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
Injong of Goryeo고려 인종 고려 인종 高麗 仁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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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자 | |||||||||
군림하다 | 1115–1122 | ||||||||
대관식 | 1115 | ||||||||
전임자 | 황태자왕우 | ||||||||
후계자 | 황태자 왕철 | ||||||||
고려의 왕 | |||||||||
군림하다 | 1122–1146 | ||||||||
대관식 | 1122 고려 개경 중광홀 | ||||||||
전임자 | 고려 예종 | ||||||||
후계자 | 고려 의종 | ||||||||
태어난 | 왕구 1109년 10월 29일 고려 순덕여왕의 마노, 개경왕후 | ||||||||
죽은 | 1146년 4월 10일 (36세) 고려 개경 보화궁 | ||||||||
매장 | 장릉 | ||||||||
배우자 | (m.1124; 데프 1126) (m.1125; 제1126장) (m. 1126 – 1146) (m. 1127 – 1146) | ||||||||
이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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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왕가 | ||||||||
아버지 | 고려 예종 | ||||||||
어머니 | 순덕여왕 |
한국이름 | |
한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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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인종 |
매쿠네-라이샤워 | 인종 |
출생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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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왕구, 후에 왕해 |
매쿠네-라이샤워 | 왕구, 후에 왕해 |
예의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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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로마자 표기법 | 인표 |
매쿠네-라이샤워 | 인표 |
사후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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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로마자 표기법 | 공효대왕 |
매쿠네-라이샤워 | 공효태왕 |
고려의 인종(仁宗, 1109년 10월 29일 ~ 1146년 4월 10일)은 한국 고려 왕조의 17대 군주였다. 예종과 순덕여왕의 장남으로 이자겸의 딸이었다. 그의 치세는 왕가(王家)를 거의 종식시킨 두 가지 내적 위기와 북송(北宋) 왕조의 몰락, 진(秦) 왕조(秦) 왕조(王朝)의 성립을 동아시아의 지배세력으로 보았다.
배경
국내
인종은 태조 10인방 중 3인에 따라 '최대의 합법적인 왕실 문제'로 왕위에 올랐다.[1] 이 문서의 목사 신분에도 불구하고,[2] 그 승계 규칙은 종종 무시되었다. 1095년 인종의 조부 숙종이 조카의 퇴위 후 정권을 잡았다. 열두 살 반의 나이에 외할아버지 이차겸의 영향으로 인종의 세습이 크게 가능해진 반면, 한안인파의 지원을 받은 인종의 고모부 포씨의 보고에 따르면 인종의 삼촌인 포씨는 "[왕위]에 대한 도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국제
1122년 초까지 거란의 리아오는 진의 타이즈 군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다. 수많은 거란인들이 고려로 피신했다.[4] 거란에 대항한 송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만리장성 이남의 잃어버린 송 영토는 주르헨이 요오를 이긴 후에야 되찾았다. 1123 조약은 진의 우월한 지위를 공식화하였는데, 송의 연간 헌사는 은 20만 타엘과 비단 20만 볼트로 정해져 있었다.[5] 송 정부는 거란에 대한 약진에도 불구하고 옌징(현대식 베이징) 회복의 중요성과 자체 군사력을 모두 과대평가했다.[6]
1122–1126: 이차겸의 해
1122–1123
인종 초년은 이차겸이 지배했다.[7][8] 사무국-찬설리(충서문하성) 통합 수장의 최고 재상(문하시중, 1급)으로서 이차겸은 최고위급 관직이었다.[9] 예종 말기에는 그의 지배에 도전하였으나, 손자의 재위 초기와 함께 이차겸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1122년 말에 포왕자와 혜왕자가 유배되고 한안인이 암살되고 탄주 한씨 일족과 청안임씨 일족 [10]등 그의 추종자 수백명이 추방되거나 좌천되었다.[3]
이 시기 동안 왕실의 장교들은 국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차겸은 그의 경력을 통해 무반 군관들을 양성했는데, 960년 이후에는 문반 군관들보다 신분이 낮고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우군 중 두 명은 군 출신 고위 문관 최홍재와 군 사령관 첨춘경이었다.[3][8][10]
이러한 권력 기반과 함께 이차겸은 고려 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인사부(이부)의 소장(교육감, 판사) 자리를 지키면서 3대 찬조(삼성)를 모두 관장하는 장차관급이 되었다. 그는 또한 공작(콩)이 되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반대파를 뿌리 뽑는데 있어서 다른 파벌들을 주의해야만 했다.
