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의 군사 역사
Military history of Iceland이것은 아이슬란드에서의 역사적 전쟁과 최근의 발전에 대한 간략한 개요다.
정착 및 영연방
아이슬란드가 정착한 이후 870년대에 노르웨이 왕의 영역이 될 때까지 아이슬란드의 군사 방어는 레이샹그르와 같은 원정군에서 당시의 표준 북유럽 군사 교리에 따라 조직된 복수의 족장(고아르)과 그들의 자유 추종자(고아르)로 구성되었다. 군대는 전사와 태생의 질에 따라 부대로 나누어진다.[1] 이 기간이 끝날 무렵 족장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권력은 추종자들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로 커졌다. 이로 인해 13세기에는 에이지 오브 스터룽즈(Age of the Sturlungs)로 알려진 일련의 주요 불화가 일어났다. 전쟁 중과 전쟁 전에 21개 이상의 요새가 건설되었다.[2]
이 전투는 평균 15%의 부상율을 가진 1000명 미만의 남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낮은 사상자 비율은 아이슬란드 사회에 스며든 핏줄 같은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는 패배한 군대가 인간에게 명예롭게 학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독교의 요구사항뿐만 아니라 각 악마에게 성직자의 사면을 받도록 요구했고, 그 결과 하층민들만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전투 후 처형은 흔치 않았지만, 그들은 일어났을 때 광범위했다. 예를 들어, 약 110명의 사망자를 낸 하우네스 전투, 한 쪽에는 약 80명의 사망자를 낸 플로아바르다기 전투,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알려지지 않은 율릭스스타기르 전투, 사형 집행을 포함한 최대 60명의 사망자를 낸 율릭스스타기르 전투 등을 보라. 이 세 번의 전투, 즉 유럽적 맥락에서 불릴 수 있는 교전은 250명의 사망자를 더하기 때문에, 이 세 번의 만남만으로도 1220–1262년의 연평균 7건의 살인에 거의 6명이 더해진다. 살인이 없다면 몇 년은 지나갈 수 있다.
수륙양용 작전은 이 시기에 아이슬란드, 특히 웨스트fjords에서 전쟁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대규모 해상 교전은 흔하지 않았다. 이것들 중 가장 큰 것은 플로아바르다기로 알려진 후나플로이에서 수십 척의 배와 약혼한 것이었다. 한쪽은 보트뿐만 아니라 더 작은 장선을 고용하고 다른 큰 크나르, 다른 큰 상선과 여객선을 고용하고 있다. 비록 어느 쪽도 바다에서 전투를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전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표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배들은 양궁과 바위 던지기부터 시작해서 창으로 함대 여기저기에서 투항하고 결말이 난 뒤, 배들이 서로 여러 차례 교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족장들이 주로 농민 부담금에 의존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르웨이 군사력의 영향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그들의 개인적 감정은 확대되고 전문성이 높아졌다. 마지막에 대부분의 족장들이 살해되었고 전쟁을 일으킨 원래 족장들 중 한 명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다른 모든 것을 정복하고 평화를 보장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로 인해 1262년 남, 북, 서 아이슬란드의 베트리 번두르(더 나은 농부나 농부 지도자들)가 노르웨이 왕관과 알링기에 굴복하게 되었다. 2년 후인 1264년 동 아이슬란드의 영주인 스빈펠링가도 제출했지만 동부 지역은 전쟁의 폐허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주로 황무지와 산, 빙하의 지리적 장벽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와의 동맹
당시 가장 강력한 대서양 해군은 작아서 대규모 침략군을 아이슬란드까지 운반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왕은 해군인 대서양 상공에 그의 의지를 집행할 능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평화가 뒤따랐다. 원주민 노블레스들은 계속 정예부대를 유지하였는데, 이를 스베이니니얼이라고 불렀고, 그 대부분이 치프들의 고귀한 후손이었던 스스루멘(하위부)들은 법률로 위임된 국방의무를 위해 병사나 스베이나르를 유지하였다. Sslslumaður's fief의 모든 주민들은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들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노르웨이의 아이슬란드인들은 12세기 초부터 노르웨이의 방어를 도울 의무가 있었지만 왕은 노르웨이를 방어하기 위해 원정군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원정군이 왕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온 적은 몇 차례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가 더욱 강력해짐에 따라 주교와 사제들은 더욱 전투적이 되었다. 그들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두 주교들은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의 6% 이상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주교들이 직접 만든 스베이나는 군 복무를 마친 후 성직자가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두 주교는 사실상의 교회 카운트나 커크쥬그리파가 되어 법 집행과 전반적인 군사 방어의 지휘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이슬란드 귀족들은 15세기 후반에 주교들의 권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항의했다. 영국 무역업자와 어부들이 아이슬란드에 오기 시작한 15세기에는 족장들 사이에서 외국 선박에 대한 방어용 대포와 내부 분쟁을 위한 대포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 하키나 학비사로 알려진 손곤과 같은 다른 총기도 인기를 끌었다.
