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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타이완 남서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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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784,281명 (2021년 추계) |
면적 | 2,951.85㎢ |
언어 | 중국어 |
대륙 | 아시아 |
국가 | 대만 |
요약 대만의 도시.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17세기말경이다. 1863년 무역항으로 개항된 뒤 1864년 세관항이 되었고 점차 타이완 남부 해안평야의 주요항구로 부각되었다. 1895~1945년인 일본 점령기에 철도, 항만, 공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주요 군사기지가 되었다. 가오슝 항은 기후조건 때문에 타이완의 중요항구가 되었으며, 타이완 남동부뿐만 아니라 남부내륙의 비옥한 농업지대를 위한 수출창구 역할을 하였다. 선적되는 주요 원료품으로는 쌀·설탕·바나나·파인애플·땅콩·감귤류 등이 있다. 또한 주요 공업도시로, 제철소,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 및 그밖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면적 2,951.85㎢, 인구 2,784,281(2021 추계).
역사
명대(1368~1644) 말엽부터 중국인들이 이주해와서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의 옛 이름 다거우[打狗]는 원주민 부족의 이름인 마가타오, 또는 다코우의 음을 그대로 따서 지어진 것이다. 1624년부터 1660년까지 이 지역을 점령했던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을 탄코이아로 불렀다.
본격적인 정착은 이곳이 치허우란 이름으로 알려진 17세기말경에 시작되었다. 1863년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안핑 항[安平港]의 보조역할을 하는 무역항으로 개항된 가오슝은 1864년 세관항이 되었고 점차 타이완 남부 해안평야의 주요항구로 부각되었다. 훌륭한 자연경관을 가진 아름다운 항만이 있는 반면, 항만의 입구가 좁고 암초가 많아 준설해야만 했다.
가오슝이 정말로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점령기(1895~1945) 때였다. 일본은 원료와 곡물의 중요한 공급지가 될 지역들과 본국을 연결하기 위해 타이완 남부에 양항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가오슝이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곧 남북종단 간선철도의 남쪽 기착지가 되었고, 1904~07년 항만 확장공사가 시행되었다. 1920년 가오슝의 일본식 발음인 다카오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이 해에 자치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기간 중에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군사활동을 벌이기 위한 주요기지가 되었다. 그리고 종합적이고 현대적 시설을 갖춘 항만을 건설하기 위한 엄청난 규모의 대계획이 세워졌다. 이 기간에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반출되는 농산물의 양도 급증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가오슝의 공업을 어느정도 발전시켜 놓았다. 특히 알루미늄 공업은 르웨탄[日月潭] 계획에 의해 산 속에서 생산된 풍부한 수력발전 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중국정부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자 가오슝은 급격히 개발되었다. 전쟁중에 심하게 파손되었던 항만은 다시 제모습을 찾았다. 또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연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도 이곳을 어업기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가오슝 항은 기후조건 때문에 지룽 항[基隆港]을 능가하는 타이완의 중요항구가 되었다. 가오슝은 타이완 남동부뿐만 아니라 남부내륙의 비옥한 농업지대를 위한 수출창구이기도 하다.
경제/문화
가오슝에서 선적되는 주요 원료품으로는 쌀·설탕·바나나·파인애플·땅콩·감귤류 등이 있다.
가오슝은 또한 주요 공업도시로, 해안에 자리잡은 2,225ha의 린하이[臨海] 공업단지가 1970년대 중반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제철소,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 및 그밖의 공업공장들이 들어섰다. 또 정유·알루미늄·시멘트·비료·제당, 벽돌과 타일, 제염·제지 등의 공장들이 있다. 1970년대 말엽 수출가공 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지방에서 구입한 수출원료 상품의 가공을 위한 외국자본 유치에 성공했다. 또한 과일류와 생선류를 가공하는 대규모 통조림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가오슝에는 많은 대학과 전문대학이 있어 상업·교육·해양과학기술·의학·현대언어학·간호학·공학 등의 교육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국제공항이 있으며 중산[中山] 고속도로가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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