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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7일(음력) 충북 진천군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현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아명(兒名)은 복남(福男) ・ 상남(相男),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당호(堂號)는 벽로방(碧蘆舫)을 사용하였다.
고려 충선왕 때 유명한 문신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3대손이자, 조선 선조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선조의 제사를 위해 진천에 정착하여 경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한 이시발(李時發)의 11대 손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선비였으나, 7세 때에 6조 참의와 동부승지를 지낸 이용우(李龍雨)에게 양자로 출계하여 서울로 옮겨 살았는데, 이것이 삶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유학은 물론 신학문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일찍이 큰 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건창(李建昌)이 이상설 25세 때 보낸 편지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고 표현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25세 때인 1894년,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인 갑오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며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당시 그가 쓴 2매의 과거 시험 답안지가 전해지고 있어 학문수준을 가늠케 한다.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이 되었다가, 비서감(秘書監)의 좌비서원랑(左秘書院郞)을 거쳐 27세 때인 1896년 성균관(成均館)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의 수장이 된 것이니, 당시 그의 학문이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려준다.
이후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궁내부 특진관, 학부협판, 법부협판 등을 거쳐 1905년 11월 1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보름 앞두고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에 발탁되었다.
그런데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출사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또 출사하였다 하더라도 1개월 이내에 사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급변하는 국내 정세의 불안과 외세 침투 등의 상황이 적극적 출사의 길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음으로 일제와 맞서 민족운동에 나선 것은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1904년 6월, 일본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분연히 반대하여 정이품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고 재물은 민생의 근본’이라고 하며, ‘외국에 양여하지 않은 토지는 지킬 방도를 생각하고 이미 양여한 것은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상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요구에 대해 가장 논리정연하고 단호하게 반대하며 대안까지 제시한 것이었다. 이후 반대 상소를 주도하여 보안회(輔安會, 保安會)를 조직하고 일본 규탄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대 여론을 선도하였다. 결국 광무황제는 그의 상소를 기꺼이 받아들여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보안회는 일본의 압력으로 해산되었으나, 바로 그 후신으로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가 조직되었고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풀려나온 총리대신 한규설의 손을 잡고 망국의 사태를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는 한규설이 자결로써 조약의 강제를 막아내지 못한 것과, 민영환이 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곧 황제에게 사직 상소문을 올렸다. 아직 황제의 비준 절차가 남이 있다고 생각하고 조약 파기를 위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 핵심은 이 조약은 인준을 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망하고 마니, 황제는 단연코 인준을 거부하고 종묘사직을 위해 ‘순사(殉死)’하라고 강경하게 요구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수많은 상소가 빗발쳤으나, 황제에게 죽음으로 막아야 한다고 극단적 충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가 유일한 사례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그의 상소 내용을 보도하며 극찬하였다.
그러나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속된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조약파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11월 30일 평리원에서 복합 상소를 마치고 거리로 나가 민중들에게 비장한 연설을 하고 현장에서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후 수개월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다고 한다.
‘을사오조약’ 파기투쟁은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장유순(張裕淳), 이시영(李始榮) 등과 장래를 의논하며 국외 망명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였다.
1906년 4월 18일(음력) 양부의 제사를 마친 후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망명 당시 고향 진천의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토지와, 서울 저동의 저택을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북도진천군 양안(忠淸北道 鎭川郡 量案)』(1901)에 의하면 망명 직전까지 진천의 남변면, 북변면, 초평면, 월촌면 등 4개 면에 걸쳐 83필지 19.7정보를 소유한 군내 18위에 해당하는 대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망명 직전인 1906년 2월 서울 저동의 5백여 평 규모의 대지에 77칸 기와집을 매입하였다가 망명한 다음 해에 바로 매각하였는데, 이 또한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1906년 망명 이후 가장 먼저 착수한 민족운동은 북간도에서 가장 많은 한인이 거주하던 룽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개설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한 일이었다. 서전서숙은 신학문을 교육하였는데, 사실상 독립군 양성소나 다름없었다.
그 운영 실태는 서전서숙을 내사한 일본군 중좌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의 조사 보고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보고에는 서전서숙이 이상설 등 6인이 설립하였으나, 주창자를 이상설로 파악하였고 운영자금도 그가 부담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그가 헤이그특사로 사행을 떠나기 위해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자 재정난에 직면하였고, 통감부 간도출장소를 설치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해조신문(海朝新聞)』은 서전서숙의 폐교를 ‘와산(瓦散)’이라고 표현하였는데, 폐교의 원인으로 일본을 지목하며 ‘교육의 원수(怨讐)’, ‘학교의 도적(盜賊)’이라고 비판하였다.