루터교
16세기 초 덴마크 왕이 루터교를 받아들인 이후, 그는 자신의 영지를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바꾸려는 캠페인을 벌였다. 1540년대에는 아이슬란드의 차례였다: 루터 주교가 스카홀트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격렬한 갈등이 이어졌다. 비록 13세기 남북전쟁에서 유혈사태가 그것과 거의 근접하지는 못했지만, 주교들이 수천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알링기에서도 싸웠기 때문에 여전히 상당한 규모였다.
스칼홀트를 고립시키기 위해,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가톨릭 주교인 호라르의 존 아라손은 다지 구아문드슨 땅을 침공하여 웨스트피오르드족에 대한 통신선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처음에는 사와펠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후에 다이의 군대에 패배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붙잡혔다. 욘 아라손과 그의 아들들은 1550년에 스칼홀트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참수되었다. 1년 후 대부분 랜드스크네츠로 구성된 덴마크 용병대가 도착하여 전환 정책을 지지하였다. 비록 공개전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덴마크 왕은 여전히 반란을 경계했고 아이슬란드인의 모든 무기와 갑옷의 파괴를 명령했다. 다음 해에 걸쳐 이러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랜드스크네츠로 구성된 추가 용병군이 파견된다. 그 후, 덴마크 왕실 군대가 아이슬란드의 방어를 책임지는 시기가 시작된다. 왕립 단오-노르웨이 해군은 아이슬란드 해안을 순찰하지만, 해적 행위보다는 불법 거래를 막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부 아이슬란드 보안관은 여전히 상당한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랜드스크네츠가 수색에 철저하지 못한 웨스트fjords에서 더욱 그렇다.
해적 습격
앞서 언급한 웨스트fords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아이슬란드인들이 외국 해적들을 학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이슬란드인들 사이의 무기력 부족은 그들을 이전보다 해적 공격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아이슬란드 관리들은 왕에게 보낸 편지로 급습에 대해 불평했고 그 결과 많은 할버들이 칙령에 의해 아이슬란드로 보내졌다. 아이슬란드어로 atgeir 또는 arngeir로 알려진 Halberd는 아이슬란드 농부들의 대표적인 무기가 되었다. 왕은 아이슬란드인들을 계속 경계했고, 그들에게 총기를 공급하는 것을 거부했다. 해적들은 대부분 그런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몇몇 오래된 총과 대포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들의 배에 대항하여 사용될 수 있었다.
1627년 아이슬란드인들은 덴마크군이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납치한 바바리 코르세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어떤 곳에서는 덴마크군이 침입자로부터 도망쳤으나, 아이슬란드의 최고위급 군관이자 전체 주지사였던 아이슬란드의 선장(Höfussmaurur)이 급히 요새를 건설하여 베사스타히르를 가까스로 방어했고, 공격선들 중 한 척을 대포 화기로 심하게 손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아이슬란드인들은 그가 요새 앞의 암초에 24시간 동안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를 침몰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 결과 베스트만네야르와 같은 곳에서는 아이슬란드인들이 왕의 축복을 받아 현지 민병대를 결성하였다.
18~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 왕은 아이슬란드 민병대를 사향포로 무장시키기 위해 상당한 양의 돈을 보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공약은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1799년 아이슬란드 남서부 지역의 수 백 명의 민병대는 16세기 할버드를 포함하여 대부분 녹슬고 대부분 구식인 중세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1808년 코펜하겐 전투에서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의 대부분을 함락하거나 포획한 후 영국 침략자들이 도착했을 때, 아이슬란드의 화약 양은 너무 적어서 아이슬란드 주지사인 트램페 백작의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1855년, 아이슬란드 군대는 베스트만네야르의 보안관 안드레아스 아우구스트 폰 콜에 의해 다시 창설되었다. 1856년 왕은 총기를 사기 위해 180리크솔라를 제공했고, 그 다음 해에는 200리크솔라를 추가로 제공했다. 보안관은 헤르필킨, "대대대"로 알려진 새로운 군대의 대장이 되었다. 1860년 폰 콜이 죽고, 페투르 비야르나센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9년 후, 페투르 비야르나센은 후계자를 임명하기 전에 사망했고,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이슬란드의 독립 영웅인 욘 시구르흐손 등 많은 사람들이 아이슬란드 상비군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지만 1940년의 시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3]
독립
