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협 전투
Battle of the Strait해협 전투(스페인어: Batalla del Estrecho)는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지브롤터 해협 항구를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었다. 이 분쟁에는 주로 그라나다의 스페인 무슬림 에미리트, 카스티야의 스페인 기독교 왕관, 북아프리카 이슬람 마리니드 주 등이 포함된다. 이 항구들의 전략적 가치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그들의 위치에서 나왔고, 따라서 스페인의 이슬람교도들과 이슬람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을 연결시켰다.[1][2] 그 캠페인의 결과는 엇갈렸다. 카스틸은 타리파를 영구적으로 얻었고, 지브롤터와 알헤시라스를 간신히 데려갔지만 둘 다 이슬람의 지배로 돌아가곤 했다. 카스티일은 또한 해협의 아프리카 쪽 항구를 얻는 데 실패했다.[3]
해협 전투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에 카스티엘레, 모로코의 마리니데스, 그라나다의 나스리드인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이 "전투"(스페인어: la Cuestion del Estrecho)는 스페인의 기독교 재집회 역사의 주요 장이다. 지브롤터가 확실히 현장에 나타났을 때 그러한 전략적 지역을 통제하는 것은 해당 세력들 간의 충돌의 틀 안에 있었다.
알모하드 칼리프하테와 1220~40년대의 레콘퀴스타의 습격으로 지브롤터 해협 북쪽 해안은 알안달루스의 감소된 후계 국가인 그라나다의 나스리드 에미리트 관할로 들어왔다. 인근 알헤시라스의 종속으로서 지브롤터는 아마도 1274년 나스리드 술탄 무함마드 2세에 의해 알헤시라스와 함께 카스티야 침탈에 대항하여 그라나다를 대신해 스페인에 개입한 대가로 모로코의 마리니드 술탄 아부 유수프 야쿠브에게 주어졌을 것이다.[4] (다른 소식통들은 그라나다의 술탄이 타리파, 알헤시라스, 지브롤터를 기항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리니데스인들에게 넘긴 날로 1275년을 언급하고 있다.[5] 1292년 해협 통제를 추진하면서 카스티야의 산초 4세 부대가 타리파를 포위하여 쉽게 점령하였다. '좋은 놈' 구즈만 엘 부에노 주지사 휘하에서 타리파는 2년 후 마리니드에게 포위당하지 못했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마그레브에 후퇴하여 남은 항구를 그라나다의 술탄에게 팔기로 결정했다.[6]
마디나트 알-파드 프로젝트에 이은 기간 동안 지브롤터에 대한 기록적인 설명은 입수할 수 없지만, 지브롤터에 작은 요새화된 마을이 존재했고, 그 존재는 1292년 타리파가 몰락한 직접적인 결과였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이베리아 반도와 마린드족의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끊기 위해 산초는 알헤시라스(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를 포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서쪽에 기독교의 거점이 위협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알헤시라스 동쪽에 수비대를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브롤터는 알헤시라스의 후방을 보호하고 알헤시라스가 쓰러졌더라면 폴백 포지션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고 해협에 기독교 함대가 주둔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지브롤터는 훌륭한 감시 초소를 제공했다.[7]
타리파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난 1306년 마리니드족과 나스라이드족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나스라이드는 모로코 마리니드 왕좌의 전매인인 우트만 이븐 이드리스의 반란을 즉각 후원했다. 우트만은 나스리드 군대에 의해 세우타에 상륙하여 재빨리 포위망을 조각했다. 반군들은 나스리드 가리스온으로부터 해협을 가로질러 계속 지원을 받았다. 세우타에서 반란군을 몰아내지 못한 마리니드 술탄 아부 알 라비 술레이만은 그라나다와의 휴전이 만료되려는 카스티야인들에게 호기심을 갖고 알헤시라스와 지브롤터를 빼앗고 반란군을 차단하도록 부추겼다고 여겨진다.[citation needed] 지브롤터 1차 포위는 1309-10년 카스티야누스의 알헤시라스 주요 포위작전의 측면 작전이었다.