1907년 6월 15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때 수석격인 정사(正使)로서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副使)로 대동하고 헤이그에 특사로 특파되었다. 광무 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목적은 위임장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황제는 ‘일본이 공법(公法)을 위배하며 비리를 자행하여 입약(立約)을 협륵(脅勒)하고 우리의 외교대권을 강탈하여 우리의 열방우의(列邦友誼)를 단절케 하였다.’고 지적하고, 특사들에게 ‘외교대권을 용복(用复)하고 열방우의를 복수(复修)케 하라.’고 명하였다. 그를 대표로 하는 특사들은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사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주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다른 열강도 외면하였다. 본회의장 참석이 어렵게 되자, 6월 27일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단에게 보내고 신문에도 공표하였다. 「공고사」는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잘 정리한 한말 역사적인 외교 문서로서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국제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7월 14일 이준의 갑작스런 ‘분사(憤死)’로 임시 장례를 치른 후, 특사 활동을 중단하고 구미 열강 순방에 올랐다. 7월 19일,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영국 방문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권 행사라 할 수 있는 구미 순방을 하고 미국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이준의 정식 장례를 위해 다시 헤이그로 온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영국 등지를 순회하며 일제 침략의 잔혹상과 불법성을 설파하고 한국의 독립수호를 위한 국제협력을 요청하였다.
그가 헤이그 사행과 구미 순방을 하는 사이, 국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가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으며,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것이다. 이 무렵인 8월 9일 궐석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언도되었다.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 1년 남짓 체류하며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전기를 만드는 한편, 미국 조야를 상대로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와 국민회(國民會)가 결성되는 등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거나 정비되어 나갔다. 따라서 그의 미주 활동은 한인사회를 독립운동으로 이끄는 산파역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온 이후 우선 한민회장 김학만(金學萬), 『해조신문』 주간 정순만 등 연해주 지역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대의 흥개호(興凱湖) 주변의 미산부(密山府) 봉밀산(蜂蜜山) 일대를 독립운동기지로서 주목하고 한흥동(韓興洞)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미주 국민회의 자금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면서 수시로 한흥동을 왕래하며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광복군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최후의 목적은 그곳에서 한인 청소년을 모아 근대적인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여 광복군으로 양성하여 일제와 무장투쟁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1910년대에 들면서부터 연해주를 무대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0년 6월 21일 이범윤(李範允), 이남기(李南基) 등과 함께 연해주에 있는 의병은 물론 국내의 의병까지 포함하는 통합군단인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도총재(都總裁)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추대하였고, 창의총재(彰義總裁)에 이범윤, 장의총재(壯義總裁)에 이남기, 동의원(同義員)으로 홍범도 ・ 이진룡 ・ 안창호 ・ 이갑 등을 추대하고 자신은 외교대원(外交大員)이 되었다. 7월 28일자로 도총재 유인석과 연명하여 광무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십삼도의군의 군비를 위한 군자금을 내탕금에서 지원해 달라는 것과, 고종이 러시아로 망명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으나, 그와 고종과의 관계는 물론 고종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한 그의 보황주의적 정체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외신을 통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구체화 되고 있음을 알고는,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강제병합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성명회는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목적 하에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라는 뜻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이때 각국 정부에 보내는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였고 8,624명이 참가한 성명회 선언서에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에 이어 네 번째로 서명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열강들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이해시키고 일본의 침략상을 생생하게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 11일 성명회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 제기와 주동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 요구에 러시아 정부가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상설, 이범윤 등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대표 20여명을 체포 투옥하였다가 이상설 등을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다. 이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 정부의 조치로 인한 결과였으나, 그들은 이상설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에 곧 석방하였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일찍이 분파가 형성되어 파쟁이 있어 왔다. 그 원인과 배경은 복잡상을 띠는데, 민족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분열된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후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권업회의 조직은 이해 6월 21일 발생한 정순만(鄭淳萬) 피살 사건이 중요 원인이 되었다. 정순만은 그와 망명이래 줄곧 함께 활동한 인물로서, 연해주파벌 다툼 과정에서 피살되었다. 그는 이사건을 연해주 한인사회의 화해와 통합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으며, 그 결실로서 권업회가 조직된 것이다.
권업회는 표면상으로는 동포사회의 산업을 권장하고 교민의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등 한인사회를 위한 경제단체를 표방하였다. 이는 대외적인 활동의 편의상 붙인 이름으로, 사실상은 항일투쟁 중심기관의 성격을 지니며 시베리아 한인 개척과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커다란 업적을 남긴 단체였다.
