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스탈라 공국
Duchy of Guastalla과스탈라 공국 두카토 디 과스탈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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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1748 | |||||||||
상황 | 공국 | ||||||||
자본의 | 과스타라 | ||||||||
공통 언어 | 이탈리아의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정부 | 공국 | ||||||||
공작 | |||||||||
• 1621–1630 | 페란테 2세 곤차가 (최초) | ||||||||
• 1729–1746 | 주세페 곤차가(마지막) | ||||||||
역사 | |||||||||
1621년 7월 2일 | |||||||||
1748년 10월 18일 | |||||||||
통화 | 과스타라 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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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부 | 이탈리아 |
과스탈라 공국은 1621년에서 1748년 사이에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국가였다.그것은 모데나와 레지오 공국과 북쪽은 만토바 공국의 반대편 둑에 있는 포 강에 접해 있었다.
역사
1621년 7월 2일,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과스탈라 백국을 공국으로 승격시켰다.페란테 2세 곤차가는 훗날 만토바 공국을 계승하기를 바라며 도시의 첫 번째 공작이 되었다.페란테 2세는 1630년에 역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체사레 2세가 뒤를 이었다.그와 함께, 과스탈라는 만토바가 소유할 때까지 도솔로, 루자라, 레지올로의 영토를 합병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1632년, 그의 아들 페란테 3세가 왕위에 올랐다.남자 후계자가 없었던 그는 딸의 남편인 만토바 공작 페르디난드 샤를에게 과스탈라 공국을 물려주었다.
한편, 과스탈라는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잦은 전쟁으로 인해 방어를 현대화했다.1689년과 1690년 사이에, 도시는 스페인군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스페인군은 방어벽을 허물었고, 그래서 도시를 점령했고, 비스콘티 성과 도시 탑을 파괴했다.
1692년, 과스탈라 공작은 중죄로 기소되었고, 레오폴드 1세는 빈센초 곤차가에게 과스탈라와 그 영토를 주었다.그의 통치 기간인 1702년 루이 14세의 프랑스군과 사보이 왕자의 외젠이 이끄는 제국군 사이에 루자라의 영토에서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과스탈라는 스스로 공격을 받았다.그 도시는 영웅적인 방어를 펼쳤지만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1714년, 안토니오 페르디난도 곤차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국을 물려받았으나, 정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그는 1729년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죽었다.도시의 마지막 공작인 그의 형 주세페 곤차가가 1734년에 권력을 잡았고 소위 과스탈라 전투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군의 점령을 목격했다.나중에, 그 도시는 1738년까지 사보이의 샤를 에마누엘레 3세에게 팔렸다.주세페 곤차가는 1746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과스탈라 공국은 1747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정부 하에 오스트리아 롬바르디아에 합병되었다.
Ax-la-Chapelle 조약 (1748년)으로 과스타라는 스페인 부르봉이 통치하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에 합병되었다.1802년 치살피나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나 1806년 자치공국이 되었다.1815년에 파르마 공국으로 반환되었고, 파르마의 통치하에 1847년까지 남아있었다.1847년 파르마, 피아첸차, 과스탈라 공작부인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면서 공국은 모데나 공국으로 넘어갔고 후에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으로 넘어갔다.
영역
과스탈라 공국의 최대로, 곤차가 가문은 또한 보졸로 공국과 부속 영토(리바로 만토바노, 산 마르티노 달라르기네, 퐁포네스코, 콤메사지오, 오스티아노, 이솔라 도바레세, 사베타 공국)를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