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가문
House of Saul사울 가문은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였다. 그것은 설립자인 사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성서적 서술
이 왕조의 주요 출처는 사무엘 서적이며, 연대기에 증인이 추가되어 있다. 사울-데이비드 서사는 사무엘의 첫 번째 책과 사무엘의 두 번째 책의 첫 번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설화는 사울과 사무엘의 잃어버린 엉덩이 이야기와 만남(1 사무엘 9:1–10:16)으로 시작하여 가라앉은 민족과 왕들의 목록(2 사무엘 8:1–15)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의 몇몇 부분이 나중에 추가된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서사의 주요 목적은 사울에서 다윗에게로 반역자적 임페리우스(라틴어로 "통치를 이양하는 것")를 통해 다윗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것이다.[1]
그 서술은 다윗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대해 세 가지 주장을 한다. 첫째는 이 권력 이양이 신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사울이 왕으로서 실패했기 때문에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셋째는 다윗 자신이 왕위에 오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설화에서는 사울을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 다윗을 유다 지파의 대표로 내세우며,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라는 두 사람이 세운 왕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
두 왕조 사이의 경쟁은 서술의 어떤 구절을 통해 암시된다. 사무엘 1장, 20장 16절에는 요나단과 다윗 가문의 언약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무엘 1:24:20–21년에 사울 자신은 다윗의 손을 통해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이스라엘 왕국의 수립을 예언한다. 사울은 다윗에게 사울의 자손도 없애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사울의 이름을 `나의 아버지 집'에서 지워 버리지는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1 사무엘 25장 28절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야훼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근거와 함께 '안정된 집'을 세울 것이 확실해 보인다. 2 사무엘 3:1에서 두 왕조는 다윗 가문이 강해지고 사울 가문이 약해지는 등 긴 전쟁의 라이벌로 보도되고 있다. [1]
이스라엘 사람이나 후하디트 지도자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경적 서술은 이뿐만이 아니다. 《판사록》에서 바락이 시세라를, 에후드가 에글론을, 기디언이 오렙과 지브를 꺾는다. [왕실록]에서 유다의 아사(Asa)가 이스라엘의 바아사를 물리친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의 서술은 사울-데이빗의 서술보다 훨씬 짧다. 이 서사가 강조된 이유는 그것이 의도된 청중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단순한 전투에서의 승리나 국가의 수립보다 중요한 것은 관중이 살고 있는 왕국의 토대를 묘사했기 때문이다.[1]
이 서사는 다윗과 그의 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사울 가문의 위임을 통해 이를 성취한다. 이 설화의 말뚝은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왕이 다윗 가문의 출신인지, 사울의 가문 출신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두 왕조의 경쟁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무엘 1명, 22:7분, 사울은 그의 베냐민 친족들의 충성을 호소한다. 다른 곳에서는 다윗이 유다 지파의 충성에 의지하고 있다. [1]
또 다른 성서적 서술은 2명의 사무엘 9~20명, 1명의 킹 1-2명을 다룬 이른바 '법정사' 또는 '계승서사'이다. 거기에서 시므이 벤 게라는 다윗이 사울 가문을 살해했다고 비난한다. 사무엘 2장 16장 5절에서는 시므이가 사울과 같은 종족 출신의 베냐민 사람으로 묘사되고, 사무엘 2장 19장 21절에서는 시므이가 요셉 지파 가운데 처음으로 묘사된다. 사무엘 2:20:1에서 베냐민 지파 비취리의 아들 세바가 다윗 가문에 대하여 반란을 선포한다. 두 경우 모두 두 베냐민 지파가 다윗에 대항하여 분쟁을 선동하고 있으며, 두 경우 모두 베냐민 지파가 다윗 가문과 유다 지파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두 왕조가 이스라엘의 왕권을 놓고 경쟁하는 동안, 유다의 왕권은 별개고 다윗 가문에 속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무엘 2장 5장 5절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 수도 헤브론에서 유다를 7년 6개월 동안 다스렸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아브넬은 사무엘 3장 10절에서 다윗의 왕위를 이스라엘과 유다 양국에 세우려는 의도를 밝히고 있다. [1]
사울-다비드 서술은 다윗 가문이 불법적인 행위, 즉 강제 추방이나 폭력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왕위를 얻는 모습을 그린다. 대신에 그것은 사울이 "억울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목적은 유다 사람과 베냐민 사람 모두를 청중에게 납득시키는 것 같다. 두 부족의 관계가 불확실한 시대에 원문이 구성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1]
군림하다
사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사이에 각각 사울 가문과 다윗 가문으로 대표되는 유혈 내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끝에 사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스바알(이스보셋)이 암살되었다. 이스라엘 북부는 헤브론 성읍에 있는 다윗에게 대표를 보내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았다. 이스바알의 치세와 죽음은 2개의 사무엘에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기에 완전히 빠져 있다. [2]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한 사울의 사위였다. 사울이 모두 죽을 경우에 대비하여 다윗은 미갈과의 혼인을 통해 사울의 유산을 주장할 기회가 있었다. 이는 유리한 결혼을 통해 자신의 권력 주장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질러는 데이빗과 마이클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 결혼에서 나온 아이들에 대한 기록은 없다.[2]
사울의 족보(크로니클 9~10년)에는 아들 요나단, 말치슈아, 아비나답, 에스바알이 언급되어 있다. 족보는 조나단의 아들 메리바알(메비보셋)과 함께 계속된다. David은 이 계보의 일부로 언급되지 않았다. [2] 이어 계보에는 메리바알의 아들 미가와 미가의 후손이 언급된다. [2]
참고 항목
참조
원천
- Knoppers, Gary N. (2006), "Israel's First King and "the Kingdom of YHWH in the hands of the sons of David":The Place of the Saulide Monarchy in the Chronicler's Historiography", in Ehrlich, Carl S.; White, Marsha C. (eds.), Saul in Story and Tradition, Mohr Siebeck, ISBN 978-3161485695
- Oswald, Wolfgang (2020), "Possible Historical Settings of the Saul-David Narrative", in Krause, Joachim J.; Sergi, Omer; Weingart, Kristin (eds.), Saul, Benjamin, and the Emergence of Monarchy in Israel: Biblical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SBL Press, ISBN 978-0884144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