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앤더슨(판사)
David Anderson (judge)데이비드 앤더슨 | |
---|---|
스코틀랜드 법무장관 | |
재직중 1960–1964 | |
영국 의회 의원 덤프리에셔를 위해 | |
재직중 1963–1964 | |
개인내역 | |
태어난 | 1916년 9월 8일 |
죽은 | 1995년 12월 31일 |
정당 | 유니온주의자 |
데이비드 콜빌 앤더슨 VRD QC(David Colville Anderson VRD QC, 1916년 9월 8일 ~ 1995년 12월 31일)는 스코틀랜드의 법률 강사, 옹호자, 유니온주의 하원의원, 스코틀랜드 법무장관, 판사로서, 그의 경력은 기괴한 성적 스캔들로 끝이 났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장교였던 앤더슨은 소련의 침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노르웨이 왕으로부터 영예를 안았다.
초기 생활 및 RNVR 서비스
앤더슨은 영국 파이프의 한 농장 가정 출신이자 법무가의 아들로 옥스퍼드 주 글렌알몬드 트리니티 칼리지와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38년에 옥스포드를 졸업했고 그 후 토우 장학금으로 에든버러 대학교에 갔고 그곳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위해 책을 읽었다.
전쟁이 발발하여 그의 학업이 중단되었다. 앤더슨은 권총사격을 취미로 즐겼기 때문에(1933년 학교를 위해 비슬리에서 애슈버튼 실드를 수상) 대비가 잘 되어 있었고, 1935년 영국 해군 자원 보호구역에 입대하여 1938년 4월 20일 소위에게 임관했다. 그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비슬리의 인터-서비스 사격 팀의 일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앤더슨은 영국 해군 구축함에서 복무했으며, 1940년 4월 20일 중위와 1942년 6월 11일자 런던 가제트에서 HMS 멘디프에 탑승한 공로로 2509페이지에 올라 1943년 해군 군네리 에거튼 상을 수상하였다.
전시 및 법조 경력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앤더슨은 로제츠 호위대의 플로티야 건너리 장교였다. 그는 1945년 북노르웨이에서 독일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잡혀 있는 소련군의 반란을 막기 위한 특별작전을 지휘했다. 영국 정보기관들은 스탈린이 이 반란을 노르웨이의 침공을 빌미로 삼으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으며, 앤더슨은 1946년 작전의 성공으로 하콘 7세 자유훈장을 1947년 3월 4일자 런던 가제트 1046면에 수여했다. 그는 RNVR에 남았고 1947년 9월 30일자 런던 가제트 훈장 4595쪽과 1948년 4월 20일자 중위로 승진한 런던 가제트 훈장 2540쪽을 수여했으며, 1960년 RNVR에서 은퇴했다.
에든버러에서 학업을 재개한 그는 1946년 LLB에서 학문을 취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맥클라간과 달게티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어드바이저 자격을 얻은 그는 1947년부터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법률의 강사가 되어 연습하기도 했다. 앤더슨은 정부의 지시에 집중했고 1953년 노동부의 상임 주니어 카운슬이 되어 1955년 전쟁 사무소로 옮겼다. 그는 1957년에 여왕의 변호사로 임명되는 것에 대해 이 일을 포기했다.
정치 경력
이미 정치에 관심이 있는 앤더슨은 1955년 총선에서 코트브리지와 에어드리의 안전한 노동당과 1959년 이스트 던바튼셔의 더 한계 의석에서 유니온주의 후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우승할 수 있는 의석에서 유니온주의 후보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앤더슨은 1960년 5월 11일 스코틀랜드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이는 정부 내 하위 장관직(법률 문제에 대해 스코틀랜드 사무소를 조언)으로 하는 것으로, 의회 밖에서 임명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1963년 부의장이 되어 북부 등대의 당연직 위원이기도 했다.
1963년 말 니올 맥퍼슨(덤프리에셔 하원의원)이 피에리지(Peerage)를 받게 되자 앤더슨은 그 뒤를 잇는 보궐선거에서 의석을 다투게 되었다. 정부가 국회 상임위 무대를 통해 형사사법부(스코틀랜드) 법안을 지도하기 어려워 법무장관을 국회의원으로 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됐다. 그는 저지선 유세 끝에 훨씬 줄어든 971명으로 의석을 지켰다.
앤더슨은 1964년 3월 병에 걸려 정부로부터 사임과 3월 17일 북부 등대 위원회로부터 사임 발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MP로 계속 활동할 생각이었으나, 한 달 후 그는 출마를 포기했고, 따라서 9월에 해산할 때 의회를 떠났다. 앤더슨은 병이 나았을 때, 법적 활동을 재개했고, 1965년에 로디언스와 피블스의 명예 보안관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스코틀랜드 산업 재판소의 회장을 지냈으며, 1972년부터는 공개 질의의 수석 기자와 스코틀랜드 사무국 차관을 지냈다.
스캔들과 재판
그러나 14세 소녀 두 명을 부추겨 그에게 걸어와 구타하라고 한 죄로 5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으면서 그의 법적 경력은 끝이 났다. 앤더슨은 1972년 12월 18일 트로온에서 그의 새 직책에 대한 첫 번째 주요 공개 조사를 주재했다. 검찰은 앤더슨이 고향에서 나온 것을 알고 소녀들에게 접근해 조용한 곳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소녀들이 앤더슨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논란이 됐으며 앤더슨은 앤더슨이 묵고 있던 호텔 직원 중 한 명으로부터 알리바이를 받았다. 앤더슨의 아내도 그가 밤에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외투가 당시 세탁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KGB가 자신을 사칭하고 곤경에 처하기 위해 닮은 꼴로 자신을 보복하는 행위로 자신을 모함했다고 주장한 앤더슨은 유죄 판결에 항소했지만 패소했다. 1974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앤더슨의 이름을 밝히기 위해 상원과 하원에서의 논쟁과 스코틀랜드 형사 사건 검토 위원회의 조사를 포함한 몇몇 유명하고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가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무죄를 주장했고 1980년에 극작가 존 헤일은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데이비드 앤더슨 QC의 사례>를 썼다. 그 연극은 맨체스터, 에든버러 그리고 해머스미스의 리릭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앤더슨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을 지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2002년 9월 스코틀랜드 형사사건심의위원회가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되었으나 2005년 2월 유죄판결이 확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0년 자서전에서 레이디 주디 스틸은 한 남자가 에든버러 대학교의 10대 학생이었을 때 그녀에게 거의 똑같은 외설적인 청혼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의 사건들을 고려하여 그녀는 그것이 앤더슨이라고 결론지었다.[2] 그녀의 남편은 자유민주당의 종신 동료이자 전 하원의원인 데이비드 스틸이다.
참고 항목
참조
- ^ "No. 17822". The Edinburgh Gazette. 17 May 1960. p. 295.
- ^ Horne, Mark (21 November 2010). "Lady Steel: my role in the sex scandal that shook Scotland". Sunday Herald. Retrieved 24 November 2010.
- M. 스텐튼과 S. 리즈, "영국 하원의원 후위" vol. IV (Havester Press, 1981년)
- Who Was Who
- 2002년 9월 8일 일요일 스코틀랜드, Dennis Straaugan, Marcello Mega "QC는 정말 KGB에 의해 모함되었는가?"
- Kirsty Scott, 2002년 9월 9일 페이지 8에 "30년 후에 검토될 KGB 복수" 사건.
- 2005년 2월 6일 일요일 스코틀랜드의 마르첼로 메가 "1973년에 걸친 QC에 대한 사면 불가"
외부 링크
- Hansard 1803–2005: David Colville Anderson의 의회 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