포위는 짧았다. 1309년 카스티니아인들이 지브롤터를 잡는 데 성공하면서 마디나트 알 파트의 방어력이 부족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8] 지브롤터 제1차 공성전의 카스티야 계정은 그 함락 당시 '천 백 이십오 무어'가 있는 작은 곳이었음을 나타낸다.[9] 그것을 줄이려면 두 개의 포위 엔진과 몇 백 명의 병력만이 필요했다. 카스티야르의 페르디난드 4세는 정복과 퇴거 후 성벽 보수와 함께 방어를 강화하도록 명령했고, 마을 위에 보관소를 건설하고, 갤리선을 수용하기 위해 선착장(아타라자나)을 건설했다.[10] 그러나 알헤시라스의 주요 포위작전은 실패했고, 카스티야인들은 그라나다 술탄과 거래를 해 지브롤터를 붙잡을 수 있게 했다.[citation needed]
지브롤터의 상실로 그라나다의 나스리드 술탄은 형 나스르에 의해 침전되었고, 그는 재빨리 정책을 번복하여 쿠타에 반군을 버리고 1310년 알헤시라스(따라서 지브롤터에 대한 주장)를 새로운 조약의 일환으로 마리니데스에게 주었다.[citation needed] 그러나 스페인에서의 어떤 얽힘에도 다른 곳에서는 너무 바빠서 마리네이드들은 알헤시라스를 거의 직후 그라나다에게 돌려주었다. 그라나다인들은 1315년 스스로 지브롤터를 되찾기 위한 시도에 나섰으나 마리니드의 지원 없이 제2차 지브롤터 포위전은 주춤하며 실패했다.[11]
카스틸리아인들은 20년 이상 지브롤터를 보유했는데, 1333년 그라나다의 나스리드 술탄 무함마드 4세와 모로코의 마리니드 술탄 아부 알 하산 알리 이븐 오트만 사이에 새로운 거래가 성사되었다. 모로코군은 해협을 넘어 알헤시라스로 건너가 1333년 지브롤터 3차 포위작전을 시작했다. 이것은 4개월 반 동안 지속되는 훨씬 더 심각한 노력이었고 그라나다-모로칸 연합군에 의해 장착되었다.[12] 스페인 기독교인들의 인구는 1333년 6월 17일 바스코 페레스 데 메이라 이 마을의 총독이 항복하기 전까지 그들 자신의 신발과 벨트를 먹도록 줄어들었다.[13] 그러나 무함마드 4세는 그라나단 궁정에서 마리니데스인들의 적들에 의해 조직된 음모로 거의 직후 암살되었다. 마리니드 술탄 아부 알 하산은 모로코 수중에 알헤시라스와 지브롤터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카스티야인들은 즉시 성공하지 못한 네 번째 포위 공격을 펼쳤으며, 두 달 후에 끝났다. 평화 회복에 이어 아부 알 하산은 지브롤터를 "초승달을 둘러싼 후광이 강한 벽으로" 재조명하라고 명령했다.[11] 재건된 도시의 많은 세부 사항은 아부 알 하산의 전기 작가 이븐 마르주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스나드 (1370–1)가 지브롤터의 재건을 기술하고 있다. 도시를 확장하고, 서쪽과 남쪽 측면을 커버할 수 있도록 방어벽을 새로 쌓았으며, 탑과 연결 통로가 추가되어 강화되었다. 기존의 요새도 강화·보수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착취했던 약점이 개선되었다.[8]
지브롤터 해협의 정치상황(1274-1350)
참조
각주
- ^ 오 칼라한 2011, 페이지 3
- ^ 카라스코 만차도 2009, 페이지 401.
- ^ 오 칼라한 2011, 페이지 265.
- ^ Mann 1873, 페이지 93. (
- ^ 잭슨 1986, 페이지 36. (
- ^ 잭슨 1986, 페이지 38. (
- ^ Harvey 1996, 페이지 35. 대상
- ^ a b Fa & Finlayson 2006, 페이지 11.
- ^ Hills 1974, 페이지 48. 없음: (
- ^ 힐즈 1974, 페이지 49. 대상 (
- ^ a b Fa & Finlayson 2006, 페이지 9.
- ^ Hills 1974, 페이지 58. 오류: 없음: (
- ^ Hills 1974, 페이지 59. 없음: (
참고 문헌 목록
- Carrasco Manchado, Ana I. (2009). "Al-Andalus Nazarí". Al-Andalus. Historia de España VI (in Spanish). Madrid: Ediciones Istmo. pp. 391–485. ISBN 978-84-7090-431-8.
- O'Callaghan, Joseph F. (2011). The Gibraltar Crusade: Castile and the Battle for the Strait.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ISBN 978-0812204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