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마 앗마자
Kusumah Atmaja쿠스마 앗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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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대법원장 인도네시아 대법원 | |
재직중 1945년 8월 19일 ~ 1952년 8월 11일 | |
임명자 | 수카르노 |
선행자 | 사무실 설립 |
성공자 | 위르죠노 프로도디코로 |
개인내역 | |
태어난 | 술라이만 에펜디 쿠수마 앗마자 )8년 9월 8일 푸르와카르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
죽은 | 1952년 8월 1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53)
국적 | 인도네시아어 |
모교 | 레이든 대학교 |
직업 | 판사 |
수상 | 인도네시아의 영웅 |
술라이만 에펜디 쿠수마 아트마자(EVO: Soelaiman Effendi Koesoemah Atmadja, 1898년 9월 8일 ~ 1952년 8월 11일)는 인도네시아의 판사 겸 국민 영웅으로 1945년 8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푸르와카르타의 고귀한 민족-순다네 가문 출신이며, 1913년 렉츠스쿨로부터 법학 졸업장을 받았다. 1919년, 그는 반둥에서 법원 서기로 일하다가 레이든 대학에서 법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그 직장을 떠났다. 1922년 라이덴을 졸업한 뒤 동인도제로 돌아와 바타비아와 후에 인드라마유에서 판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그는 법정 관리로, 대법원장으로 스마랑과 파당의 법원에서 근무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1945년 3월 독립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독립선언에 이어 대법원 구성에도 역할을 했다. 1945년 8월 19일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대법원장으로서 7월 3일 사건에 연루된 장교들의 기소에 관여했고, 네덜란드-인도네시아 라운드 테이블 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법률고문을 지냈다. 1952년 8월 11일 자카르타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시신은 칼리바타 히어로즈 묘지에 매장되었다.
초년기
쿠스마 앗마자는 1898년 9월 8일 서자바 푸르와카르타 푸르와카르타 리젠시(Purwakarta Regency)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에 레흐트 호게 학교(문학적으로 '정의의 고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쿠스마 아트마드자는 1919년 궁중 서기로 경력을 시작해 부이텐조르그(현 보고르)에서 법정으로 차출되었다. 같은 해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법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았다.
1922년에 그는 공부를 마쳤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의 전쟁 법칙을 개략적으로 설명한 인디에의 드 모하메다안체 브롬 스티칭겐(De Mohamedaansche Vrome Stichtingen)이라는 논문으로 de rechtsgeerheid라는 칭호를 얻었다.
사법경력
쿠수마 아트마드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네시아로 돌아오자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의 라아드 반 저스티티(고등법원)에서 판사직을 제의받았고, 1년 만에 인드라마유에서 란드라드 보오르지터(지방법원장)로 임명됐다.[clarification needed]
그는 파당 고등법원 판사로, 세마랑에서는 랜드라드 보르지터, 그리고 같은 도시의 라드 판 저스티티 판사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가 네덜란드 동인도들을 점령하여 네덜란드인을 추방하자, 쿠수마 아트마드자는 궁정 관리로서 계속되었다. 1942년에는 세마랑에서 치후후인(지방법원) 의장을 지냈다. 또 1944년 중부 자바 지방 대법원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BPUPK 회원
아트마자는 1945년 4월 29일 독립준비위원회(BPUPK)의 회원이 되었다. 시신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일본인의 도움의 약속을 이용해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시대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아트마자는 1950년 인도네시아의 대법원을 설립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는 1950년부터 1952년 사망할 때까지 그것의 회장으로 일했다.
그는 네덜란드 국가로부터 1947년 네덜란드 꼭두각시 국가인 파순단 형성을 주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죽음
라덴 소엘라이만 코에소마 아타다자 에펜디 박사는 1952년 8월 11일 자카르타에서 사망하고 카레트 비바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인식
아트마드자는 대통령령 제124호/1965년에 의해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