대외 관계에서 그는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이 이끄는 경주 김씨 일파와 제휴하여 새로이 설립된 진씨에의 복종을 주창하였다. 1123년 송씨가 다시 제안한 공식적인 집계는 거절당했다.[11] 진은 압록강변의 의주(포주) 지역을 점령하여 고려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는데,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국경 수비대의 정비였다. 발해의 불안이 진압된 후, 안전한 북동 변경으로 진은 송에 집중할 수 있었다.[12]
1124–1126
1124년 초 최홍재와 그와 관련된 군장교들이 이차겸을 타도할 음모를 꾸몄으나 성공하지 못했다.[3] 최씨와 측근들은 직책에서 숙청되어 유배되었다. 숙청 이후 이씨는 딸 중 한 명을 인종에게 시집보내고,[10] 점차 다섯 아들을 포함한 충신들로 중·고위 관직을 충원하였다.[9] 그와 그의 파벌은 숙청된 관리들의 재산을 압류하여 이득을 보았다.[8]
고려가 진 선생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저항을 받고 있었다. 1125년 진의 태종황제에게 파견된 대사관은 자신이 운반한 서신들이 황제에게 부적절하게 다루어 고려를 언급할 때 '서번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하들로부터 거부당했다. 북조의 위임장이 진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1126년까지 논의되었다. 결국 김씨와 이씨는 인종과 꺼려하는 신하들을 설득하여 진씨에게 복종하게 했다.[13][14] 송씨 일행이 진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있을 무렵, 희종황제는 퇴위했고, 고려 대사관(김부식 포함)은 카이펑에 닿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1126년에 보낸 진 대사관은 고려의 제출을 적당한 조건으로 제시하고 의주 문제를 꺼냈다. 타이종은 분쟁 지역을 고려로 옮겼다.[15]
이차겸은 왕위를 빼앗으려 했고 결국 왕을 독살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8]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시팔차, 즉 열여덟 아이의 아나그램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어 그의 궁정을 남도(서울)로 옮기게 될 것이라는 통속적인 예언이 있어 고려를 새로운 번영으로 이끌었다. 이차겸은 성씨와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있는 가족 좌석의 위치를 근거로 이 예언을 믿는다고 한다.[8] 이씨가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장하려는 시도는 공적인 기록의 문제다. 선조들의 무덤에서 제례음악을 공연하고, 왕의 기념일(인수절)으로 생일을 축하할 계획을 세웠다. 두 동작 모두 김부식과 그의 지지자들의 반대가 있었다.[16]
이차겸의 최고위직에 대한 보다 심각한 도전은 김찬과 안포린 두 궁사가 조직한 상승이었다. 이 음모는 25여 명의 젊은 궁정들의 개입을 넘어 인종의 신임을 얻고 정규군 사단장 1명과 정규군단장 2명(6명 중 2명)의 부사령관 1명을 포함한 3명의 고위 군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곤수 등 몇몇 원로 정치인들은 원칙적으로 이 음모를 승인하면서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그 그룹은 "1126년의 하룻밤"을 공격했다. 그 계획은 쿠데타의 첫 단계로서 궁과 왕의 인물을 장악하고, 그 후 다른 주요 목표물에 대한 파업이 뒤따르는 것을 포함했다. 공모자들은 궁궐을 점령하고 이차겸의 충신들 중 몇 명을 죽였는데, 그 중에는 전상(척춘경의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궁내에는 이차겸의 아들이 이끄는 촉춘경의 부대와 무장 승려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개성의 나머지 지역은 이씨 일파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서 있는 척춘경을 끝내기 위해 궁궐을 횃불에 태우라고 명령했다(이차겸의 불찬성은 그에게 보낸 대로 기록에 남아 있었다). 도서관과 아카데미 등 궁궐 대부분이 불탔다. "무인" 공모자들이 살해되었다. 인종은 이차겸에게 유리한 퇴위를 제의했으나 후자는 거절했다.[10]
