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갤러거
Jimmy Gallagher개인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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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제임스 J. 갤러거 | |||||||||||||||
출생의 날짜. | 1901년 6월 7일 | |||||||||||||||
출생지 | 스코틀랜드 커킨틸로치 | |||||||||||||||
사망일자 | 1971년 10월 7일 | (70세)|||||||||||||||
사망장소 |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 |||||||||||||||
높이 | 5피트 10인치(1.78m) | |||||||||||||||
포지션 | , 미드필더 | |||||||||||||||
시니어 커리어* | ||||||||||||||||
몇 해 | 팀 | Apps | (Gls) | |||||||||||||
1919–1921 | 테보 요트 분지 | |||||||||||||||
1921–1923 | 제이앤피 코트 | 30 | (5) | |||||||||||||
1923 | 가을 강 마크맨 | 2 | (1) | |||||||||||||
1924 | 뉴욕 자이언츠 | 13 | (1) | |||||||||||||
1924–1925 | 플라이셔 실 | 14 | (0) | |||||||||||||
1925–1927 | 인디애나 플로어링 | 75 | (9) | |||||||||||||
1927–1930 | → 뉴욕 내셔널스 | 144 | (30) | |||||||||||||
1930–1932 | → 뉴욕 자이언츠 | 68 | (12) | |||||||||||||
1932–1933 | 뉴욕 필드 클럽 | |||||||||||||||
1933 | 몰타 유나이티드 | |||||||||||||||
1934– | 클리블랜드 슬라비아 | |||||||||||||||
– | 클리블랜드 그라파이트 브론 | |||||||||||||||
국가대표팀 | ||||||||||||||||
1928–1934 | 미국 | 5 | (1) | |||||||||||||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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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클럽의 등장과 골은 국내 리그에만 반영됨 |
제임스 J. "지미" 갤러거(James J. "Jimmy" Gallagher, 1901년 6월 7일 ~ 1971년 10월 7일)는 스코틀랜드의 미국 축구 우파 미드필더로 아메리칸 풋볼 리그에서 11시즌을 보냈다. 1930년 FIFA 월드컵과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미국 축구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갤러거는 1986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청춘
갤러거는 12살 때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했다. 17세 때 뉴욕 주립 리그의 테보 요트 분지 FC와 계약했다. 1920년 테보는 내셔널 챌린지컵 3라운드에서 브루클린 로빈스 드라이독에 패했다. 그러나 1920-1921년 리그와 리그 컵 우승을 차지했다.
직업 경력
1921년 갤러거와 팀 동료 앨버트 미첼은 새로 결성된 아메리칸사커리그(ASL)의 J&P 코트로 이적해 팀과 두 시즌을 보냈다. J&P 코츠는 1922-1923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1923년 내셔널 챌린지컵 준결승에서 패해 최종 우승자 패터슨 FC가 되었다.
1923년 갤러거는 폴 리버 마크맨과 함께 1923-1924시즌을 시작했지만 단 2경기 만에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1924년 여름, 그는 플라이셔 얀으로 이사했다. 한 시즌 후, 그는 뉴욕 시 지역에서 뛰었던 리그의 새로운 팀인 인디아나 플로링으로 이적했다. 1927년 찰스 스톤햄은 인디애나 플로어링을 사들여 팀명을 뉴욕 내셔널스로 바꿨다. 그 이름으로 세 시즌을 보낸 후, 스톤햄은 1930년에 다시 뉴욕 자이언츠로 바꾸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니커 '내셔널스'를 쓰면서 ASL 리그와 컵(루이스컵)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었다.
자이언츠로서, 그 팀은 1931-1932년 ASL 챔피언쉽에서 우승했다. 그 무렵 리그는 무너지고 있었다. 자이언츠는 접기 전 1932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갤러거는 뉴욕 필드 클럽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적어도 1933년 12월까지 롱아일랜드의 몰타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클리블랜드 슬라비아와 계약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1934년 월드컵 출전 명단에 슬라비아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적어도 1934년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어느 틈엔가 클리블랜드 그라피티 브론즈로 이적해 선수 생활을 마쳤다.
갤러거가 클리블랜드로 이적하기 위해 ASL을 떠났을 때, 그는 총 346개의 정규 및 포스트시즌 경기를 뛰었다. 이는 2006년 크리스 헨더슨이 그를 통과하기 전까지 미국 순위에서 세 번째였다.[1]
국가 및 올림픽 팀
갤러거는 미국 국가대표팀에서 5개의 모자를 얻었다. 그는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미국이 준결승에 진출함에 따라 3번의 미국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컵에 이어 브라질과도 친선경기를 펼쳤다. 그의 대표팀과의 마지막 경기는 1934년 5월 24일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93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28년 올림픽에서 미국에서 뛰었던 또 다른 지미 갤러거와 자주 혼동된다.
개인적인
1937년 갤러거는 마리 코울린과 결혼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리타 갤러거(Weber)와 캐롤 갤러거(Such)라는 두 딸을 낳았다. 그는 11명의 손자와 23명의 증손자가 있다.
갤러거는 1986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참고 항목
참조
- ^ "Archived copy". www.hofmag.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5 May 2007. Retrieved 13 January 2022.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