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페퍼의 반란
Culpeper's Rebellion컬페퍼의 반란(Culpeper's Reviation)은 1677년 항해법의 시행으로 촉발된 민중 봉기였다. 그것은 정착민 존 컬페어가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엘리자베스 시티 근처에 있는 캐롤라이나주 앨버말 카운티의 상원의원들을 상대로 주도했다. 봉기는 제한된 성공에 그쳤지만, 컬페퍼 자신은 반란의 무죄를 선고받고 영웅이 되었고, 이후 영주들은 식민지의 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경
영주권자는 신중한 계획과 긴 문서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이나에서, 특히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를 세우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알베말에는 정착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늪과 강은 육지로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잉어와 소리는 너무 얕아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1660년대에 이미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영주에게 지배를 받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조건의 결과로서, 부분적으로는 관심이 부족하여, 영주들은 약하고 비효율적인 주지사를 임명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일반적인 혼란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들 중 누구도 원주민의 위페메오크나 유럽 해적들의 습격으로부터 질서를 보장하거나 정착민들을 보호하지 못했다.[citation needed]
그런 환경에서는 정착민들과 식민지 당국 사이의 모종의 갈등이 거의 불가피했다. 일어난 갈등은 컬페어의 반란으로 알려질 것이고, 많은 반란처럼 세금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는 미국 식민지가 어느 정도 소득을 창출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결국 그러한 식민지를 건설하는 주요 목적이었다. 중상주의라고 불리는 당시의 경제이론은 한 나라가 가능한 한 많이 수출하고, 수입도 적게 해야 하며,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돈(금과 은)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식민지는 영국에 원자재만 수출해야 하고, 영국은 그 원료를 다른 나라로 수출하거나 다시 식민지로 수출할 수 있는 더 비싼 완제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식민지들은 목재는 수출하지 않았지만 가구, 해군 상점은 수출하지 않았고, 담배와 쌀과 같은 작물들은 수출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은 수출하지 않았다. 그 공산품을 생산하는 것은 영국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무역의 모든 단계에서는 세금이 징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의회는 영국 식민지 제국 내의 무역을 통제하는 항행법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식민지 상품은 영국과 식민지배에서만 운반할 수 있었고, 영국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유럽 상품들은 먼저 영국을 통과해야 했다. 물론 식민지 화물이 영국 항구를 통과할 때마다 세금이 부과되었다. 게다가 담배, 쌀, 설탕과 같은 특정한 식민지 상품들은 영국에만 배송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먼저 세금을 내지 않는 한 다른 영국 식민지로도 배송되지 않았다.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캐롤라이나 헌장은 카롤리니아인들에게 담배와 같은 상품에 대한 수출 관세, 즉 세금을 면제해 주었지만, 7년 동안만 면제해 주었고, 1670년에 그 면제 혜택이 만료되어 항해법이 본격 시행되었다. 알베말 주민들은 항해법에 불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수입을 담배에 의존했고, 알베말레에는 좋은 항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담배의 많은 부분을 뉴잉글랜드의 무역상들에게 팔았는데, 그 작은 배들은 좁은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세금을 불공평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세금은 주요 허리케인, 가뭄, 폭우로 인한 몇 년간의 흉작에 더해져 왔다. 정착민들은 또한 이웃 식민지에 비해 높은 토지에 지불해야 하는 퇴촌민들에 대해 불평했다.
1672년, 알베말 의회는 피터 카르트렛 주지사를 영국으로 보내 항법법에 의해 요구되는 세금을 징수하지 말 것을 영주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적으로 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그들의 헌장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신임 주지사 존 젠킨스는 발렌타인 버드를 식민지의 관세, 즉 수출세를 징수하는 사람으로 임명했지만, 젠킨스는 결코 법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다. 영주들을 지지했던 토마스 이스트처치와 토마스 밀러 두 사람이 불만을 토로했다. 밀러는 반역죄로 감옥에 갇혔지만, 탈출하여 이스트처치와 함께 영국으로 가서 영주들에게 알베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렸다. 이어 이스트처치를 주지사로, 밀러를 세관 수집가로 임명했다.
토마스 밀러는 세관 수집가의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세금을 걷었을 뿐 아니라 불법 수입품을 압수해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스트처치가 영국에서 지체되자 밀러도 임시 주지사를 임명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권력을 이용하여 1663년 이전부터 알베말에서 살았던 저명한 정착민 조지 듀란트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Miller는 보호를 위해 또는 단지 그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무장한 남성들의 경비원과 함께 여행을 했다.
반란의 전개
1677년, 영주들에 반대하는 약 40명의 사람들이 밀러를 강제로 퇴장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찰스 타운에서 쫓겨난 듀란트, 발렌타인 버드, 존 컬페퍼에 의해 이끌렸고,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좋은 싸움을 즐기는 말썽꾸러기"라는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장하고 밀러와 다른 관리들을 체포하고 정부를 장악했다.
그 후 반군들은 듀란트의 집에서 만난 의회를 위해 새로운 선거를 치렀다. 식민지의 정부 역할을 하면서 밀러를 재판해 유죄를 선고하고 투옥시켰고, 그들은 최근 버지니아에 도착한 토마스 이스트처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했다.
밀러는 다시 감옥에서 탈출하여 영국으로 가서 영주들에게 보고하였다. 컬페퍼는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그를 따랐다. 영국 정부는 조사를 실시했고, 컬페퍼는 반란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영주권자는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다. 영주들 중 한 명인 샤프트즈베리 경은 식민지에는 정착된 정부가 없으며 정착민이 밀러와 이스트처치의 학대에 대해 "폭동"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변호했다. 컬페퍼는 무죄 판결을 받고 영웅 알베말에게 귀향했다. 존 컬페퍼는 1644년 캐롤라이나 주 뉴하노버 관할 알베말에서 태어나 1692년 캐롤라이나 주 파스쿠탄크 관할구에서 사망했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자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3대손 존 컬페퍼(1761–1841)는 이 지역의 의회 의원이 되었다.
컬페퍼의 반란 이후
컬페퍼의 반란 이후 영주들은 식민지를 장악하기 위해 더욱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이 영주였던 세스 소텔이라는 새 주지사를 임명했는데, 그는 에드워드 하이드의 식민지의 지분을 샀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에 소텔은 터키 해적들에게 붙잡혔다. 그가 없는 동안 조지 듀란트는 총독 직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통치했다. 듀란트는 질서를 회복하고, 반군을 사면하고, 관세를 징수했다.
1683년 마침내 소텔이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너무나 부패한 것으로 판명되어 의회는 그를 공직에서 해임하고 식민지에서 추방했다. 더 많은 혼란과 반란을 겪은 후, 필립 루드웰은 1691년 캐롤라이나의 모든 주지사가 되었다. 영주들은 원헌에 찬성하는 기본헌법을 무시한 채 그에게 정부를 간소화하라고 명령했다. 루트웰은 알베말 지역의 오랜 거주자들을 그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마침내 평화와 안정으로 노스캐롤라이나의 식민지가 성장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더 큰 폭동이 곧 카리의 반란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추가 읽기
- 랭킨, 휴 F, 알베말의 격변기: 컬페퍼의 반란 이야기, 1675-1689
- 맥일베나, 노일렌 "아주 돌연변이 같은 사람들: 노스캐롤라이나를 위한 투쟁, 1660-1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