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니코
Araniko아니코, 아니그 또는 아라니코(데바나가리: अरनको, 중국어: 阿尼尼哥; 1245–1306)는 중국 네팔과 원나라의 예술과 이들 지역의 예술 교류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바야 만라의 통치 기간 동안 네팔 카트만두 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이징의 미아잉 사원에 하얀색 스투파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야 빔 데브 말라 재위 기간 동안, 그는 티베트에 황금 탑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수도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티베트에서 그는 원 왕조(1279–1368)의 창시자인 쿠빌라이 칸 황제의 궁정에서 일하기 위해 북중국으로 더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히말라야 횡단 예술 전통을 중국에 가져왔다. 아라니코는 80명의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중국과 티베트로 가서 많은 탑 스타일의 건물을 만들었다. 만년에 그는 수도를 포기하고 가정을 꾸렸다.
번역이 다소 혼동되어 그의 이름은 옛 문헌에 아르니코 또는 아라니코로 다양하게 쓰여 있다. 바부람 아차랴의 실수는 그의 산스크리트 이름을 발라바후로 돌렸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아니코가 산스크리트어 이름 아네카의 중국어 발음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1] 그의 이름이 "네팔에서 온 존경할 만한 형제"라는 뜻의 아 니카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럴듯하다.
초년
아라니코는 1245년 네팔 카트만두 계곡에서 아브하야 만라왕(116~55년)의 지배를 받으면서 태어났다. 네팔 역사에는 아르니코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이 중국계정으로부터 나온 반면, 중국의 역사학자 바부람 아차랴는 아라니코가 조각과 미술로 유명한 파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만큼 그는 불교 신자였을 테지만 그의 뉴아르 카스트는 투기에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아라니코는 아바야 말라의 후계자 자야 빔 데브 말라의 통치 기간 동안 카트만두 계곡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중국 기록에 할아버지의 이름은 미티라(Mi-ti-rha), 할머니는 미트라(Kun-di-la-qi-mei)로,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미트라(Mitra), 쿤달락스미(Kundalaxmi)로 각각 표기돼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라케나(Lakshman)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슈마케타이(Shu-ma-ke-tai)이다.[1]
프로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흔히 언급되듯이, 아니코는 어린 시절에도 예술적 신동이었다. 그의 비문에서 나온 일화는 그가 세 살 때, 그의 부모가 아이를 절에 데리고 가서 부처님께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도를 올려다보며 "누가 나무로 만든 스탬바, 푸미, 그리고a를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크게 놀란 주변 사람들은 그가 타고난 예술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곱 살쯤 되었을 때 그의 기질은 어른처럼 냉정했다. 학교에서 그는 교과서를 숙달하고, 너무나 짧은 시간에 훌륭한 서예가가 되어 존경받는 원로들도 열세를 인정하였다. 그는 미술에 관한 논문을 읽는 것을 듣자마자 외울 수 있었다. 네팔을 떠나 티벳으로 향하기 전 그는 이미 그림 그리기와 모델링, 캐스팅 이미지 전문가였다.[3]
위안중 미션
역사적 배경
The event that brought Arniko to Tibet, and eventually to the Yuan court in Shangdu (today's Beijing), was Kublai Khan's decree of 1260 CE to Drogön Chögyal Phagpa, the fifth patriarch of Sakya sect of Tibetan Buddhism, to build a golden stupa for Suer chi wa (Tibetan: "Chos rje pa" or "the Lord of Dharma"), that is the Sakya Pandita Kun dga' rgyal 종파의 네 번째 족장 mtshan([4]1182–1251)이다. 쿠빌라이의 지시는 사키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지표의 하나였다.
공사 시기인 1260년은 눈여겨볼 만하다. 쿠빌라이는 1260년 4월 동생 아리크 뵈케의 주장과 맞먹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제국의 주도권을 위해 형제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1260년 12월, 그는 파그파를 황실 교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옥새와 불교의 지도자 자리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빌라이는 파그파를 자신의 최고 종교 권위자로 공식 인정하고 사키야 교사를 후원할 의무가 생겼다. 그 대가로 그는 사키야 종파가 종교적인 제재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부도의 건립은 사키야 판디타에 대한 공물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해에 종교적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사업이라는 취지였다.[4] 아리크 뵈케는 마침내 1264년 8월 21일 상두에서 쿠빌라이에게 제출하였다.
