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벽진 이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벽진 이씨
碧珍 李氏
나라대한민국
관향경상북도 성주군
시조이총언(李忩言)
집성촌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왜관읍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주요 인물이맹전,이장곤,이상길,이항로,이응준
이언주,이학수,이석채,이남두,이헌조
이헌승,이민헌,이윤기,이우익,이광기
이하정, 지이, 이종철
인구(2015년)109,267명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편집]

시조 이총언(ㅡ李忩言)은 신라말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星州) 태수(太守)로서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하며 도적을 소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 통일에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후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개국원훈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고, 벽진대장군(碧珍大將軍)에 임명되었다.[1] 벽진이씨의 시조는 이총언(李悤言)[858~938]으로, 그에 대한 사적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통일신라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후삼국이 정립하면서 군도(群盜)가 발호하는 등 혼란이 극심했으나, 벽진군의 유력한 호족(豪族)이던 이총언은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이를 평정, 진압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벽진군은 지정학적으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배하여 크게 곤경에 처해 벽진군으로 들어오자,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개경까지 종군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이총언은 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三重大匡開國元勳碧診將軍)으로 봉해지고, 은전(恩典) 또한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 또한 아들 영(永)은 태조의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벽진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6세까지 세거하다가 7세 이방화(李芳華) 대에 성주 명곡(椧谷)[일명 홈실]으로 이거하였다. 그 후 11세 산화선생 이견간(李堅幹)의 현손(玄孫) 5형제 대에 큰 수해가 나서 동네가 폐허가 되자, 5형제인 산화 5파 중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칠곡으로, 둘째 아들은 선산으로, 넷째 아들은 창녕으로, 다섯째 아들은 밀양으로 각각 옮겨 살게 되었다. 칠곡 약목으로 옮겨 살던 첫째 집은 17세 절충장군(折衝將軍) 이말정(李末丁)[1422~1474]대에 칠곡군 월오로 이거하였는데, 장자인 대사성 철균의 호를 따 동네 이름을 월오(月烏)[일명 달오]라 하였다. 또한 선산으로 이주한 둘째 집은 불사이군의 충신 생육신 경은 이맹전(李孟專)[1392~1480]의 손자인 18세 성균관 생원(生員) 이예원(李禮源) 대에 칠곡군 동명(東明)으로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약목에 살던 셋째 집은 18세 진사(進士) 이인손(李麟孫) 대에 석전으로 입향하여 터를 잡고 여러 대를 살았다. 이후 벽진이씨들은 칠곡군 왜관읍 월오, 동명면 금암리, 지천면 웃갓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정보제공] • 이우필 • 이종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처] 디지털칠곡문화대전

본관

[편집]

벽진(碧珍)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의 옛 지명으로 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加耶) 또는 벽진가야(碧珍加耶)에 속하였는데, 신라가 정벌하여 본피현(本彼縣)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바꾸었으며,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분파

[편집]
  • 산화공파(山花公派) 이견간 - 중파(정헌공파, 판서공파, 감무공파, 참판공파, 려은공파, 도정공파)
  • 대장군파(大將軍派) 이성간 - 중파(전서공파, 중랑공파, 평정공파, 감정공파)
  • 금릉공파(金陵公派) 이당개 - 중파(금릉공파)
  • 문정공파(文靖公派) 이극송 - 중파(문정공파)

인물

[편집]

이대(李玳)- 호(號)는 묵재(默齋),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에 문과삼인(文科三人)에 등제(登第) 하여 1337년(충숙왕6)에 충청도(忠淸道) 존문사(存問使)가 되었으며,1342년(충혜왕 3)에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삼도순무사(三道巡撫使)가 되었다.1343년(충혜왕 4)에 봉익대부(奉翊大夫).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동의회부감사(同議會部監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다.

이성간(李成幹)-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옹(雍)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병법(兵琺)을 좋아하여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충선왕(忠宣王) 및 충숙왕(忠肅王) 때에 중문지후(中門祗侯),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는데 충성(忠誠)으로써 이름이 높았다.백형(伯兄) 견간(堅幹)은 문장 학행(文章學行)으로, 성간(成幹)은 무예 병법(武藝兵法) 으로 전세(傳世)하니, 세상사람들이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집이라 불렀다. 금릉(金陵)의 대금산(大禁山) 모원당(慕遠堂)에 제향(祭享)

이견간(李堅幹)-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 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제, 주 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조에 벼슬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椧)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椧谷)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 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儒學者)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제주 우탁(祭酒 禹倬), 문안 이견간(文安 李堅幹), 문충 이제현(文忠 李齊賢) 등 몇 사람 뿐이다. 우 탁의 주역(周易)과 이견간의 춘추(春秋)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陸宣公 : 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 지(陸贄)와 짝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靑溪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失傳)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壇)을 모으고 문곡서당(汶谷書堂)을 세워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세워졌다

