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계 캐나다인

Jamaican Canadians
자메이카계 캐나다인
자메이코캐나다인
총인구
309,485
캐나다 인구의 0.9%(2016년)[1]
모집단이 유의한 지역
토론토 지역, 온타리오 남부, 퀘벡, 알버타
언어들
캐나다 영어, 자메이카 파투아, 자메이카 영어, 캐나다 프랑스어
종교
기독교 · 라스타파리
관련 민족
흑인 캐나다인, 자메이카계 영국인, 자메이카계 미국인, 아프로자메이카인, 중국 자메이카인, 인도자메이카인, 자메이카의 독일인, 자메이카계 호주인

자메이카계 캐나다인자메이카계 캐나다인 또는 자메이카 태생의 캐나다 영주권자다. 캐나다의 201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309,485명이다.[1] 자메이카계 캐나다인들은 전체 흑인 캐나다 인구의 약 30%를 차지한다.[2][3]

역사

캐나다에 도착한 대부분의 자메이카인들은 토론토, 몬트리올, 오타와, 해밀턴인구조사 대도시 지역에 정착한다. 캐나다에 있는 자메이카인의 총수는 196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했고,[4] 오는 이유 또한 다르다. 현재 자메이카인들은 캐나다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다양한 직업들을 차지하고 있다.

오리진스

캐나다로 이주한 최초의 자메이카인은 뉴프랑스노바스코샤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소수민족으로 수입된 서인도 노예들이었다. 1796년 자메이카의 마룬들이 핼리팩스에 입성하여 영국령 북아메리카(The Canadian Bency, 2000년)에 진출한 첫 번째 대형 그룹이었다. 마룬스라는 이름은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자메이카의 유럽 정착촌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든 노예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795년 자메이카 섬에서 마룬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국인들이 마룬족을 속여 무기를 내려놓게 한 다음 그들을 노바스코샤로 망명시키면서 끝났다(제임스 & 워커, 1984년).

존 웬트워스 주지사는 핼리팩스 외곽에 500명이 넘는 마룬족을 정착시키고 시타델 요새화를 위해 병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자랑스럽게 서서 여전히 영국인에게 배신당한 기억을 붙잡고 있던 마룬족은 강력한 저항을 펼치며 순응하는 노바스코트의 정착민들이 되려 하지 않았다. 런던에 대한 수많은 호소 끝에 마룬 부부는 1800년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룬 바스티온"은 시타델 힐에 그들이 남긴 유산과 그들이 기여한 자부심의 한 예로서 서 있다(제임스 & 워커, 1984).

1800년과 1920년 사이에 소수의 서부 인디언들이 케이프 브레톤 광산의 노동자로서 자메이카에서 왔고 바베이도스에서 시드니나 노바스코샤의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데려왔다. 서인도 제도로부터의 이주는 1920년 이후 거의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 결과 1941년 서인도 인구는 20년 전보다 적었다. 서인도 제도에서의 이민에 대한 압력이 거세졌지만, 캐나다 정부는 더 이상 비-화이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제임스 & 워커, 1984).

1908년 보수당 대표 로버트 보든은 "보수당은 백인 캐나다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유권자들과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자유당 정부는 값싼 노동력을 위해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비(非)유족들을 배제한 이민을 통과시켰다(James & Walker, 1984).

캐나다 초대 총리 존 A씨의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 맥도날드. 맥도날드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오빠인 휴이트 버나드는 1864년 샬럿타운 회의의 녹음 비서였다. 연방 이후, 버나드는 1867년에서 1873년 사이에 수상의 개인 비서로 일했다.

미래의 자메이카 수상인 마이클 맨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캐나다 왕립 공군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비숙련 노동자에 대한 엄청난 요구는 1948년의 국가법을 초래했다. 이 법은 영국 식민지에서 온 값싼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서인도인들이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캐나다에 진출한 자메이카인들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 개인의 승진과 성공이 고무되는 듯한 세상에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흑인 서인도인들의 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1952년 월터법이 통과되어 그 나라에 입국하는 흑인 서인도인들에게 "엄청나게 제한된 할당량"을 부과하게 되었다(제임스 앤 워커, 1984).

1955년 캐나다는 서인도 제도(Anderson, 1993)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18세에서 35세 사이의 자격을 갖춘 흑인 여성들에게 건강, 가족관계, 그리고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의 최소 8급 교육을 허용했다. (제임스 & 워커, 1984년) 이 여성들은 가사도우미로 1년을 보낸 뒤 토지이민자 지위를 부여받고 5년 만에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원래 체계는 연간 100명의 여성만 허용했지만 1965년까지 2690명의 여성이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에서 캐나다로 입국했다. 1962년 캐나다 이민법에서 인종 차별이 제거되었고 캐나다로 이주한 자메이카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Lazar & Dauglas, 1992년).

