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C. 스콰이어스

John C. Squires
존 C. 스콰이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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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1925-05-19)1925년 5월 19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죽은1944년 5월 23일 (1944-05-23) (199세)
이탈리아 안코나의 파딜리오네 근처
매장지
켄터키 주 루이빌의 재커리 테일러 국립묘지
얼리전스미국
서비스/지점미국 육군
근속년수1943–1944
순위병장
구성 단위30 보병 연대, 3 보병사단
전투/와이어제2차 세계 대전
수상메달 오브 아너
퍼플 하트
스콰이어스 동상이 등장하는 켄터키 메달 오브 아너 기념관

존 C. 스콰이어스(John C. Squires, 1925년 5월 19일 ~ 1944년 5월 23일)는 미 육군 군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행동으로 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스콰이어스는 1943년 7월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육군에 입대해 1944년 4월 23일까지 육군 3사단 30보병연대 A사에서 일병 1급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이날 이탈리아 파디글리오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 중 그는 적의 포화를 거듭 용감히 막아 메시지를 전하고 증원군을 불러들였으며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독일군과 싸웠다.스콰이어스는 병장으로 승진한 지 한 달 만에 전사했다.그는 1944년 10월 2일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의 사망으로 19세의 스퀴어스는 그의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의 재커리 테일러 국립묘지에 묻혔다.2001년, 켄터키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루이빌에서 헌납되었다.기념비에는 6피트 높이의 스콰이어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2]

명예훈장 표창

스콰이어스 중사의 공식 명예훈장 표창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의무의 위와 그 이상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눈에 띄는 용맹함과 용맹함을 위해서입니다.1944년 4월 23~24일 밤 이탈리아 파디글리오네 인근 스파카사시 크릭과 그 주변에서는 그의 회사의 공격이 시작되자, 소대 전령인 Pfc. 스콰이어스가 첫 공격행동에 참가하여 대전차 미의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 격렬한 포병, 박격포, 대전차포 사격을 가했다.선두 소대에 대한 ne 폭발스콰이어스 사령관은 가까이에서 터져 나온 포탄에도 불구하고 50야드 전진기지로 전진해 상황을 파악하고 새로운 전진기로를 정찰하고 소대장에게 사상자와 교대 경로를 알렸다.소대장에게 사상자와 대체경로를 알렸다.명령 없이 행동한 그는 스트래글러를 검거하고, 한 무리의 잃어버린 남자들을 분대로 편성하여 그들을 앞으로 이끌었다.소대가 스파카사시 크릭에 이르러 전초기지를 세우자, Pfc. 스콰이어스는 거의 모든 부사관들이 사상자라는 것을 알고, 적 기관총과 기계 피스톨, 그리고 개울을 뒤덮은 수류탄 불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로 8명을 배치했다.소대가 14명으로 줄었을 때 그는 두 번이나 증원군을 일으켰다.그는 매번 철조망을 뚫고 적의 지뢰밭을 가로질러 포병과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새벽 세 차례나 전초기지가 반격을 받았다.그때마다 Pfc.스퀴어스는 시들어가는 적의 자동사격과 주위로 쳐들어온 수류탄 등을 무시하고, 수백 발의 라이플,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발사하고, 독일산 스판다우 기관총 탄약을 적에게 포획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공격 진압에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다.이러한 싸움에 이어 전초기지의 남쪽 끝으로 50야드를 이동, 21명의 독일군을 개별 기관총 결투로 직격탄거리에서 교전시켜 21명의 적들이 모두 항복하고 스판다우 총 13발을 더 포획했다.독일군 장교 포로를 심문하여 이 무기의 기능을 알게 된 그는 포획된 총을 제자리에 놓고 다른 소대원들에게 작전을 지시하였다.다음 날 밤 독일군이 전초기지를 다시 공격했을 때, 그는 포획된 감자 마셰르 수류탄과 스판다우 총의 총으로 3명을 죽이고 더 많은 독일인들을 다치게 했다.Pfc. 스콰이어스는 후속작전으로 살해되었다.

참고 항목

메모들

  1. ^ 제2차 세계 육군 입대 기록
  2. ^ "Memorial honors Kentucky's heroes". August 200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11-20. Retrieved 2007-10-3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