이맹전(李孟專)-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의 아들로1427년(세종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36년에는 정언(正言)이 되고, 그 뒤 외직을자처하여 소격서령,거창현감 등을 지냈다.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이르켜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거짓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멀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갔다. 평생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김숙자(金淑滋)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그 뒤 3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781년(정조 5)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산의 월암서원에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고 함안(咸安)의 서산서원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

이등림(李鄧林)- 청백리(淸白吏)로 이름난 이등림 청백리는 오늘날의 모범공무원을 말한다. 청(淸)의 뜻은 맑은 물처럼 깨끗하다는 것이며, 백(白)은 모든 빛깔의 기본적인 빛으로서 때묻지 않은 광명을 뜻한다. 이(吏)는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청백리는 곧 청렴(마음이 깨끗하고 탐욕이 없음), 청정(밝고 바름)의 뜻이다. 즉 청렴결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여 민중을 사랑하고 돌보며 겨레의 발전을 위한 기둥이 되는 인간을 말한다.이등림(자는 대재, 호는 공암)은 청백리 뿐만 아니라 효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묘(무덤 근처에 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킴) 3년을 마쳤다고 한다.혜암(掛鞋巖)이란 일명「신걸이 바위」라고도 하는데, 그 내력이 즉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 공조좌랑(工曹佐郞), 인동현감(仁同縣監)등을 역임(歷任)한 벽진장군(碧珍將軍)의 20세손(世孫) 공암(孔巖)공 이등림(李鄧林: 1535-1594)이 인동현감(仁同縣監)직을 마친후 새로운 임지(任地)로 떠날 때 한참 가다가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고 노비(奴婢)의 새 짚신이 낯설어 물으니 "새로 부임(赴任)한 현감(縣監)으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아" 신었다고 하여 "그 짚신은 관물(官物)이니 함부로 받지 말?quot; 고 경고(警告)하며서 그 바위에 걸어 두고 갔다. 고 하여 괘혜암(掛鞋巖)이라 후세(後世)에 전해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의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몸가짐으로 선정(善政)을 배풀어 만인(萬人)의 사표(師表)가 됨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구미시에서 지방문화(地方文化財) 제184호로 지정(指定)하여 관리(管理)하고 있는데 청백(淸白)공무원(公務員)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또한 이등림(李鄧林)은 1603년 10년만에 실시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副承旨兼 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기주관(記注官)등을 역임(歷任)한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의 아버님이도 하다.

이장곤(李長坤)-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학고(鶴皐),우만(寓灣). 참군(參軍)의 승언(承彦)의 아들. 김굉필의 문인. 1495년(연산군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로 있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연산군이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하려 하자 함흥(咸興)으로 도망하여 숨어 살았다.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홍문관 부교리,교리,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어서 평안도병마절도사,이조참판,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8년 이조판서가 되고 1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남곤,심정등이 주도한 기묘사화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심정(沈貞) 등의 미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22년 복관되었으나, 여강.창녕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금헌집>>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

이항로(李恒老)-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경기도 양평(楊平) 출생. 양근(楊根) 출생.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하였다. 그후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하였다. 40년(헌종6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揮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나왔으며, 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전라도사,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그는 당대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3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사상(思想)을 보면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철저하게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이와 기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崔?鉉).김평묵(金平默).양헌수(梁憲洙).유중교(柳重敎).박문일(朴文日).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이근원(李根元).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외에도 훌륭한 이들이 숱하다. 저서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주자집차(朱子輯箚)>> 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 -이하 용량 관계로 생략-

항렬자

[편집]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口일(一)
口후(厚)
口화(和)
원(元)
운(雲)
우(愚)
노(魯)
口언(彦)
口두(斗)
口중(中)
口기(基)
헌(憲)
선(善)
종(鍾)
석(錫)
택(澤)
호(鎬)
口원(源)
口수(洙)
口순(淳)
口하(河)
口오(五)
口오(吾)
종(種)
수(秀)
근(根)
상(相)
병(柄)
상(商)
장(章)
口하(夏)
口희(熙)
口환(煥)
口섭(燮)
口택(宅)
口세(世)
규(圭)
연(延)
중(重)
경(坰)
치(致)
익(益)
의(義)
口의(義)
口흠(欽)
口욱(旭)
口수(銖)
口현(鉉)
한(漢)
태(泰)
영(泳)
호(浩)
口수(秀)
口영(榮)
口표(杓)
口목(穆)
口식(植)
휘(輝)
용(容)
충(忠)
광(光)
口주(周)
口채(埰)
口원(遠)
口균(均)
진(鎭)
영(寧)
용(鏞)
녹(錄)
口택(澤)
口식(湜)
口낙(洛)
口홍(洪)
병(秉)
동(東)
정(楨)
낙(樂)
口열(烈)
口엽(燁)
口훈(熏)
口찬(燦)
치(致)
돈(墩)
배(培)
강(堈)
口용(鎔)
口정(鉦)
口일(鎰)
口은(銀)
준(浚)
한(漢)
해(海)
철(澈)

각주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