1960년대 이후

이민법의 변경으로 인해 비-화이트들이 캐나다에 제한 없이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자메이카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더 나은 삶을 위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캐나다에 입국했다. 많은 인종 차별 이민 정책이 숙청된 후, 많은 자메이카인들이 관광객으로 캐나다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많은 자메이카인들이 나중에 독립적으로 상륙 이민자 지위를 신청할 것이다. (앤더슨, 1993) 1960년대 후반 캐나다 정부는 가족 통일 조항을 이민 정책에 도입하여 자메이카인들과 다른 단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캐나다로 데려오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앤더슨, 1993) 따라서 1970~80년대 캐나다에 진출한 많은 자메이카인들은 1955~65년 캐나다로 이주한 자메이카 여성들의 자녀와 남편이었다. 앤더슨(1993년)에 따르면, 캐나다로 이주한 카리브해 이민자들은 대도시에 정착할 가능성이 더 높았고, 그들이 선택한 주는 온타리오퀘벡이었다. 가장 많은 수의 자메이카 이민자들은 그레이터 토론토의 다음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스카버러, 올드 토론토, 노스 요크, 요크, 아약스, 피커링, 미시사우가, 그리고 브램튼. 그 밖의 도시로는 몬트리올, 오타와, 에드먼턴, 밴쿠버, 위니펙, 키치너, 워털루, 윈저, 핼리팩스(The Canadian Competitience, 2000년) 등이 있다.

1989년 자메이카 이민자의 86.7%, 퀘벡에 7.4%, 알버타에 2.6%, 매니토바에 1.7%, 브리티시 콜롬비아에 1.1%, 캐나다 나머지 지역에 0.6%가 정착했다. 그 해의 서인도 이민자 수는 자메이카인이 전체의 27.5%를 차지했다(앤더슨, 1993년). 언어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부분의 서인도 이민자들은 퀘벡과 반대로 온타리오에 정착한다.

인구통계학

인구이력
연도Pop.±%
1996188,770
2001211,725+12.2%
2006231,110+9.2%
2011256,915+11.2%
2016309,485+20.5%
출처:[5][2][6][7][1]

자메이카는 서인도인이 캐나다에서 허용된 이후 지금까지 서인도인이 캐나다로 이주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1974년과 1989년 사이에 캐나다로의 전체 서인도 이민의 35.7%가 자메이카에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초반에는 감소, 1986년에는 회복, 1989년에는 다시 감소하였다(앤더슨, 1993년). 캐나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자메이카인들은 1990년대 초 서인도 이민의 40%를 차지했다.

1996년 캐나다 이민국의 개요에서 자메이카는 캐나다로 이주하는 시민들의 수에서 8위에 올랐다. 자메이카는 캐나다로 이주하는 자메이카의 시민 숫자에서 중국, 파키스탄, 필리핀과 같은 나라들이 앞서 있다. 캐나다로 이민 온 자메이카인의 수는 1997년과 1998년에 다시 감소했다. 자메이카의 캐나다 이민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0년 캐나다 이민국에서 10위에 올랐다.

2006년에는 토론토 시에 79,850명의 자메이카계 캐나다인이 거주했으며, 토론토 교외 브램튼에 30,705명이 거주했다.[8][9]

미니스텔어펜서즈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1995년 퀘벡에는 7,345명의 자메이카인이 살고 있었다. 2011년까지 자메이카 인구는 거의 두 배가 되어 12,730명이 되었다.[10] 1960년과 1970년 사이 퀘벡의 이민자 중 28%가 자메이카인이었으며 1971년부터 1980년까지 41%로 대폭 증가했으며 1981년부터 1985년까지 12%로 대폭 감소했으며 1986년부터 1991년까지 20%로 증가했다.

1982년과 1985년 사이에 이런 감소의 한 가지 가능한 이유는 언어법 101호 때문일 것이다. 1977년 8월 26일 퀘벡 분리주의 정부가 도입한 빌 101은 영어 사용과 영어 학교 출입에 대한 보다 엄격한 제한을 도입했다. 프랑스어에만 국한되지 않는 상업적 간판을 제작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게 되었고 프랑스어를 직장 언어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오말리 & 보우만, 2001).

