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컬런 전투
Battle of Kilcullen킬컬런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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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아일랜드인 반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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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연합 아일랜드인 | 영국 육군 | ||||||
지휘관과 지도자 | |||||||
? | 랠프 던다스 | ||||||
힘 | |||||||
200 -1,000 | 220 | ||||||
사상자 및 손실 | |||||||
c.150 | c.40 |
킬쿨렌 전투는 1798년 5월 24일 킬다레 카운티의 그 이름의 두 정착지 근처에서 일어났으며, 연합 아일랜드 반군과 영국군 사이의 두 개의 분리된 충돌로 구성된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의 첫 전투 중 하나이다.
올드 킬컬런 오전 7시
1798년 5월 23일 밤 반란이 일어나자 발리모어 유스티스, 나스, 번성 등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였다. 킬칼렌 반군은 킬다레 전역으로 확산되자 현재 올드 킬컬렌으로 알려진 고대의 언덕 꼭대기의 교회 야적장에서 동원을 시작했다. 날이 밝자 발리모어 유스티스 공격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생존자들을 포함해 약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본부인 캐슬 마틴이 불과 3마일 떨어진 중부군 육군 중장의 지휘를 받는 랄프 던다스 중장의 지휘 아래 현지 군부에 의해 목격되었다. 둔다스는 재빨리 120여 명의 보병, 기병, 드래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소집하고 반란군 집결지를 해산시키기 위해 진군했다.
80여 명의 기병과 드래군들은 보병들을 앞질러 언덕 기슭에 도착하자마자 반란군 집결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반란군들은 옆구리를 지키기 위해 도랑과 폐허가 된 교회와 묘지의 벽을 이용하여 재빨리 삼면에 자리잡았다. 기병대는 반란군들의 긴 피케에 밀려 뒤로 밀려났고, 전투에서 30명 이상과 많은 말들을 잃었다. 두 명의 대장이 필드에 죽어 있었고, 그 중 한 명인 어스킨 대위는 전투가 끝난 후 그의 죽음을 만났다고 한다. 그가 말 추락으로 다리가 부러진 채 불구로 누워 있을 때, 그는 전쟁터를 청소하던 노파가 그를 녹슨 칼로 찔러 죽인 것을 발견했다. 반군들은 자신들의 공격으로 기병대의 혼란을 이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보병의 도착으로 생존자들은 킬쿨렌 다리로 철수하고 그곳에서 100여 명의 현지 여진이 보강되었다.
킬컬런 턴파이크 오전 9시
정부의 패배 소식이 킬쿨렌과 주변 지역에 퍼지자 반란군은 거의 1,000명에 이를 때까지 신병들로 넘쳐났다. 그러자 반란군 지도부는 더블린로에서 남아 있는 수비대를 차단하여 더블린과 남부의 교신을 끊음으로써 그들의 승리를 신속하게 추적하기로 결정했다. 반란군들은 킬쿨렌교 하류에서 리프피 강을 건넜고 턴피케 언덕의 도로 양쪽에 있는 높은 지대를 점령했다.
이제 던다스는 더 이상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작은 기병 일당을 앞세워서 높은 곳에서 반란군을 끌어내리려는 계략을 고안해 냈는데, 그들의 명령은 전투를 피하고 준비된 화선으로 반란군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반군들은 미끼를 물고 선발대를 뒤쫓아갔으나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로부터 몇 개의 머스킷총볼리를 맞았다. 반란군이 혼란에 빠져 라이프페이에 도착했을 때, 기병대는 그들을 풀어 흩어지게 했고, 정부측에서 보고된 손실 없이 약 150명을 죽였다.
정부 철수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던다스는 일찍이 패배한 것과 고립된 방패에 대한 공격과 확산되는 반란 소식에 흔들렸다. 그는 중부군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모든 크라운 부대에 대해 나스(Naas)로 철수하라는 총명령을 내려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로 결정했으며, 사실상 군의 상당 부분을 반란군에게 내맡겼다. 그가 서둘러 마을 밖으로 대피한 가운데, 앞서 싸운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들과 일부 부상자들은 반란군에 의해 남겨져 사망했다.
노카울린 5월 26일
턴피케 언덕에서 돈다스 장군에게 패배한 반란군은 올드 킬쿨렌 근처의 노카울린 언덕(Dunn Ailinne의 고대 유적지)에 집결했다. 5월 26일 토요일 그들은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돈다스가 평화를 제의하는 반란군에게 호의적으로 대답하자, 그들은 조건을 전달했다. 그들은 자유 사단이 끝나고 약탈한 재산을 되찾는다면, 자신과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돈다스가 조건을 협상하고 적대행위를 종식시키는 데 유리했을지 모르지만, 정부는 분개하여 군 통수권자인 제라드 호수 장군을 캐슬마틴으로 보냈다.
일요일 호수가 도착할 무렵, 던다스는 투항일이 다음날인 휘트 먼데이(Whit Monday)에 있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었다. 17세의 패트릭 오켈리는 반란군을 대신하여 항복을 받아들이도록 선택되었고 대령으로 임명되어 둔다스 장군과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회의는 정중한 분위기였지만 레이크는 캐슬마틴 가에 있는 반란군들의 완전한 항복 이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거절했다. 오켈리는 반란군이 언덕 위에서만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던다스는 노카울린에 올랐다.
둔다스의 존재는 반란군들의 임기 거부에 대한 실망감을 크게 누그러뜨렸고, 남자들은 무기를 예치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798년 그의 '반란 일반사'에 실린 오켈리에 따르면, 그 뒤 이어진 무기 더미는 왕립거래소의 크기였고, 이것들은 나중에 캐슬마틴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레이크는 캐슬마틴에서 1마일 이내에 보병 3개 연대와 포병 4개를 배치하고 필요시 반군과 교전할 태세를 갖추었기 때문에 계획된 레이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원천
- Kavanagh, Art. Ireland 1798: The Battles. Irish Family Names. ISBN 0-9524785-4-4.
- Corrigan, Mario (1998). All that delirium of the brave – Kildare in 1798. Kildare County Council. – OCLC 38331826
- Pakenham, Thomas (2000). Year of Liberty:Great Irish Rebellion of 1798. Abacus. ISBN 034911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