다음 정부 개편에서 이차겸은 그의 충신들에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곤수는 사무국-장례에서 수석 자리를 지켰고, 김부식이 검열관이 되는 등 실제로 김 형제가 두 명 승진했다. 인종은 차겸의 집에 살고 있었고 또 다른 딸들과 결혼했었다.[10]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귀족 계파가 힘을 합쳐 이차겸을 끌어내렸다. 그들은 신성한 궁전을 침범한 책임 문제를 미끼로 삼아 척과 이 사이의 불화를 조장했다. 인종, 이곤수, 김부일의 연루는 공식 기록에 흔적을 남겼다.[10] 1126년 5월 이차겸(李車gye)에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이 척춘경( chun春經)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3] 이씨는 전라도로 추방되었다가 나중에 참수되었다.[8] 최홍재, 탄주 한족, 청안 임씨 일족 등 추방된 관리들은 소환되어 복직되었다. 1126년 6월에 인종은 임위네의 딸과 결혼했다. 척춘경은 1127년 강등되어 추방되었다.[3]
1127–1136: 개혁과 묘청의 반란
이차겸이 몰락한 후 정부는 경주 김씨와 한안인/청안임씨 일가에 의해 지배되었다. 특히 서경(서경, 현대 평양) 지역의 지방 성씨들은 이차겸을 쓰러뜨리는 데 중요했고, 결정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백수한, 유명한 시인이자 유학자 청치상, 승려이자 지리학자인 묘청 등이 이 파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묘청은 1127년 법원에 출두하여 1128년 정식으로 인종의 정치고문이 되었다.[9] 평양 집단은 왕이 기성 귀족들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1127년 묘청은 인종의 15점 복원 명세서(유신 치교)를 선동했다.[8] 여기에는 정치 개혁과 긴축 요구, 농민에 대한 공식적인 착취를 제한하는 조치들이 포함되었다.[9] 교육 개혁은 그 일괄안의 일부였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인종은 각 추(대구역)와 현(구역)에 학교를 설립(공무원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하여 지방 엘리트들의 중앙행정직 진출을 촉진하도록 지시했다.[18] 인종은 국립중앙아카데미에 '6개 대학'을 설립하여 관학 제도의 재건을 완료하였다.[19]
묘청은 신성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듣는 사람을 쉽게 현혹시켰다"[3]는 연사였다. 그의 가르침은 백성들과 왕을 포함한 일부 엘리트들에게 점점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평양파는 경주 김씨와 한안인/천안임씨 집단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지지자들로는 현재 검열단의 원로인 한안인파의 오랜 적인 최홍재와 유명한 장군 윤관의 아들인 윤오니, 영향력 있는 유학자이자 청치상의 측근이 있었다.[3][17] 실제로 1133년 6명의 문책성 고위관료 중 2명은 묘청의 지지자였고 2명만이 줄기차게 반대했다.[3]
묘청은 최근 개성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 지리학적인 설명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는데, 동수도 주변의 지리적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으므로 법원은 같은 세력이 강하고 "활기가 넘치는" 서부 수도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20] 이러한 사상은, 그들의 강압성은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했다. 태조의 10대 군사들은 지형학적 고려를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고, 서도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인종의 칙령인 1129는 평양에 "우리 정치를 부흥시키고 [...] 다음 세대에 영원히 중죄할 수 있도록" 개화궁(태화궁)을 건립할 것을 명했다. 궁전은 1132년에 완성되었고 인종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17]
대외 관계에서 인종의 정부에서는 진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독립과 무역 이익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127년까지 송수익은 쓰러졌다.[5][6] 주르첸군은 가이펑을 정복했고, 두 명의 후이종은 현재 퇴위했으며, 군림하던 진종황제는 포로로 잡혀 만주로 유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사신은 고려 관리들을 설득하여 육로를 통해 진나라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사로잡힌 황제의 석방을 협상하려고 하였다. 이 요청은 김부식과 그의 형 김부일의 주장으로 거부되었고, 다른 소식통들은 최홍재가 송을 보좌하는 데 찬성하거나 반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몇 년간 송씨와의 관계는 사실상 깨졌는데, 1129년 인종의 대사관 파견 요청은 거부되었고, 1132년 파견된 대사관은 난파되었다.[21]