권업회의 창립총회에서 중요 직책인 의사부 의장에 선임되었을 뿐 아니라, 회무를 집행하는 회장을 직접 맡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에 이어 『권업신문』의 주필 및 사장을 맡는 등 한동안 권업회를 주도해 나갔다. 일찍이 ‘창’라는 필명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 등에 글을 게재해 왔는데, 1913년 국치일을 맞이하여 『권업신문』 특집호에 게재한 「이날을」이라는 기사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계파 간 화해와 단합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913년 일제의 밀정으로 몰려 하바롭스크로 추방당하였다. 이때 아무 변명도 없이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나라를 잃어 나라를 위해 울고 집을 잃어 집을 위해 울고 또 나 자신을 위해 운다(泣國泣家又泣己)’라는 이른바 ‘삼읍시(三泣詩)’를 짓고 하바롭스크로 떠났다. 이후 밀정이라는 오해가 풀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여 권업회를 이끌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권업회는 해산 당하고 말았다.
1914년은 시베리아 한인 이주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연해주 동포사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고 그를 정통령(正統領)에 추대하였다. 이 단체의 성격에 대해서는 ‘국치 후 최초의 망명정부’로 보는 견해와, 명칭 그대로 군정부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관련 자료가 거의 없고, 조직 직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과 동맹을 체결한 러시아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기 때문에 구체적 조직과 실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한 계봉우(桂奉瑀)의 기록에 의하면, 대한광복군정부 통령은 노령 ・ 북간도 ・ 서간도 3개 군구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대한광복군정부는 조선혁명군정부와 유사하게 군정부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독립운동단체였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15년 3월경 상하이(上海)에서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합하여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유동열(柳東說) 등으로, 이들은 국내외를 연결하여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의 추진 방략을 협의하였다.
신한혁명단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작성하고 군자금은 중국혁명단의 예에 따라 국내외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모금하기로 하였다. 본부는 북경에 두었는데 본부장에 추대되었다. 신한혁명단의 본부장으로 이상설이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해외독립운동 세력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려준다. 신한혁명단은 고종을 망명시켜 당수로 추대하고자 하였는데,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들여보내 고종으로부터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기 위한 위임장을 받아오도록 하였다.
「중한의방조약」이 실제로 중국과 체결이 추진된 조약이라면 매우 주목해야 할 중요한 국제조약이다. 이 조약은 독일 대황제를 중한의방의 연대보증국 대황제로 정해 중국과 한국의 쌍방 군사동맹적 성격을 지닌것이다. 이 조약문은 일찍이 원문이 소개되었으나, 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다소 실현 불가능한 조문이 있고, 실제 성사되지도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신한혁명단 활동을 통해 고종의 재차 망명을 시도한 것은 당시국제정세 속에서 고종을 독립운동에 활용하려 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낙형이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이른바 ‘보안법위반사건(保安法違反事件)’으로 신한혁명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으로 고종과 연계하고 두 차례 망명을 추진한 것은 고종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하며, 그의 정체론이 보황주의나 근왕적 사고로부터 크게 탈피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가 일본과 동맹관계가 되며 강압적으로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를 해산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신한혁명단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와 1916년부터 병석에 누웠다. 결국 그는 1917년 4월 1일 우스리스크 대년병원(大年病院)에서 폐환으로 향년 4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상하이로 가서 그곳 동지들과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이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그가 연해주를 포기하고 상하이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주목한 것을 의미하나, 곧바로 순국함으로써 실현되지는 않았다.
일제 관동도독부 민정장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이상설이 ‘주뇌(主腦)’가 되어 하얼빈 ・ 상하이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배일조선인과 기맥을 통해 ‘하사(何事)를 획책’하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
이상설과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는 그를 ‘두뇌(頭腦)’라고 평가하였다. ‘주뇌’, ‘두뇌’라는 표현은 그가 독립운동의 기획자 ・ 입안자였음을 입증하는 표현이다. 즉, 당시 일제는 물론 우리 독립운동계에서도 최고의 독립운동론자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를 존경하였던 안중근(安重根)의 논찬은 주목된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 29일 뤼순감옥에서 일본 경시의 제3회 심문시에 “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즉, 안중근이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러시아 한인사회의 거물급 인사인 이범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같이 평가한 것은 이상설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안중근의 절대적 평가의 기준은 그의 지론인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근대 수학과 과학에 있어서도 선구적 존재로 평가된다. 그가 구한말에 저술한 『수리(數理)』는 중국의 『수리정온(數理精蘊)』을 인용하는 등 최초로 서구 근대수학을 수용하였으나, 『수리정온』에는 나오지 않는 구면삼각법 등 근대 수학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있어 전근대 수학에서 근대수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식물학(植物學)』과 물리학 저술인 『백승호초百(勝胡艸)』, 화학 저술인 『화학계몽초(化學啓蒙抄)』를 편찬하는 등 근대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동생 이상익도 뛰어난 수학자로서 저술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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