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픽 샤바나드초비치

Refik Šabanadžović
레픽 샤바나드초비치
개인정보
풀네임 레픽 샤바나드초비치
출생의 날짜. (1965-08-02) 1965년 8월 2일 (56세)
출생지 투지, SR 몬테네그로, SFR 유고슬라비아
높이 1.80m(5ft 11인치)
포지션 디펜더 / 미드필더
청년 경력
데치치
부두치노스트 티토그라드
시니어 커리어*
몇 해 Apps (Gls)
1982–1983 OFK 티토그라드 23 (1)
1983–1987 젤제즈니차르 82 (0)
1987–1991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62 (2)
1991–1996 AEK 아테네 143 (5)
1996–1998 올림피아코스 25 (0)
1998–1999 캔자스 시티 마법사 27 (0)
합계 362 (8)
국가대표팀
1986–1990 유고슬라비아 8 (0)
* 시니어 클럽의 등장과 골은 국내 리그에만 반영됨

레픽 샤바나드초비치(1965년 8월 2일 출생)는 유고슬라비아의 은퇴한 프로 축구 선수다.

클럽 커리어

그의 경력은 작은 몬테네그린 클럽 데치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티토그라드의 부두치노스트에 의해 그곳에서 목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 옮겨졌다. 1983-84시즌 이전에, OFK 티토그라드로 시니어 데뷔를 한 후 사라예보의 에델제즈니차르로 이적하여, 이비카 오심(Ivica Osim)의 지도 아래 유고슬라비아 수비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84-85시즌 유럽 최고 성적인 UEFA컵 준결승에 기여했다.

이 보스니아 진영에서 4시즌을 뛴 후, 그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로 떠났다. 클럽에서 3번의 챔피언 타이틀과 1번의 국가대표 컵을 따냈지만, 선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1990-91 시즌유러피언컵 우승이었다.

그 후, 는 그리스로 갔다. 는 두샨 바제비치 감독이 데려온 AEK 아테네에서 뛰었다. 그곳에서 그는 1992년, 1993년, 1994년에 3회 연속 우승을 했다.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이후 올림피아코스로 이적해 바제비치 감독 밑에서 뛰기도 했으며 1997년 또 다른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겨울 샤바나드초비치는 메이저리그 축구 클럽 캔자스시티 위저즈로 이적하여 친구 프레키 라도사블제비치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2년 동안 그 곳에서 뛰다가 1998-99 시즌 말에 마침내 은퇴했다.

국제 경력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의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출전은 대체로 산발적이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4년 동안 총 8개(출발 6개, 대체출전 2개)의 기록으로 모두 이비카 오심 감독 밑에서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이 대표팀에서 뛰었던 시간의 하이라이트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출전이었다. 경기 중 4차례 선발 등판해 자신감 넘치는 수비 디스플레이를 선보였지만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31분에 퇴장 당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유로 1988 예선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1986년 10월 29일 터키와의 스플리트에서 열린 유로 88 예선전에서 수비라인 선발로 출전해 대표팀에 데뷔했다.[1] 이비카 오심 대표팀 감독(이반 토플락 감독과 코치직을 함께 했던 이반 토플락 감독)은 21세의 에일제즈니차르 수비수를 그르바비카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부상으로 팀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수비 주축인 파루크 하디베기치(파루크 하디베기치)가 경쟁전 선발 라인업에 데뷔전을 치르면서 다소 놀라움을 자아냈다. 사실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이날 데뷔전을 치른 세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또 다른 옐조 젊은 라드밀로 미하일로비치(22)와 리제카 골키퍼 마우로 라브니치(27)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샤바나드쇼비치가 멋진 활약을 펼치며 4-0으로 여유로운 승리를 기록했다. 2주 후 유고슬라비아는 보비 롭슨의 영국과의 중요한 예선전을 위해 웸블리까지 갔다.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다시 수비에서 첫선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쉽게 0-2로 패하면서 나머지 유고슬라비아 팀들처럼 많은 것을 잊는 경기가 있었다. 그는 하디베기치가 부상에서 회복하면서 예선전 남은 사이클 동안 다시 피처링을 하지 않았다.

