cuno, 1876-1933, half-length portrait, facing right LCCN2005680053.jpg
독일의 총리
재직중
1922년 11월 22일 – 1923년 8월 12일
대통령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선행자조지프 위스
성공자구스타프 스트레스만
개인내역
태어난
빌헬름 카를 요제프 쿠노

(1876-07-02)2 1876년 7월
, 독일 제국
죽은1933년 1월 3일 (1933-01-03) (56)
바이마르 공화국 오무흘레
정당없음
배우자마사 베르타 위르츠
아이들.3

빌헬름요제프 쿠노(Wilhelm Carl Josef Cuno, 1876년 7월 2일 ~ 1933년 1월 3일)는 1922년부터 1923년까지 264일간 독일의 재상을 지낸 독일의 사업가 겸 정치인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는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의한 루르 점령으로 알려진 에피소드와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두드러지게 가속화되어 초인플레이션으로 치닫는 시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쿠노도 하파그 해운회사의 총감독이었다.

초년기

빌헬름 칼 요제프 쿠노는 1876년 7월 2일 에서 태어났고, 당시 프러시아 작센이었으며 현재 튜링기아에 있다. 그는 어거스트 조지 빌헬름 쿠노(1848-1915)와 그의 아내 캐더리나 엘리자베스 테레시아(1852-1878)의 아들이었다.[1]

1906년 로마 가톨릭 신자인 쿠노는 함부르크 상인 휴고 위츠(Hugo Wirtz)의 딸 마사 베르타 위츠(Martha Berta Wirtz, 1879년 출생)와 결혼했다. 그들은 3남 2녀를 두었다.[1][2]

쿠노는 베를린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주리스 닥터를 받았다.[1] K.D.St.V. Arminia Heidelberg의 일원으로 카텔베르밴드 데르 카톨리첸 도이체첸 학생회원이었습니다.

초기 경력

그는 1907년에 Reichsschatzamt (Treasury)에 고용되었는데, 초기에는 Regierungsassessor로 고용되었다. 쿠노는 1910년에 레기룽즈라트로, 1912년에는 게하이머 레지룽즈라트로 승격되었다. 그의 업무는 주로 의회 법안을 준비하고 그것을 제국주의자에게 제출하는 것이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쿠노는 독일군을 위한 식량 공급을 조직하는 데 관여했는데, 처음에는 독일군의 창설 이래 1916년 7월까지 라이히스게트레이데스텔을 지휘했다. 그 후 그는 국무장관(즉 장관) 바토키에게 애착을 얻어 크리그세르네룽삼트(전식부)의 조직화를 도왔다. 1916년 말, 쿠노는 재무부에서 전쟁과 관련된 경제 문제에 관한 총회(섹션)를 담당하게 되었다.[1]

알버트 발린의 요청으로 쿠노는 1917년 11월 하파그 해운회사에 이사로 입사하기 위해 민원을 그만두었다. 1918년 11월 발린이 사망한 후 쿠노는 12월 하팍의 총감독으로 승진했다.[1]

쿠노는 경제 전문가로서 전후 휴전 협상, 배상 및 평화 조건에 관한 협상과 소련과의 라팔로 조약 체결 후 항의로 떠난 제노바 회의 등 국제 회의에 참가하였다. 쿠노는 또 평화협정(1920/21년)의 조건에 따라 연합국에 인도된 상선들에 대한 보상과 관련해 독일 해운회사와 정부간의 협상에서 중요한 협상가였다.[1][2]

1920년 쿠노는 하팍을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라인과 동맹으로 이끌면서 하팍을 여객선으로 재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또한 해외 순방 중에 제국의 대외 정책 이익을 비공식적으로 대변했다.[1]