라사
이 부도를 짓기 위해, Pagpa는 네팔에서 장인들을 징집했다. 티베트인들의 우상화와 예술적 가치는 네팔 전통의 그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파그파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위해 네팔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00명의 예술가를 모집할 생각이었으나 당시 네팔의 왕이었던 자야 빔 데브 말라는 80명만 넘겨줄 수 있었다. 1260년 황실 교사로 임명되면서, 그가 더 많은 예술가를 찾으려고 애쓴 것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몽골 제국 전역에 그의 종파가 향후 전파될 것이라는 그의 비전과 야망이었을 것이다.[4]
티베트로 향하는 예술가들은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인지, 자신만만한 아르니코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책임을 떠맡을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왕이 젊어서 낙담하려 하자, "내 몸은 정말 젊지만 마음은 젊지 않다"[3]고 대답했다. 왕은 결국 그를 80명의 장인의 팀장으로 만들어 라사로 보냈다. 그가 네팔을 떠날 때 그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3]
티벳에서 아르니코는 1261년 그들의 첫 만남에서 파그파를 감동시켰다. 파그파는 즉시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과 행정력을 인정했고, 그에게 공사를 감독하도록 맡겼다. 이 탑은 사키야 수도원 본관 내에 세워졌다.[4] 아르니코는 이 프로젝트에 2년을 보냈다.[4] 완성 후, 파그파는 네팔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을 때 그를 떠나보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때쯤 쿠빌라이 칸은 아리크 뵈케를 물리쳤으며, 쿠빌라이와 파그파 모두 사키야 수도원의 탑신 건설이 쿠빌라이의 군사적 승리 및 기타 업적에 기여하는 종교적 공적을 얻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황제의 스승으로서 파그파는 궁정에 가서 종파의 가르침을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국의 어떤 예술가도 그의 종교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히말라야 탄트리히 신들의 황당한 배열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아르니코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파그파는 네팔로 돌아가는 대신 몽골 법정으로 가서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을 바치라고 권했다. 파그파는 아르니코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를 비밀 불교 조약을 맺게 하여 그의 사회적 지위를 평범한 장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이리하여 아르니코를 발견한 파그파는 직접 아르니코를 준비하여 궁정에서의 앞으로의 임무를 위해 훈련시켰다.[4]
상두
아르니코는 1262년 말까지 샹두(샤나두)에 도착했다. 아르니코와 쿠빌라이 칸의 만남에 대한 다음 설명은 청주푸에 의해 기록된다.
쿠빌라이는 그의 권고를 듣고 즉시 사절에게 소환을 명령했다. 황제는 도착한 뒤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큰 나라에 오기가 두려우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세자는 모든 방면의 사람을 자기 아들처럼 여긴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오면 두려워할 게 뭐가 있냐며 "왜 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서쪽에서 살아왔다. 나는 2년 동안 티베트에 탑을 세우라는 칙령을 받았다. 나는 거기서 끊임없는 전쟁을 보았고, 폐하께서 그곳에서 평정하시기를 바랐다. 난 지각 있는 존재들을 찾으러 왔어." "뭘 연습해?"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대충 그림 그리기와 캐스팅, 조각 등을 알고 있다고 했다.[3]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어린 아라니코에게 송황제가 선물로 준 중요한 청동돌을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복원을 끝내는 데 2년이 걸렸다. 1265년 두 번째 달에 아르니코는 복원을 마쳤으며 동상은 매우 완벽해 보여 중국의 가장 숙련된 예술가들도 그의 작품에 크게 감탄했다.[3]
위안차이나에서는 많은 건물을 설계하고 지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당시 가장 큰 건축물이었던 베이징 미아잉사 백탑이다.[5] 완성하는데 거의 10년이 걸렸지만, 화이트 다고바로 더 잘 알려진 스투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 있다. 높이 50.9m까지 솟아 있으며, 밑부분의 지름이 30m가 넘는다. "십대 천국"이라고 불리는 13개의 넓은 원형 몰딩 띠는 그것의 표면을 나눈다. 원뿔의 꼭대기에는 우산처럼 생긴 청동 원반 구조가 있고 테두리에는 36개의 청동 방울이 매달려 있다. 맨 꼭대기에는 작은 청동탑이 있는데,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다. 1961년 당시 중국 수상 저우엔라이는 이 사원을 국보로 보호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동안 백탑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1976년 당산지진으로 절이 크게 파손되었다. 탑의 꼭대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탑을 받치고 있던 벽돌과 절구가 부서져 많은 유물들이 부서졌다. 1978년 베이징 문화유적부(北京文化 relics部) 2010년 현재, 스투파 단지는 현재 또 다른 개보수가 진행되고 있다.[6]
