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코스타리카 총선
1948 Costa Rican general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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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포털 |
1948년 2월 8일 코스타리카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1] 국민연합당의 오틸리오 울테 블랑코는 55.3%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의회에서 부정선거와 무효로 간주되어 그해 말 코스타리카 내전으로 이어졌다.[2] 전쟁에 이어 국회의원 선거 결과도 무효화됐다.[1] 부선거에서는 43.8%, [3]부선거에서는 49.2%의 투표율을 보였다.
캠페인
테오도로 피카도의 승리를 자축하며 선거가 끝난 지 나흘 뒤인 1944년, 칼데론의 차기 선거 출마 선언이 있었다.[4]
제1야당인 민주당, 전국연합당, 사민당은 단일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열었다. 예비 후보로는 페르난도 카스트로 세르반테스(민주), 오틸리오 울테 블랑코(유니온주의자), 호세 피게레스 페러(사회민주당) 등이 꼽혔다.[4] 피게레스는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2라운드에서는 그의 지지로 폴트가 승리했다. 피게레스는 행동대장, 마리오 에찬디는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칼데론은 1947년 3월 23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4]
선거관리위원회는 최초로 선거 감독을 맡아 정부가 (그전처럼) 규제하지 않도록 만들어 정부가 공식 후보자에게 유리하게 개입했다고 비난하는 분위기를 무마했다. 그렇더라도 TNE의 업무는 한계가 있었다.[4]
상황은 정부와 야당 사이에 엄청나게 긴장되어 있었다. 국민야당연합 청년들은 의회에서 열린 선거구제 예산 논의 과정에서 공산여단과 격렬하게 대립했다.[4]
야당은 사회개혁을 폐지하지 말 것을 주장했고, '칼데로-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영구적으로 공고히 하려면 한 번 더 이겨야 하며, 야당이 승리한 뒤 폐지하겠다고 단언했다.[4]
긴장이 고조되고 심지어 반대파 그룹까지 전복되었다. 반대파의 거점 중 하나인 카르타고 지방은 총파업과 일련의 사회 봉기에 돌입하여 피카도가 (대통령이 임명한) 총독과 다른 지방 통치자들을 제거하도록 강요했지만, 이것이 기세를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게다가, 정부는 "무기감축 파업"으로 알려진 대규모 국가 파업에 직면했고, 그 충돌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4]
여파
1948년 2월 28일, 전국선거재판소는 제라르도 구즈만 치안판사와 호세 마리아 바르가스 치안판사가 서명한 다수 의견과 막스 코베르그 치안판사가 서명한 소수 의견으로 선거판결을 내렸다. 대다수는 파드론의 개표와 무효에서 모순을 발견했는데, 1만4천표가 이론에 참여했던 유권자들을 초과했고, 선거로 인해 투표권이 취소된 폴리스에게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들을 초과했다. 소수자는 그렇지 않다. 제헌의회는 두 의견 모두 칼데로니스타와 선거철회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의원들과 야당 의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 선거에서 비난 받은 부정행위가 두 가지 모두에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연립 여당이 선호되어 왔던 의회 선거를 무효로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취소는 코스타리카 내전이나 "48년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피게레스가 주재한 "제2공화국의 건국 준타"는 18개월 동안 사실상의 판결을 내린 후 1949년 오틸리오 울테에게 대통령직을 내주었다.[4]
결과.
대통령
후보 | 파티 | 투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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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틸리오 울테 블랑코 | 전국연합당 | 54,931 | 55.3 |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 | 국민공화당 | 44,438 | 44.7 |
유효하지 않은/빈 표 | 0 | - | |
합계 | 99,369 | 100 | |
출처: 노를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