고려는 전통적으로 국내의 열강과 대립하는 주르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11세기 전반 20년 동안 6,846명의 주르첸 난민이 개성에 등록되었는데, 이는 이전 100년 동안 (그리고 1081년에서 1100년 동안 17명밖에 안 되는) 2십팔년에 걸친 평균 526명과 비교된다.[22] 이러한 정책은 고려에 두 번(1127년과 1130년) 주르첸 난민의 존재를 이용하여 형식적으로 복종하도록 압력을 가했더라도 인종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23]
평양파는 더 자연주의적이고 반주르첸적인 접근을 대표했다. 묘청은 서궁(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 진씨 등 36개 주가 경의를 표할 정도로 고려가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종이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자신의 연호를 제정하고, '아로간트 진'을 공격하라고 촉구했다.[20] 청치상과 윤오니가 인종에게 이런 취지의 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24] 인종의 우유부단함에 힘입어 계파간의 불안한 평형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개혁률에 실망하고, 진 선생에 대한 불충분한 단호한 입장, 그리고 일부 지지자들의 숙청으로 놀란 묘청은 113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서부 수도에서 반란군은 새로운 태위 주를 선포했다. 반군은 북서쪽에서 열렬히 지원받았으나 개성 묘청 지지자 대부분이 그를 버렸다.[20] 묘청이 실제로 반란의 주동자였거나 단지 그 인물의 우두머리였던 것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17]
임위내(任衛內)는 반란 소식에 군대를 동원하여 개성을 지켰다.[3] 묘청 관련 관리들이 기소되었는데, 1135년에서 1136년 사이에 청치상 같은 관리들이 처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다. 반란군과의 교섭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군사 원조의 제의는 진과 남송 양쪽에서 오자 상황은 특히 위협적이 되었다. 결국 김부식은 반란군에 대한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이끌었다. 묘청은 자군에 의해 암살되었고, 1136년 초 평양은 정부군에 함락되었다.[17][20] 윤오니는 반란군에 대항하여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여전히 청치상의 측근으로 김부식에 의해 추방되었다.
1137–1146
묘청 반란의 진압에서부터 1142년 관직 은퇴까지 김부식은 고려 정부의 무책의 지도자였다. 1140년부터 묘청의 추방된 지지자들은 다시 소환되기 시작했다. 11세기 초까지 남송과 진의 대립은 1141년에서 1142년 사이의 협상 동안에 공식화된 균형에 도달했다. 남송황제는 진의 시종황제의 수저성을 인정하여 매년 25만 볼트의 명주와 은의 태를 바쳤다.[5] 고려는 진나라와 여러 대사관을 교환하고, 1142년 인종이 정식으로 그 신하로 투입되었다.[25]
1143년 인종은 14명의 지방 치안 판사를 임명하여 지방 행정을 중앙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예종과 인종의 개혁으로 고려 450여 개 현·군의 약 3분의 1이 중앙정부의 직할을 받게 되었다.[9]
1142년 인종은 삼국사기와 통일신라 사건의 연대기인 삼국사기 편찬을 명하였다. 중국사(특히 사마천의 시지)를 이용해 14명의 저자 팀장의 김부식은 한국사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들을 편찬했다. 1145년 말이나 1146년 초에 인종에게 제출되었다.[26]
계승
인종과 임부인(공예왕후)은 모두 장남 현 왕자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둘 다 그의 통치 능력을 의심했고 공예왕후는 둘째 아들 경 왕자를 다음 왕으로 추대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이 죽자 현세자가 그의 뒤를 이어 고려 18대 군주가 되었다.
가족
- 폐위된 인천이씨 연덕공주(폐德公主, 폐德公主, d. 1139) – 문제없다.
- 폐위된 인천이씨 복창공주( princess –폐公主, d. 1195) – 문제 없음.
- 장흥 임씨 가문의 공예왕후(公禮王后, 1109–1183)
- 황태자 왕현(王賢)
- 왕경, 마퀘스 대령 (왕경大yeong)
- 왕호, 익양공(왕陽公)
- 왕충희(王忠熙)
- 왕탁, 평량공(平陽公)
- 승경공주(승경공주)
- 덕녕공주(덕령공주)
- 창락공주(長樂公主)
- 영화공주(永華公主, 주)
- 김 씨 일가의 선평왕후(先平王后, 後平王后, d. 1179) – 문제 없음.
대중문화
참고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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