재상

쿠노, 왼쪽,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 대통령(1923년)과 함께

쿠노는 외무장관(1922년 가을)이나 재무장관(마티아스 에르즈베르거 1920년 마티아스 에르즈베르거 사임 후)의 자리를 맡자는 여러 제안을 거절했지만, 조셉 위스2차 내각 사임 후 내각 구성에 합의했다. 쿠노는 1922년 11월 22일 대통령령에 의해 라이히스칸즐러로 임명되었고, 라이히스태그에서는 표결 없이 임명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당원이 아닌 최초의 수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을 총리로 발탁한 사회민주당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쿠노는 공화국과 의회제도에 대해 다소 냉담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라이히스타그를 상당히 낮게 평가했고 당사자들 사이의 말다툼이 혐오스럽다고 느꼈다. 쿠노는 주로 비당파 경제학자와 독일국민당, 독일민주당, 독일중앙당, 바이에른인민당 소속 의원들로 구성된 정부를 구성했다. 정부는 게셰프츠 장관, 레기룽 데르 위츠하프트 또는 카비네트 데르 페르슬리케이텐으로 대안으로 언급되어 의회 정당들 간의 명시적인 연정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1][2][3]

해외에서 뛰어난 인맥을 가진 한 남자가 이끄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 정부가 연합국과의 어려운 회담에서 진전을 이루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했다. 쿠노가 배상 문제를 해결하고 외환시장에서 마크를 안정시키려던 계획은 프랑스 총리/외교장관 푸앵카레의 독촉에 연합국에 의해 거부당했다. 독일이 목재와 석탄(금화 부족 대신 배상금으로 만들어짐)의 수송이 조금 늦어지자, 프랑스는 이를 조약의 고의적인 위반이라고 선언하고, 1923년 1월 11일 루르(벨기에인들이 합류한 후)를 점령하라고 군대를 명령했다. 독일 밖에서도 불법으로 널리 보여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격분한 쿠노 정부가 소극적인 저항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 대한 보상 수송이 중단되었고, 광산은 더 이상 이들 주에 납품하지 말 것을 지시받았으며, 공무원들과 라이히스반 직원들은 점령당국의 명령에 불복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

독일의 산업 중심지인 루르 경제는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제국 정부가 폐쇄, 추방, 체포에 영향을 받는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금 지급은 대부분 인쇄 자금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엄청난 액수에 달했다. 이것은 인플레이션을 급격히 증가시키고 마크가 자유낙하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1]

1923년 5월과 6월 정부의 배상 논의 재개 시도는 푸앵카레가 먼저 소극적인 저항이 끝나지 않는 한 협상을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1923년 8월에 정부를 상대로 한 파업이 시작되었다. 1923년 8월 12일, 쿠노와 그의 내각은 SPD에 의해 시작된 불신임 투표의 결과로 사임했다.[1][3]

만년

쿠노는 정계를 은퇴하고 하팍에서 이사로 복귀했다. 1926년에 그는 다시 한번 사무국장이 되었다. 그는 전쟁 중 미국에서 압류된 독일 재산의 석방에 관한 협상과 1930년에 일어난 노르드데우체 로이드와의 합병을 위해 일하는 데 관여했다.[1]

1925년 라이히스프래시던트 선거 때 쿠노는 중앙당 후보인 빌헬름 마르크스보다는 파울 힌덴부르크에 대한 지지를 노골적으로 표명했다.[2]

1932년 쿠노는 빌헬름 [4]케플러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에게 경제적으로 조언했다

쿠노는 1933년 1월 3일 함부르크 인근 오무흘에서 사망했다.[1]

참조

  1.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Klein, Gottfried (1957), "Cuno, Wilhelm", Neue Deutsche Biographie (in German), 3, Berlin: Duncker & Humblot, pp. 438–439; (전체 텍스트 온라인)
  2. ^ a b c d "Das Kabinett Cuno - Einleitung (German)". Bundesarchiv. Retrieved 6 January 2015.
  3. ^ a b "Biografie Wilhelm Cuno (German)".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Retrieved 6 January 2015.
  4. ^ 크리스토프 브루어스: 1945 bis 1953 함부르크에서 FDP 죽다. als burgerliche Linkspartei를 시작하라. 마틴 메이덴바우어 베를라그스부흐한드룽, 뮌헨 2007 ISBN 978-3-89975-569-5, 페이지 85.

외부 링크

정치국
선행자 독일의 총리
1922 - 1923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