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고

Drogo of Metz
드로고
Meister des Drogo-Sakramentars 001.jpg
드로고의 성찬식에서 처음 T를 장식했다.
태어난801년 6월 17일
독일 아헨
죽은855년 12월 8일(855-12-08) (54세)
독일 부르고뉴의 히메리아쿰에 있는 오이뇽 강
아버지샤를마뉴
어머니레지나

드룩스 또는 드로곤이라고도 알려진 드로고(Drogo, 801년 6월 17일 ~ 855년 12월 8일)는 후궁 레지나에 의해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의 사생아였다.

어린 시절과 가족

드로고는 801년 6월 17일 가울의 아헨에서 태어났다. 안날레스 위스앙상부르겐스는 드로고의 탄생을 "802 aut 803 15 Kal Iul"로 기록하고 있다.

아헨은 가울의 북동쪽에 위치한 카롤링거 제국의 겨울 궁전으로 작센 땅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 독일 노르드라인-웨스트팔렌에 있다.

아인하드는 자신의 첩 '레기남'에 의해 샤를마뉴의 아들로 "드로고넴 엣 후금"을 명명했다. 드로고의 어머니 레지나는 그에게 자식을 낳지 않은 알레만 부인이 죽은 후 800년 샤를마뉴가 데려간 네 명의 후궁 중 한 명이었다.

드로고는 (아버지인 샤를마뉴를 통해) 이복 형제와 자매가 많았지만, 어린 동생 (802–844)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와 그의 동생 휴, 그리고 그들의 이복동생 티에리는 아버지가 죽은 후 이복동생 루이 1세(루이스 1세)의 궁전에서 자랐다.

아인하르트 차터스 전집에는 815년 루이스가 쓴 글 하나가 있는데, 이 글에서 그는 메인 강둑에 위치한 마을(물린하임, 후일 셀리겐슈타트)을 아인하르트 부부에게 부여한다. 이 재산은 한때 드로고 백작의 소유였다. 이 사람은 비록 815년에 불과 14세였지만 샤를마뉴의 아들 드로고로 확인될 수 있었다.

드로고의 동생 휴는 서품을 받고 샤루, 세인트 쿠엔틴, 로베레스, 세인트 베르탱, 노아유의 주모자로 활약했다. 이후 834년부터 840년까지 푸아우스 루이 왕에게 대장을 맡았고, 폰테노이 전투 이후 841년 대머리 샤를르(푸아우스 왕 루이 왕자의 아들)에게 대장이 되었다. 휴는 844년 6월 앙굴렘에서 전투에서 전사했다. 안날레스 풀덴스는 "후고 압바스, 파트루우스 카롤리 외 리보토 압바스, 하반 퀘이퍼"가 '피피피니'가 프랑크 왕 대머리 샤를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에서 '844 VII 이드 준'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보다 오래 사는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한 명으로서, 드로고의 정치력에 대한 전망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샤를마뉴의 큰 아들 한 명만이 남았고, 그의 몇 안 되는 적수가 진정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경력

드로고 성찬식

814년 루이 14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왕실에서 쫓겨난 드로고와 휴는 강제적으로 보험에 가입되어 "수도원에 무료 감금"되었다.

드로고는 818년에 성직자가 되었고 820년에는 룩수일의 대장이 되었다.

822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루이는 교황 파스찰 1세 이전에 아르덴의 부르지에 근처 아티니 궁전에서 (이탈리아의 베르나르의 죽음과 다른 문제들을 일으킨 것에 대해) 참회, 그리고 그의 세 아들과 루이스의 화해를 위해 소집된 왕국의 교회와 귀족 협의회를 수행했다. 또 823년 메츠의 주교로 곧 설치한 세 동생 드로고(이전의 주교는 메츠의 곤둘푸스, 819년~822년), 곧 세인트쿠엔틴의 아봇을 만든 휴고, 테오도리아도 참석했다.

드로고는 법정에서 덜 중요해졌고 829년까지 법정 수치로서 그는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고 830년대까지 다시 선수가 되지 못했다.

830년대 내내 푸어스는 그의 아들들의 반란과 여러 가지 카운트, 둑들, 약탈자들, 주교들, 대주교들 때문에 바빴다. 이때는 충성심과 맹세가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으므로 드로고의 루이 비오스에 대한 충성심이 크게 높이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루이는 833–834년에 임시로 증착한 후 835년에 메츠에서 황제로 재설치되었다. 드로고는 루이 14세의 말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1] 천문학자에 따르면 드로고는 푸어스의 일일 고백자였다.[2] 마침내 루이에게 반항적인 아들들을 용서하라고 설득한 것은 드로고였다.[2] 드로고는 844년 메츠의 대주교가 되어 평생 동안 이 자리에 머물렀다.[3]