1990년 월드컵 예선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이 다시 대표팀 행동을 보기까지 거의 2년 전이었다. 1988년 10월 중순, 유고슬라비아는 글래스고 스코틀랜드에서 1990년 월드컵 예선 개막전을 치렀다. 1 대 1로 동점을 이룬 오심은 후반 89분 공격형 미드필더 보라 크레베코비치에게 수비수를 불러들였다. 그 몇 분들은 샤바나드쇼비치가 몇 번 더 불러올 때 전체 예선 사이클의 유일한 행동이었지만, 여전히 사용되지 않은 서브로 남아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조 1위를 차지하여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최종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1990년 월드컵

1990년 4월 24세의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이 월드컵 최종 선수단에 포함된 것은 그가 예선전에서 몇 분밖에 뛰지 못했고 월드컵 전 우방인 루블랴나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단 한 번의 교체 출전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산시로에서 열린 조별리그 개막전서독전에서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1분간의 움직임 없이 벤치에 머물렀다. 개막전 패배가 심하자 오심은 볼로냐에서 열리는 콜롬비아와의 차기 조별리그 경기 수비라인을 개편해 조란 벌리치, 미르사드 발지치 등을 벤치마킹하는 한편 샤바나드초비치, 부자딘 스타노지코비치에게 선발로 내주기로 했다. 유고슬라비아가 1-0으로 팽팽히 맞선 승리를 기록함에 따라 샤바나드초비치도 90전 전승을 거뒀다. 5일 뒤 아랍에미리트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다시 선발로 나섰다가 유고슬라비아의 4-1 완승을 거둠에 따라 클럽 팀 동료인 로버트 프로시네치키에게 아쉽게 패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다시 선발로 나서 유고슬라비아의 연장전 승리가 2 1로 진행되자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감독의 신뢰를 보답했다. 지금쯤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의 눈에 비친 오심 주식은 8강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피렌체에서 지켜내야 하는 부럽지 않은 임무를 코치가 맡겼을 정도로 높아졌다. 그러나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전반 7분 만에 옐로카드 2장을 챙겼는데, 첫 번째가 아르헨티나 프리킥 전 유고슬라비아 장벽 설치 과정에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판단된 점, 두 번째가 31분 적이었던 점 등으로 인해 경기가 매우 일찍 종료됐다.마라도나에게 반칙을 하다 마지막까지 10명의 유고슬라비아는 몇 번의 뛰어난 골득실 기회를 만들어내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가슴 아픈 패션을 통해 페널티킥으로 패했다.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다시는 대표팀에서 뛰지 않았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위해 총 8개의 모자를 수집했다.[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3년 3월, 27세의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도주의 스타즈' 대 K.R.C. 젠크, 1의 일부로서 두 번의 친선경기에 출전했다. 젠크코블렌츠의 FC 카이저슬라우테른.[3] The hastily arranged team also featured many Bosnia-born players who previously played for the Yugoslav national team such as Faruk Hadžibegić, Safet Sušić, Mehmed Baždarević, Mirsad Baljić, Davor Jozić, Blaž Slišković, Haris Škoro, Semir Tuce, Meho Kodro, Predrag Jurić, and Husref Musemić. 비록 경기는 인도주의적인 성격만 가지고 있었지만, FIFA의 승인을 얻어 경기되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종 구성의 첫 단계로 널리 보여졌다.

일단 1995년 11월 말 보스니아 국가대표팀이 공식 경기를 치르기 시작하자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생활

샤바나드초비치 주지사는 부인 제리나 더비셰비치 주지사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사라예보에 살고 있다.[4] 아넬 샤바나드초비치는 그의 아들이다.

부상

1987년 10월 15일, FK ž제즈니차르에서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로 이적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샤바나드초비치 감독은 사라예보에서 열린 첫 경기 도중 옛 클럽과의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르바비카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그 경기 초반 헤딩슛을 위해 자리를 다투던 중, 오엘제즈니차르의 포워드 조란 슬리크코비치가 샤바나드초비치의 머리를 팔꿈치로 내리치며 사원을 강하게 가격했다.[5] 그 충격은 너무나 강력해서 샤바나드초비치도 결국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즉시 헬리콥터로 베오그라드로 공수되어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5]

다행히도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약 6개월 후에 다시 경쟁적인 행동으로 돌아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축구로 돌아온 지 두어 달 후, 그는 1988년 여름 서울로 데려간 올림픽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명예

레드 스타
에이크
올림피아코스

참조

  1. ^ 유고슬라비아-터키 4:0;1986년 10월 29일 유로 88 예선
  2. ^ "Player Database". eu-football.info. Retrieved 11 October 2020.
  3. ^ 수시치, 슬리슈코비치, 슈코로 이 드루기 포첼리 스테바란제 레프레젠타시제;sarajevo-x.com, 2010년 3월 9일
  4. ^ 지보트나 프리차 레피카 샤바나도비차 스포츠IN.ba
  5. ^ a b Delić, Emir (23 February 2013). "Šabanadžović: Na Grbavici sam gledao smrti u oči". Al Jazeera Balkans. Retrieved 20 November 2021.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