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리비에르

Albert Rivière
알베르 리비에르
Albert Rivière 1932.jpg
1932년 알베르 리비에르
연금부 장관
재직중
1936년 6월 4일 – 1938년 1월 18일
선행자레네 베세
성공자로버트 라살레
연금부 장관
재직중
1938년 3월 13일 – 1938년 4월 10일
선행자로버트 라살레
성공자오귀스트 챔페티에 데 리브스
재향군인연금부 장관
재직중
1940년 3월 21일 – 1940년 6월 16일
선행자레네 베세
성공자장 이바네가라이
식민지 장관
재직중
1940년 6월 16일 ~ 7월 12일
선행자루이 롤린
성공자헨리 레메리
개인내역
태어난(1891-04-24)1891년 4월 24일
프랑스 크루세 주 그랜드부르그
죽은1953년 6월 28일 (1953-06-28) (62)
프랑스 크루세, 부삭
국적프랑스어
직업재단사, 정치인

알베르 리비에르(Albert Rivier, 1891년 4월 24일 ~ 1953년 6월 28일)는 프랑스의 재단사 및 온건한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1936년과 1940년 사이에 연금부 장관을 지냈으며, 1940년에는 잠시 식민지 장관을 지냈다.

초년

알버트 리비에르는 1891년 4월 24일 크레우세 그랜드부르그 마을에서 장인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레오본 리비에르는 구두장이였다.그의 어머니 프랑수아 갈루스는 재봉사였다.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님은 이미 2남 4녀를 두었는데, 그들 모두는 나중에 무역업이나 상점에 들어가곤 했다.그는 양복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제1차 세계 대전(1914–18) 동안 그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턱의 일부를 교체해야 했다.[1]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2]

1917년 11월 22일 리비에르는 쿠퍼의 딸인 잔 차데인과 결혼했다.딸은 1919년에, 아들은 1925년에 태어났다.리비에르는 형이 제빵사였던 크레우세주 부삭에서 재단사 겸 휘장이 되었다.[2]참전용사와 전쟁으로 인한 장애인의 이동, 프랑수아즈 l'국제우브리에르(SFIO, 프랑스어 국제노동자연맹)에서 전투병이 되었다.1919년 그는 입법부의 사회주의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1922년 그는 카밀 베나시에 이어 크레우즈 SFIO 연방의 초대 비서가 되었다.그는 1924년 선거에서 다른 3명의 참전용사와 함께 사회주의 명단에 올랐으나 당선되지 못했다.[2]

대리

리비에르는 1928년 입법 선거에서 부삭의 대리 선거에 출마했고, 1928년 4월 29일 2차 투표에서 1만3791표 중 7,086표로 당선되었다.하원에서는 상공회의소와 민군연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후자에서는 적극적이었다.그는 1932년 5월 1일 14,070표 중 9,130표로 재선되었다.육군·연금·규제·외교통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4년 2월 6일의 위기상황에 대한 조사위원회 위원이었다.그는 군사비 지출에 대한 토론에 적극적이었고, 국가 방위에 대한 사회주의 정책을 설명했다.[3]

리비에르는 1936년 4월 26일 18,835표 중 7,505표로 재선되어 1942년 5월 31일까지 재임했다.1936년 6월 4일 카밀 차우템프스 제2차 내각(1937년 6월 22일 ~ 1938년 6월 14일)과 레온 블럼 제2차 내각(1938년 3월 13일 구성)에서 결성된 인민 전선 정부의 연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그는 카밀 차우템프스의 제4차 내각(1938년 1월 18일 ~ 1940년 3월 10일)과 에두아르 달라디에의 제3차 내각(1938년 4월 10일 ~ 1940년 3월 20일)을 제외한 모든 캐비닛에서 이 직책을 맡았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1939–45년) 동안, 1940년 3월 21일, 리비에르는 폴 레이노의 내각에서 재향군인 및 연금수령자로 임명되었다.[3]독일군의 프랑스 침공과 프랑스 방위의 붕괴 후, 필리프 페텐 마샬은 1940년 6월 16일 리비에르에게 내각의 자리를 제의했다.리비에르는 레온 블럼과 상의한 뒤 휴전 협정을 맺을 계획이었던 정부에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근거로 제안을 거절했다.더 많은 논의 후에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내각에 대표되도록 수락했다.[4]1940년 6월 16일, 그는 식민지 장관으로 페테인 내각에 합류했다.1940년 7월 10일 그는 비치 의회가 제안한 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3]

리비에르는 이후 비치 정부에 의해 퇴역 군인회 직위에서 물러났다.그는 에보 수용소에서 안드레 블루멜의 탈출을 도왔다.그는 유대인 출신 셰어의 전 대리인이었던 로버트 라주릭을 사회로 모셨고, 비밀 저널인 로에로르의 창시자였습니다.그는 두 명의 캐나다 비행사를 숨겨주고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왔고, 그로 인해 그는 영국군 십자가를 받았다.전쟁이 끝난 후, 대법원은 비치 정부와 관련된 그의 혐의를 기각했다.[5]는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로로레에게 기부했다.알베르트 리비에르는 1953년 6월 28일 크루세주 부삭에서 세상을 떠났다.[5]

메모들

  1. ^ Gammal, Plas & Avizou 2001, 페이지 141.
  2. ^ a b c Gammal, Plas & Avizou 2001, 페이지 142.
  3. ^ a b c d 졸리 1960-77.
  4. ^ 그레이엄 2006, 페이지 247.
  5. ^ a b Gammal, Plas & Avizou 2001, 페이지 143.

원천

  • Gammal, Jean; Plas, Pascal; Avizou, Guy (2001). Dictionnaire des parlementaires du Limousin sous la IIIe République: Creuse (in French). Presses Univ. Limoges. ISBN 978-2-84287-174-1. Retrieved 2015-10-03.
  • Graham, B. D. (2006-04-20). Choice and Democratic Order: The French Socialist Party, 1937-19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02566-9. Retrieved 2015-10-03.
  • Jolly, Jean (1960–77). "Rivière, Albert". Dictionnaire des parlementaires français de 1889 à 1940 (in French). [As of October 2015 the online entry was incorrectly titled "Albert, Marcel YVON". The text appears to be an accurate transcription of the chapter in the source book by Jolly.] ISBN 2-1100-1998-0. Retrieved 2015-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