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
Gogukcheon of Goguryeo고국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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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로마자 표기법 | 고국천왕 구강왕 |
매쿠네-라이샤워 | 국양왕 고국천왕 |
출생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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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로마자 표기법 | 고남무 |
매쿠네-라이샤워 | 고남무 |
한국의 군주 |
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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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국천왕(高國天王, 197년, r. 179~197년)[1]은 삼국 중 하나인 고구려의 제9대 군주였다.
가족
- 아버지:신대왕
- 어머니: 알 수 없음
- 배우자: 우씨 가문의 우왕후 –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다음 왕이 될 고구려의 동생 산상과 결혼했다.
배경과 군림
고국천은 고구려의 8대 왕 신대의 둘째 아들이다.[2] 그의 형인 고발기(고려기)는 원래 왕세자였지만, 궁중 관리들은 176년에 왕세자가 된 고국천을 지지했다.
However, this record is an error caused by Kim Busik's erroneous quotation of 《Tongdian》, who thought that I-imo was the same person as King Gogukcheon, and the established theory in the Korean history academia is that King Gogukcheon's older brother Gobalgi[拔奇] and King Sansang's older brother Gobalgi[發岐] are the same person. 그리고 한국사학계에서는 고국천왕이 신대왕의 차남이 아니라 신대왕의 차남으로 추정되고 있다.[3]
180년 고국천은 제나부 우소의 딸인 레이디 우와 결혼하여 중앙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4] 우여인은 고국천의 형과 그 뒤를 이은 산상왕과의 결혼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도 왕비로 남아 있었다.[4] 그의 재위 기간 동안 5개의 '부' 즉, 강력한 지역 성씨들의 이름이 중앙 왕국의 지명이 되고, 특히 191년에 귀족들의 반란이 진압되었다.[2]
184년 고국천은 동생 계수 왕자를 보내 랴오둥 총독의 중국 한나라 침략군과 싸웠다.[5] 계수대군이 군사를 저지할 수 있었지만, 이후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184년 한군을 격퇴하였다. 191년 고국천왕은 공로 선정을 위한 공로제도를 채택하였다.[2] 그 결과 그는 고구려 전역에서 많은 인재를 발견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총리로 추대된 을파소였다.[2][6]
삼국사기는 1944년 어느 날 고국천이 사냥을 나갔다가 굶주린 마을을 만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옷과 음식의 일부를 마을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주었고, 자기 민족의 굶주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꼈다.[7] 고국천은 그의 왕국에서 농민과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진대법은 1944년 고국천에서 제정한 곡물대부제도다.[2][8] 이 제도는 사람들이 3월부터 7월까지 곡물을 빌려서 10월에 갚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는 조선 시대까지 천 년 이상 보존된 법이라는 '황옥'으로 유지되었다.[2]
죽음과 계승
고국천 승천은 영장류에 의한 형제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의 변화를 예고했지만,[9] 형 산상의 뒤를 이었다. 고국천의 시호는 그의 묘지인 고국천원(高國天院)에서 따온 것이다.[10]
참고 항목
참조
- ^ "Samguk Sagi". Korean History Data Base. Kim Bu-si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4 October 2015. Retrieved 29 January 2016.
- ^ a b c d e f "King Gogukcheon". KBS Radio. KBS. Retrieved 29 January 2016.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국천왕 원년 Refer to footnote 3 to 5.
- ^ a b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년 한국사, 이화여자사. ISBN 8973007726, 페이지 122-123
- ^ "계수" (in Korean). Doopedia. Retrieved 2016-03-07.
- ^ Kim Bu-sik, 《Samguk Sagi》, 〈髙句麗本紀 第四〉: 十三年, 夏四月, 聚衆攻王都. 王徴幾校勘 013内兵馬平之, 遂下令日校勘 014, “近者官以寵授, 位非徳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汝四部, 各舉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舉東部晏留. 王徴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叅大政. 西鴨渌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丗校勘 015,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㮨校勘 016生民之福也. 請安承教,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髙官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閒舊, 疾之. 王有教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隠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教, 慎賞罰, 人民以安, 内外無事.
- ^ 전호태, 〈고구려, 한국 권력&자랑의 원조〉, 2007년 동아카역사재단. ISBN 8991448836 페이지 13
- ^ Snodgrass, Mary Ellen (2015). World Clothing and Fashion: An Encyclopedia of History, Culture, and Social Influence. Routledge. ISBN 978-1317451662. Retrieved 29 January 2016.
- ^ Yang, S. C. (1999). The South and North Korean political systems: A comparative analysis. Seoul: Hollym. p. 15. ISBN 1-56591-105-9.
- ^ Kim Bu-sik, 《Samguk Sagi》, 〈髙句麗本紀 第四〉: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