1918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왕이 통치하는 별도의 왕국으로 주권을 되찾았다. 아이슬란드는 직후 해안경비대를 창설했지만 재정난으로 상비군 창설은 불가능해졌다. 정부는 영구적인 중립이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정부는 정당하게 긴장하고, 국가경찰(리키슬뢰그레글란)과 그 보호구역의 기능을 군대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아그나르 코포예드 한센 경찰청장은 덴마크 공군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그는 신속하게 움직여 경찰관들을 훈련시켰다. 무기와 유니폼이 획득되었고, 플루자르바트 근처에서 그들은 소총 사격과 군사 전술을 연습했다. 아그나르는 1940년 5월 10일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침공하기 전까지 간신히 60명의 장교들을 훈련시켰다. 군국화를 향한 추진의 다음 단계는 300명의 강력한 예비군 훈련이었지만, 침략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코드 전쟁
아이슬란드 코드 전쟁(아이슬란드어: :스카스트리진, "대구 전쟁" 또는 "영해를 위한 전쟁"인 랜드헬기스스트리진(Landhelgisstrizin, "영해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코드 전쟁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북대서양 어업권을 둘러싼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의 세 차례의 대결이었다. 코드 전쟁 중 어느 것도 재래식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문턱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군국화된 주간 분쟁으로 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있다.[4][5][6][7]
제1차 대구 전쟁은 1958년 9월 1일부터 11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아이슬란드 어업수역을 9월 1일 자정부터 12해리(7.4~22.2km·4.6~13.8mi)까지 확장한 새로운 아이슬란드 법이 시행되자마자 시작됐다. 영국 해군과 아이슬란드 순시선 사이에 다수의 함정과 몇 발의 총성이 발사된 후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어업 수역 문제에 대한 아이슬란드와 영국간의 향후 의견 불일치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 사법 재판소로 보내지도록 규정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제1차 대구 전쟁에서는 총 37척의 영국 해군 함정과 7천명의 선원들이 6척의 아이슬란드 포선과 100명의 해안 경비대들로부터 어선을 보호했다.[8]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제2차 대구 전쟁은 1972년 9월부터 1973년 11월 임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2년 아이슬란드는 남획을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 전 일방적으로 영해를 넘어서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했다. 그것은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와 함께 쿼터제를 정비했고, 그 지역을 조난했던 영국 어선들과의 일련의 순삭감 사건을 야기했다. 그 결과, 영국 해군은 군함과 예인선을 배치하여 향후 아이슬란드 선박에 의한 영국 어선의 괴롭힘에 대한 억제책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이슬란드 경비함과 영국 군함 사이에 직접적인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다시 격추 사건이 포함되었다. NATO 내에서 일련의 회담 후 1973년 10월 3일 영국 군함이 소환되었다. 11월 8일 영국 어업활동을 50nmi(93km, 58mi) 한도 내에서 특정 지역으로 제한해 당시 분쟁을 해결한다는 협정이 체결됐다. 이 결의안은 영국 어선들이 연간 어획량을 13만 톤 이하로 제한한다는 전제하에 이뤄졌다. 이 협정은 1975년 11월에 만료되었고, 제3차 '코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3차 대구 전쟁은 1975년 11월부터 1976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자국 해안에서 200nmi(370km, 230mi) 떨어진 바다가 아이슬란드 당국의 관할 하에 있다고 선언했다. 영국 정부는 이 같은 배타구역의 대폭적인 증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아이슬란드 경비정과 영국 트롤어선, 프리깃함, 예인선 사이에 다시 거의 매일 램프가 설치되었다. 분쟁은 결국 1976년 아이슬란드가 영국의 해군함정 200nmi(370km, 230mi) 한도 내에서 배치한 데 대한 보복으로 나토 주요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종결됐다. 영국 정부는 1976년 12월 1일 이후 영국 어선들이 이전에 분쟁을 일으켰던 지역 내에서 조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9]
나토와 냉전
냉전 기간 동안 아이슬란드가 나토 방위 노력에 기여한 주된 공헌은 군사 시설을 위한 "합의된 지역"의 임대료 없는 제공이었다. 이 중 단연코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미국, 캐나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인력에 의해 유인된 나토 해군 항공 기지 케플라비크였다. 이들과 다른 나토 국가들의 부대들도 케플라비크에 임시로 배치되어 연습 작전을 펼친다. 이런 관행 중 상당수는 대잠전 순찰이었지만, 이 훈련은 케플라비크에서 P-3 ASW 항공기가 철수하면서 중단됐다.
아이슬란드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의 주둔을 양국 외교·안보 정책의 초석으로 여겼다. 그 부대의 주둔은 합의된 회의라고 알려진 조약에 따라 협상되었다.