퀘벡에 거주하는 자메이카인의 전체 숫자 중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20%에 불과하고 86%가 기독교를 그들의 종교로 실천하고 있다. 인구의 1퍼센트는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고, 13퍼센트는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45퍼센트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25퍼센트는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16퍼센트는 대학교육을 받았다(Ministére des Affenders International, de L'L' Irangania et des Communautés Culturelles et la Ville de Montréal, 1995).

인구

200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231,110명의 캐나다인들이 그들 자신을 자메이카계 캐나다인이라고 밝혔다.[2]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블랙" "웨스트 인디안" 또는 "캐리빈"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메이카계 캐나다인들의 실제 숫자는 더 커야 한다.[2]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256,915명의 자메이카계 캐나다인이 집계되었는데, 이는 이전 인구 조사보다 11.2% 증가한 것이다.[5] 2016년 인구조사에서 총 309,485명의 인구가 20.[1]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물질문화

음식: 매콤하고 색깔이 화려한 혼합 요리로는 악어와 소금물고기, 쌀과 완두콩, 얼간 닭, 생선, 돼지고기, 말린 염소, 후추, 구운 참치, 바나나 프리터, 패티, 샐러드, 과일, 이국적인 디저트 등이 있다. 음료는 당근 주스, 생강 맥주, 거의 모든 종류의 과일 주스, 코코넛 워터, 소렐을 포함한다.

예술과 공예: 짚, 점토, 직물, 조개, 나무 그리고 반정밀 돌로 만든 작품들이 대부분의 자메이카 가정에서 전시되고 있다. 아프리카, 인도, 유럽, 아라왁 문화는 자메이카 예술과 공예에 영향을 미친다. 삶과 풍경을 묘사하는 자메이카 그림들은 밝은 색상과 대담한 선을 특징으로 한다. 더치(주철 냄비) 없이 완벽한 자메이카 부엌은 없다. 네덜란드는 크기가 다르며 "더치보다 검을수록 더 달콤하다"고 한다.

극장: 19세기 워드 극장에서부터 혁신적인 작은 극장과 킹스턴의 번창하는 연극 중심지까지, 자메이카 사람들은 다양한 연극과 같은 종류의 연극을 즐긴다. 연극은 자메이카의 다양한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스포츠게임: 국가적인 게임은 도미노에 뒤이어 루디라고 주장할 수 있다. 선택한 스포츠로는 크리켓, 축구(축구), 자전거 경주, 수상 스포츠, 경마, 래프팅, 육상 경기 등이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농구하키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메이카계 캐나다인 트리스탄 톰슨앤서니 베넷NBA에서 뛰고 국제 FIBA에서 캐나다를 대표하고 있으며, PK 서브반은 내슈빌 프레데터스에서 뛰고 있으며 캐나다의 동계 올림픽 팀에 선발되었다.

유명한 자메이카계 캐나다인

학문과 과학자들

활동가

운동선수와 스포츠피플

비즈니스맨

패션 인더

기자들

미디어, 필름 및 텔레비전

뮤지션

정치인과 공무원

작가 및 작가

참고 항목

참조

  1. ^ a b c d "Census Profile, 2016 Census – Canada". Statistics Canada. Retrieved 2018-08-13.
  2. ^ a b c d 민족 기원, 2006년을 카운트하면 캐나다, 지방 영토 - 20% 샘플 데이터, 캐나다 통계청(2006) 2008년 8월 11일 회수.
  3. ^ 가시적 소수집단, 2006년을 카운트해 캐나다, 지방 영토 - 20% 표본 데이터, 캐나다 통계청(2006년) 2011년 3월 19일에 검색됨
  4. ^ 캐나다의 흑인: 역사, 캐나다 사회 트렌드 (2004) 2008년 8월 11일에 회수되었다.
  5. ^ a b NHS 프로파일, 캐나다, 2011, 캐나다 통계청 2013년 12월 2일 회수
  6. ^ 캐나다의 민족 기원 - 2001년 인구 조사. 2013년 12월 6일 회수
  7. ^ 캐나다의 상위 25개 민족 기원 - 1996년 인구 조사. 2013년 12월 6일 회수
  8. ^ 인종적 기원, 2006년을 인구조사 부서의 카운트 - 20% 표본 데이터, 캐나다 통계청(2006) 2011년 3월 15일에 검색됨.
  9. ^ 인종적 기원, 2006년을 인구조사 부서의 카운트 - 20% 표본 데이터, 캐나다 통계청(2006) 2011년 3월 15일에 검색됨.
  10. ^ NHS 프로파일, 퀘벡, 2011, 캐나다 통계청(2011) 2014년 2월 5일에 검색됨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