그의 비문에는 아르니코가 생전에 세 개의 탑, 아홉 개의 큰 불사, 두 개의 유교 사당, 한 개의 도교 사원, 그리고 궁정 안팎에서 사용된 무수한 이미지와 물건 등을 완성했다는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3] 아르니코 역시 훌륭한 화가였고, 황실의 초상화들을 여러 점 집대성했다.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자리 잡고 있는 쿠빌라이 칸과 그의 부인 차비의 초상화는 그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4]
아르니코는 일생 동안 높은 영예를 얻었다. 1273년 모든 장인의 반장으로 임명되었고, 많은 중국 장인들을 사키아식으로 훈련시켰다.[7] 1274년경에는 호랑이의 모습이 새겨진 은접시를 받았다. 황제는 그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고, 그에게 영예로써 "량의 두크"라는 칭호를 주었다. 목사에 해당하는 타사투로 장식된 그는 중국 황실 역사책에서 전기를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한 명이다. The most important source of Arniko's life and career is his official epitaph written by Cheng Jufu (1249–1314) under Ayurbarwada's (Renzong, r. 1311–20) order of 1316, Liangguo Minhui gong shendao bei (The Spirit-way Stele for Minhui, the Duke of State of Liang), in Cheng Jufu, Cheng Xuelou wenji (The Collective Works of Cheng Jufu). 또 다른 중요한 출처는 명나라 초기의 감독하에 편찬된 《송리안》과 《왕이》에 나오는 아르니코의 공식 전기다. 그것은 주로 비문을 기반으로 하지만 새로운 정보도 포함하고 있다.
죽음
아르니코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의 아생게(Asengge)와 아슐라(Ashula)는 원나라에서 일하는 예술가로서 그의 진로를 따랐다.[8][9][10][11][12][13][14][15][16][17] 그는 1306년 3월 6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다. 그의 죽음 중 청주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306년 3월 8일, 그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가 갈 거면 홀에 커튼을 치고 소파를 쳐야 내가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그는 목욕을 하고 법정으로 갔다. 돌아온 후, 그는 병이 난 것처럼 보였다. 궁중 사신들과 의사들이 찾아왔으나 그는 11일 잠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그 소식을 듣고 죽음을 슬퍼하고 법회를 중단했다. 그는 궁내 관리들에게 명하여 가문을 보살피게 하고, 그 가문에 은 2만 5천 타를 상납하게 하였다. 황제는 관계 당국에 장례 준비를 명했다. 그날 밤 별 하나가 뜰에 떨어졌다. 다음날 나무 위에 고드름이 있는 것을 보았다. 7일 후인 3월 17일에 그의 유해가 네팔 관습에 따라 화장되었다. 7월 15일 완핑 현(수도 인근)샹산 강지위안 부도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3]
그의 기억 속에 세워진 비석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현자(쿠빌라이)가 일어나자
-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그는 그가 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마치 부모님의 집에 온 것처럼
- 모든 대변자들처럼
- 허브에 합쳐진 것,
- 모든 브룩스처럼
- 바다로 흘러가는 것.
- 성실한 마음으로
- 팔을 벌리고
- 그들 각자가 찾아낸다.
- 상대방의 마음
- 쿠빌라이 천황
- 타고난 재능이 있다.
- 그가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그가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우아한 량공
- 서양의 본질이다.
- 상하에 입성하여
- 그는 동양으로 여행했다.
- 계몽은 가르침이었고
- 빛나는 태양처럼.
- 황제에 대한 그의 말
- 겸손하고 훌륭했다.
- "왜 왔소?"
- "서방 사람들을 위해서."
- 덕을 베풀어,
- 그리고 당신의 친절을 넓히시오.
- 대화에서 등장하다.
- 상호의 이해
- 황제는 덕이 있고
- 그리고 그 주제는 충실하다.
- 그들의 말은 명료하지만
- 그들의 행위는 유익하다.
- 그의 뛰어난 솜씨에.
- 전 국토가 공물을 바치다
- 모든 일에는 그것이 적절하다.
- 시작과 계속,
- 그것이 지속될 수 있도록
- 수천 년 동안
- 과거의 예술가들은
-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 몇몇은 기회가 없었지
- 다른 사람들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 오직 량공
- 금을 꼬고 옥을 깎다
- 그가 지은 멋진 사원들,
- 우뚝 솟고 장엄하다.
- 그가 손님이었다고 누가 그래?
- 그는 왕실 예복을 입었다.
- 평민으로 돌아왔고
- 그는 명성과 부를 얻었다.
- 그의 탄생은 영광스러웠지만
- 그의 죽음은 비통했다.
