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커크 브로슈어
Crosskirk Broch크로스커크 브로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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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커크, 케이티니스, 스코틀랜드 | |
좌표 | 58°36′30″N 3°40′48″w / 58.608197°N 3.679948°W좌표: 58°36′30″N 3°40′48″W / 58.608197°N 3.679948°W/ |
사이트 정보 | |
조건 | 바다에 의해 파괴됨 |
사이트 기록 | |
빌드됨 | 철기시대 |
자재 | 돌 |
크로스커크 브로슈어는 현재 스코틀랜드의 케이티니스주 투르소 근처의 크로스커크 햄릿 근처에 있는 요새였다. 철저한 고고학적 탐사를 거쳐 1972년 바닷물 침식으로 인해 안전하지 않게 된 이후 파괴되었다. 이 사이트는 고리벽과 블록하우스를 갖춘 오래된 원형 요새 안에 대형 원형 요새인 팸플릿을 설치한 것이 특이했다.
역사
크로스커크는 청동기 말기에 점령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영국 남부와 동부의 같은 시기 토기와 비슷한 국소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카펫토기가 있다. 샘플 몇 개가 검게 탄다. 이 도자기의 수정되지 않은 방사성 탄소 연대는 기원전 6~5세기에 있다. 일부 구식의 변형은 계속되었지만, 건물을 재건하고 새로운 형태의 도자기와 유물이 등장했던 중철시대에 불연속성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일부 영향력 있는 신규인구가 유입된 데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1]
지역 도자기의 추가 사용은 서기 80년에서 180년 사이에 로마가 스코틀랜드 남부를 점령한 시기까지 계속되었다.[1] 로마 토기와 유리그릇의 기원도 로마인이었을지도 모를 유리그릇도 남아 있었다. 한 구의 시신은 그 부지가 버려질 무렵에 대략 원형 건물 가운데에 앉은 자세로 매장되었다.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2]
서기 600년 무렵부터 책자의 잔해에는 두 개의 긴 시스트(cist)가 매장된 흔적이 있다.[3] 9세기, 10세기, 11세기 노르웨이의 침입자 시대부터 지금은 없어진 크로스커크에 룬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었다.[4] 13세기경 지어졌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성모성당(크로스커크)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30야드(27m) 떨어진 곳에 있다. 책자의 남쪽 땅 중 일부는 성 마리아가 지어졌을 때 평평해졌다. 최근에는 팸플릿 마운드에 있던 돌멩이 일부가 밭둑을 쌓기 위해 제거되기도 했다.[3]
구조
그 약속의 요새는 오래된 건물 안에 지어진 안내 책자를 앞질러 놓았다.[5] 초기 구조물은 동쪽의 산책로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아웃워크였으며, 15피트(4.6m) 두께의 벽이나 흙심부가 있는 암벽의 성벽이었다. 바깥쪽으로 넓어진 관문은 벽을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관문의 서쪽으로는 성벽이 세포와 같은 구조물을 포함하고, 그 다음에는 벽의 안쪽 면에 휴식이 있었다. 바깥일은 서쪽으로 계속되어 채플 지오의 벼랑 끝에 닿은 깃발로 만든 울타리로 끝이 났다.[6]
방사성 탄소 연대를 기초로 하여, 이 책자는 기원전 200년경에 제작되었고, AD 2세기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7] 팸플릿은 기존의 방어벽 위로 올라오면서 큰 힘이 든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경비실, 교내실, 그리고 지하층의 계단 입구를 포함했다. 팸플릿의 벽은 비교적 두껍지만, 흙 한 가운데와 돌멩이, 돌멩이 등으로 부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초기 실험 브로슈어 설계로 해석될 수 있다.[6] 원룸은 이후 타워의 절반 높이인 4.5m(15ft) 이상의 타워를 지탱할 만큼 튼튼하게 지어지지 않았다.[8]
타워 주변에는 마을로 추정되는 외부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스코틀랜드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배치였다.[8] 이 집들은 팸플릿이 완성되는 시점과 거의 동시에 입주해 있었다. 이후 2세기 동안 안내 책자의 변화와 수리가 잇따랐지만,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 기간이 끝날 무렵에는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안내책자 외부는 물론 성벽 안까지 주택 외함을 꾸준히 추가, 개선하였다.[9] AD 2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종적인 점령과 건설 단계가 이루어졌는데, 그 때 그 책자는 마침내 버려졌다. 이 마지막 기간 동안 방어적인 우려는 없었던 것 같다.[3]
이코노미
주된 작물은 보리였다. 크로스커크와 부에서 발견된 표본들에는 뚱뚱한 암탉, 소럴, 병아리 잡초 같은 다른 식물들의 씨앗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씨앗들은 의학적, 영양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혼합은 아마도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소와 양 몇 마리가 사육되었고, 겨울 내내 부양되었다.[10] 사람들은 조개류, 특히 림프절, 윙크, 수탉을 먹고 바닷새를 먹었다. 근처에는 격자무늬와 대구를 위한 심해어업과 사슴고기의 소비의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그 공동체가 풍족하고 다양한 식단을 가지고 있었고, 대체로 자급자족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1]
굴착 및 파괴
1871년 책자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내경은 약 30에서 32피트, 벽은 14에서 15피트의 두께를 가지고 있다. S로부터 침입한 것으로, 벽에는 방의 양면이 보이는 왼쪽의 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벽 가장자리에는 높이가 4~5피트 정도 되는 20ft 정도의 벽이 노출돼 있다. 팸플릿에서 10피트 정도 떨어진 육지 쪽에는 외곽 은행이나 벽의 잔해가 있는데, 지금은 그 기지에 폭이 8피트 정도 된다.[2]
1964년 한 보고서는 이 책자가 잔디로 뒤덮인 원형 인클로저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벽은 안쪽이 1.1m(3ft 7인치) 이하, 바깥쪽은 1.5m(4ft 11인치) 이하라고 밝혔다. 절벽 가장자리는 침식되어 있었고, 부분적으로는 성벽 북쪽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팸플릿 주위에는 얕은 우울감이 감돌았고 남서쪽에는 외방벽의 잔해였을지도 모를 낮은 둑이 있었다. 해안 침식으로 절벽이 잘려나가고 있어 현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66년과 1972년 사이에 페어허스트와 테일러는 그 폐허를 발굴했다. 그 후 책자의 유골은 불도저에 의해 벼랑 너머로 밀리고, 그 터는 풀밭이 되었고, 기념 사방이 세워졌다.[2]
참고 및 참조
인용구
원천
- British Archaeological Association (1889). The journal of the British Archaeological Association. British Archaeological Association. p. 305. Retrieved 2013-02-06.
- Cunliffe, Barry (2012-09-10). Iron Age Communities in Britain: An Account of England, Scotland and Wales from the Seventh Century BC until the Roman Conquest. Routledge. p. 321. ISBN 978-1-134-93803-2. Retrieved 2013-02-06.
- Fairhurst, Horace; Breeze, David John (1984). Excavations at CrossKirk Broch, Caithness. Society Antiquaries Scotland. ISBN 978-0-903903-03-5. Retrieved 2013-02-06.
- Green, Miranda (2012-12-06). The Celtic World. Taylor & Francis. ISBN 978-0-415-05764-6. Retrieved 2013-02-06.
- Henderson, Jon C. (2007). The Atlantic Iron Age: Settlement and Identity in the First Millennium BC. Routledge. p. 331. ISBN 978-0-415-43642-7. Retrieved 2013-02-06.
- "Crosskirk". RCAHMS. Retrieved 201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