미군 주둔에 대한 논의는 2005년 현재 재개되었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미군 병력과 장비를 세계 각지에 배치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정부의 제안에는 케플라비크에 F-15C 요격기 4대를 계속 주둔시키는 대가로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의 항공 반쪽 분대와 함께 아이슬란드 공군기지의 완전한 인수는 물론, 페이브호크 구조 헬리콥터 부대를 대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6년 3월 15일 미국 정부는 아이슬란드 방위군을 2006년 9월 말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마지막 미군은 9월 30일 케플라비크 기지의 통제권을 외교부를 대신하여 담당하게 될 케플라비크 공항의 보안관에게 넘겨주면서 떠났다.
미국의 철수
2006년 9월 26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미군 철수에 대한 아이슬란드의 대응을 담은 문서를 발표했다.[10] ⑴ 경찰과 해경을 포함한 아이슬란드의 모든 보안 조직을 감독할 보안 및 방위 권한을 신설하는 계획, (b) 선박과 항공기를 구입하여 해안경비대의 역량을 높이는 계획, (c) 보안 또는 비밀 서비스를 만드는 계획, (d) 사람에 걸친 보안 통신 시스템 구축 계획 등이 포함됐다.시골의 자유당의 마그누스 오르 하프슈타인손 하원의원은 비외른 비야르나손 법무장관과 기독교 사정에 의해 표현된 견해에 동의하여 그의 당의 상비군 증원 의지를 표명했다.[11][12][13]
아이슬란드 방위청(Varnarharlastofnun Islands)은 외무부 장관 산하에 2008년에 창설되었다. 이 기구는 이전에 나토군이 해군 공군기지 케플라빅에서 근무했던 방위시설 유지, 정보수집, 군사훈련 등 기능을 통합할 예정이었다.[14] 아이슬란드 경제가 위기를 겪으면서 초기 예산 2000만 달러는 2009년 1300만 달러로 떨어졌다.[15] 2010년 3월 30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 기구를 해산하고 그들의 서비스를 해안 경비대나 경찰 지휘하에 둘 것을 입법하겠다고 발표했다.[16] 돈을 절약하고 방어에 있어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의 1차적인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 방위청은 2011년 1월 1일에 폐쇄되었다.
Island Air Meet 2014는 처음으로 NATO와 다른 북유럽 국가들을 주최했다.[17]
참고 항목
참조
- ^ 비르기르 로프트손, 에르나사르가 이스랜드 : 1170–1581, 프자시. 레이캬비크 2006 페이지 14-17
- ^ 비르기르 로프트손, 에르나사르가 이스랜드: 1170–1581, 프자시. 레이캬비크 2006. 페이지 76
- ^ Jon Sigurðsson, "Um Verzlun á Island", Ný Félagsrit 3. 페이지 116–117.
- ^ Steinsson, Sverrir (2016-03-22). "The Cod Wars: a re-analysis". European Security. 25 (2): 256–275. doi:10.1080/09662839.2016.1160376. ISSN 0966-2839. S2CID 155242560.
- ^ Hellmann, Gunther; Herborth, Benjamin (2008-07-01). "Fishing in the mild West: democratic peace and militarised interstate disputes in the transatlantic community".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 34 (3): 481–506. doi:10.1017/S0260210508008139. ISSN 1469-9044. S2CID 144997884.
- ^ Ireland, Michael J.; Gartner, Scott Sigmund (2001-10-01). "Time to Fight: Government Type and Conflict Initiation in Parliamentary Systems". Th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45 (5): 547–568. doi:10.1177/0022002701045005001. JSTOR 3176313. S2CID 154973439.
- ^ Prins, Brandon C.; Sprecher, Christopher (1999-05-01). "Institutional Constraints, Political Opposition, And Interstate Dispute Escalation: Evidence from Parliamentary Systems, 1946–89". Journal of Peace Research. 36 (3): 271–287. doi:10.1177/0022343399036003002. ISSN 0022-3433. S2CID 110394899.
- ^ "History of the Cod Wars (BBC Programme)". Youtube.com. 2010-12-05. Retrieved 2013-09-21.
- ^ "Útfærsla efnahagslögsögunnar" (in Icelandic). Lhg.i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02-05. Retrieved 2013-08-21.
- ^ https://forsaetisraduneyti.is/media/frettir/Nyverkefn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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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ke, John. "Iceland". www.globalsecurity.org. Retrieved 25 February 2018.
- ^ "Iceland Defence Agency to close doors? - IceNews - Daily News". www.icenews.is. Retrieved 25 February 2018.
- ^ ""NATO flies with partners over Iceland for first time"". nato.int. Retrieved 25 February 2018.
추가 읽기
- 추위에서 들어온 오 화이트헤드, 더 앨리: 아이슬란드 외교정책 1946–1956, 국제문제연구센터 조사. 아이슬란드 대학교 출판부. 레이캬비크, 1998년
외부 링크
-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
- 아이슬란드 경찰이다.
- 아이슬란드 방공 시스템.
- 법무부와 교회.
- 외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