- 그의 시작은 조심스러움에서 시작되었다.
- 그는 우아하게 끝났다.
- 그의 아들들은 그의 직책을 계속한다.
- 좋은 소식은 끝이 없다.
- 완핑 평야
- 장관 자리야
- 무성한 나무가 자란다.
- 기복이 심한 언덕에서,
- 림피드 잔물결 흐름,
-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가에서.
- 영광이 여기에 모였다.
-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왜 시로 찬양하는가?
- 역사가는 명령을 완성한다.[3]
레거시
아르니코의 황실 초상화는 송, 원, 후기 황실 초상화의 분수령을 나타낸다. 후기 초상화의 목적은 더 이상 선행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후기 원 황실 초상화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청나라 황실 초상화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이 초상화는 점차 정면과 경직되어 갔고, 결국 유럽 초상화의 새로운 영향 아래 점점 더 현실적이 되었다.[4]
중국 불교 미술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세 가지 주요한 예술적 영향을 보았다: 당 이전의 간다라 미술(618–907), 당 시대의 굽타 미술, 원나라의 팔라-히말라얀 미술이다. 아르니코는 제3의 파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기관에서 나온 예술품들, 부도와 그의 손에서 나온 두 개의 원 초상화는 팔라, 네팔, 중국의 예술적 전통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냄으로써 그것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몽골 통치가 붕괴된 후, 아르니코의 예술적 유산과 혁신은 명궁과 청궁에서 불교 미술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4]
네팔 정부는 그의[18]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우편 우표를 발행했다. 네팔의 아라니코 하이웨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문화참고
- 네팔의 아라니코 고속도로.
- 1984년 사티아 모한 조시는 네팔 바사에서 "네팔-야 라스트리예 비브후티 칼라카르 아르니코-야 스와타 차이트타"라는 제목의 장편시를 썼다.
- 2008년 아누 라지 조시는 사티아 모한 조시의 아르니코에 관한 책을 '지속적인 선물'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하여 자유시 형식으로 번역하였다.
- 2010년 5월 1일 개막한 엑스포 2010 상하이 '상해의 세계 엑스포 공원'에서는 네팔관 하이라이트 1코너에 '네팔 아라니코 센터'가 있었다. 2010년 5월 1일 개막한 엑스포 2010 상하이 네팔관에는 기록적인 75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하루 평균 방문객 수는 2만5000명, 주말과 공휴일에는 4만 명 이상이었다. 주요 중국어 온라인 뉴스 사이트는 네팔관을 인기 있는 10대 엑스포 전시관에 포함시켰다.[19]
- 네팔 태생의 한 스위스 목수는 아라니코가 아르니코 스케이트보드라고 부르는 이름을 딴 수제 스케이트보드를 디자인하고 제조하려고 했다.[20] 나중에 이 프로젝트는 스케이트보드 패션으로 확장되었다.
- 네팔 카트만두에 본사를 둔 지상파 방송 채널도 아라니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애칭으로 아라니코 텔레비전으로 불리는 이 세그웨이 인트로에는 하얀색 부도가 그려져 있다.
중국의 아라니코 동상 아라니코와 장인들이 파그스파의 지도 아래 티벳에 세운 하얀 부도를 가리킨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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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텍, 루치아노(1984년). 네팔의 역사 750–1480. 2부. 세리에 오리엔탈레, 토마 54. 로마: Il Medio ed Estremo Oriente에 의한 이탈리아어 연구소. 페이지 100
- ^ Jump up to: a b c d e f g h 청주푸 (1316). 청술루원지(청주푸의 집합작품)에 있는 량구오 민희공 센다오베이(량국공 민희 영로비)이다.
- ^ Jump up to: a b c d e f g h i 징, 애닝(1994년). 원나라 궁정의 네팔 예술가 아니게(1245–1306)의 후빌라이 칸과 차비 초상화. Artibus Asiae, 54권, 제1/2호(1994), 페이지 4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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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 문화 블로그
- ^ 中国大百科全书: 美术. Volume 42, Part 1 of Zhongguo da bai ke quan shu, Zhongguo da bai ke quan shu chu ban she. Bian ji bu. Zhongguo da bai ke quan shu chu ban she. Bian ji bu,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编辑部, 中国大百科全书总编辑委员会. 《美术》编辑委员会.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1992.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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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aniko Skateboards". Arniko Skateboards. Retrieved 19 October 2013.
외부 링크
- 신성한 비전: 티베트 중앙의 초기 그림들, 아라니코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PDF로 온라인에서 모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