드로고는 푸어스의 임종 때 루이까또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루이는 임종 때 드로고에게 왕실 섭정(왕조와 검)을 아들 로타르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여 권력의 이양을 가리켰다. 드로고는 그의 유해를 맡아 자신이 죽은 라인 강에 있는 섬에서 운반하게 했다. 안날레스 풀덴스는 "드루고넴 아르키카펠룸 et Adalbertum comitem"(아치 샤플랭 드로고와 아달버트 백작)을 840년 라인 강 동쪽 둑으로 보내어 드로고가 장례식을 주관한 메츠로 시신을 가져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루이스의 세풀크레 성당. 메츠의 아르눌프는 종종 가족 전통의 대표자로 여겨져 왔다. 오스트라시아의 궁전의 시장메츠의 아르눌프는 카롤링가(아눌플링스)의 시조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메츠의 생아눌프는 주로 카롤링거 가문의 여성들을 위한 매장지였다. 피오스의 루이 왕 이전이나 그 이후, 카롤링거 왕도 그곳에 묻히지 않았다. 대신 이 부스러기를 카롤링거 가문의 요람으로 삼아 자신의 도시 메츠를 격상하려는 드로고 대주교의 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수호성인이 가문의 조상이었던 생아르눌을 캐롤링가들의 왕실 묘지로 세우고 싶어했을 것이다(출처 목록에는 K.U. Jaschke, Die Karolingergenergenalogien aus Metz 참조).

844년 세르기우스 2세가 교황 세르지우스 2세로 선출되자 로타르 황제는 최근 주교에서 메츠의 대주교로 키워진 드로고와 함께 아들 루이스를 로마로 보냈다. 세르기우스는 드로고를 프랑크 영토인 프랑스와 독일의 사도교로 임명했다. 드로고는 프랑스에서도 교황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의 비카르를 지냈다.

844년 10월, 피우스 왕 루이(로타르 형제, 독일인 루이 왕, 대머리 샤를르)의 세 아들이 티온빌에서 만나 왕국의 세 부분을 평화롭게 단결시키려 했다. 드로고는 집회를 주재하고 로타르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그 시도가 향후 행동에 회부되어 결국 드로고가 사회를 맡지 못하게 되면서, 집회에 대한 그의 통제는 수포로 돌아갔다.

드로고는 제3차 남북전쟁 때인 839-40년 루이 왕과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루이 왕을 지지했다. 일단 루이스가 죽자, 그는 로타르를 지지하다가 841년 샤를를 지지하기 위해 편을 바꾸었다가 다시 로타르를 지지하기 위해 바꾸었다.

드로고는 그의 이복동생인 푸우스 루이에게 매우 충성을 다했고 그의 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드로고는 또한 9세기에 예술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루이 사후 그의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844년 유일한 형 휴의 죽음 이후 그의 영향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딴 드로고 새크라멘타리의 생산을 간신히 보장해 주었다. 드로고 새크라멘타리는 메츠의 주교로 개인적인 용도로 845–855년경에 쓰여지고 그려졌다. 베일에 싸여 있는 이 원고는 황실에서 고용한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다. 성찬식은 메츠의 카롤링거 대성당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며 당시의 소송 관행과 소송에서 사용된 악보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구성한다. 이 원고는 카롤링거의 서적 조명의 기념비 중 하나로, 드로고가 주례 사제로서 한 해 동안 말했을 모든 기도를 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되었고 프랑스 비블리오테크 국립박물관의 보물 중 하나가 되었다.

메츠는 중요한 주교였다. 대머리 샤를르는 바실리카에 왕관을 썼고, 드로고와 루이 비오스가 그곳에 묻혔다. 843년 메츠는 로트하링기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곳에서 여러 식단과 의회가 열렸다. 드로고의 지위는 그가 9세기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메츠에 있는 자신의 성당을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있어서 캐롤링거 미술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장식했다. 852년에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유물을 번역했다. Metz의 Celeste (Metz의 클레멘트 참조)와 Marmoutier의 Clement of Metz의 그것들 (출처 목록에서 Abbé Petin, Tercher hagiographique 참조)

안날레스 베르티니아니에는 특히 흥미로운 항목이 있다: 안노 839 "Dominicae nativitatis festum hillieter, Drogan fratre suo et Metensis urbis piscopo descipe susceptus, eadem caelebravit" ["그(루이 더 푸아우스)는 메츠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축하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 도시의 주교인 동생 드로고로부터 멋지게 영접을 받았다."]

죽음

드로고는 855년 12월 8일, 부르고뉴의 히메리악움에서 오이뇽 강에 빠진 후 낚시를 하다가 사망했다. 그는 성 수도원 교회에서 교회를 하고 있다. 메츠의 아르눌프. 메츠의 주교 명단은 "도메누스 드로고 아치피스코푸스 et sacriate summus capellanus, 필리우스 카롤리 임페라토리스"(드로고 대주교와 찰스 황제의 아들, 신성한 궁전 주교)를 40대 주교로 기록하여 32년 5개월 7일간 그 자리를 지켰다. 사후 어드벤티우스(858년 ~ 875년)에 의해 메츠의 주교로 계승되었다.

참고 항목

참조

  1. ^ Theuws & Nelson 2000, 페이지 157.
  2. ^ a b Theuws & Nelson 2000, 페이지 159.
  3. ^ 1995년 튀김 페이지 146.

원천

  • Fried, Johannes (1995). "The Frankish kingdoms, 817–911:the East and Middle Kingdoms". In McKitterick, Rosamond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volume= 추가 텍스트(도움말)
  • Theuws, Frans; Nelson, Janet Laughland, eds. (2000). Rituals of Power: From Late Antiquity to the Early Middle Ages. Brill.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