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랄리 성
Jalali Castle잘랄리 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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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카산 | |
좌표 | 33°58′22″N 51°26′25″E / 33.9729°N 51.4404°E좌표: 33°58′22″N 51°26′25″E / 33.9729°N 51.4404°E |
유형 | 성 |
사이트 정보 | |
조건 | 폐허 |
사이트 기록 | |
빌드됨 | 11세기 |
작성자 | 마흐드 에딘 아불가셈 카샤니[1] |
자재 | 코브, 진흙 벽돌 |
역사
카샨 주변의 성벽은 원래 하룬 알 라시드의 아내인 조베데 카툰이 지었다. 그녀는 이슬람 국가들의 여러 도시에서 많은 발전적인 활동을 후원했다. 셀주키드 시대 초기에 말리크샤 1세는 성벽의 보수와 두 성의 강화를 명하고 잘랄리 성을 시의 서쪽에 건설하도록 하였다. 몇몇 역사적 문서에 따르면 그 당시 성 주변에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카샨 도시 주변의 성곽, 탑, 성벽은 수세기 동안 카샨의 사람들을 매우 잘 보호해 왔다. 예를 들어 1138년 말렉-셀주크는 3개월 동안 카샨을 실각시켰으나 카샨의 강력한 요새 때문에 카샨을 점령하지 못하고 이웃 마을들 중 일부만 파괴했다. 1198년 화라즈미드 사령관 미아제그는 카샨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벌였으나, 4개월 동안 무능하게 도시를 포위한 끝에 말렉 셀주크가 그랬던 것처럼 인근 마을만 약탈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탑과 성벽은 침략자들의 망고넬이 던진 돌과 화분 때문에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매번 파괴는 수리되었다. 사파비드 초기에는 무법자나 도적들이 성을 엄호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따라서 이스마일 1세는 성의 파괴를 명령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명령이 실행되지 않았고, 대신 몇 가지 개발 조치가 취해지고 성에 대한 수리가 행해져 더욱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상태가 되었다. 역사 문헌에 따르면 당시 성의 성벽은 두께 4m, 높이 6m의 성곽이었다.[2]
성벽의 난공불락의 결과는 사파비드 시대의 모하마드 칸 토르카만의 폭동이었는데, 모하마드 호다반다 시대에 당시 정부의 약점을 악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 강력한 피난처를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성의 엄호 아래, 12년 동안 카샨과 그 주변 마을들의 무방비 상태였던 무함마드 칸 토르카만은 악몽이었다. 토르카만의 사악함은 사파비드 집까지 이르렀고 아바스 1세의 어머니인 카이어 알 니사 베굼은 이스파한에서 토카만의 부하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 아바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즉시 반란을 진압하고 토르카만과 부하들을 살해했다. 폭동이 진압된 후, 아바스 1세 시대의 평화와 안정 때문에 사파비드 말기까지 성의 내부 구조물은 점차 파괴되었고 흙벽과 탑, 야크찰스만이 남아 있었다.[2]
성의 점진적인 파괴가 이 방어구조의 역사적 불행만은 아니었다. 아프간인들이 침공한 후 성을 심하게 훼손하였으나, 나데르 샤 시대에는 성을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2]
1778년 카샨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잘랄리 성의 탑과 성벽은 더욱 파괴되었으나 카림 칸의 명령에 의해 카샨 총독, 압돌라자그 칸에 의해 다시 성을 수리하고 두 개의 성문이 성의 다섯 문으로 추가되었다. 성 주위를 다시 파낸 해자는 아그하 모하마드 칸이 도시를 점령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2]
이 성의 마지막 전투는 나예프 호세인 칸 카시의 도적과 그의 아들들의 시대 페르시아 헌법 혁명 때였다.[2]
성의 가장 중요한 문은 돌랏문이었다. 바자회나 캐러밴서 같은 이웃 건물들 때문에 그것은 중요했다.[2]
그 도시의 현대적인 확장 때문에 이웃 건물들이 파괴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