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을지문덕(乙支文德, ?~?)은 고구려(高句麗)와 수(隋)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활약한 고구려 장수이다. 을지문덕은 612년(영양왕 23) 수의 2차 침공 때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수의 30만에 달하는 별동대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후퇴하는 적군을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고구려는 수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고, 수는 이후 몰락한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대(嬰陽王代, 재위 590~618) 활약한 장수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 활약이 전한다. 기록에는 그가 침착하면서도 날쌔고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는 평가만 전하고, 가계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그의 이름이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울지(尉支)를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씨인 울지(尉遲)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를 선비족 출신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을 짓는 등 한문학에 능숙한 것에 착안하여, 그를 낙랑군(樂浪郡)이나 대방군(帶方郡) 지역 토착 호족세력(豪族勢力) 출신으로 이때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 귀족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성이 ‘을지’가 아니라 고국천왕대(故國川王代, 재위 179~197)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을파소(乙巴素)와 같은 ‘을’로 파악하거나, 아예 ‘을지’가 성이 아니라 고구려 관등 중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존칭으로 이해하고, 순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상의 주장들은 모두 정황상 추정에 불과하며,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편 조선 후기 문신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애국 명장을 전기로 엮은 책인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 있다. 조선 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을지문덕을 평양부(平壤府)의 인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후대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별도의 전거를 밝히고 있지 않아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현재로서는 오로지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 중에서도 612년(영양왕 23)에 있었던 수의 2차 침략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고구려의 뛰어난 장수였다는 사실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과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대에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동아시아 강국의 하나로 발돋움하고 전성기를 보냈다. 이때 중국은 진(晉)이 붕괴하고 5호 16국의 혼란기를 거친 후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게 되는데, 중국의 분열은 고구려에게는 기회였다. 하지만 589년 수가 남조 진(陳)을 격파함으로써 다시 중국이 통일되고 하나의 강대한 제국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수는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팽창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는 고구려에게 큰 압박이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 수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으나, 수의 압박이 점차 커지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 한 후 전성기를 누렸던 고구려가 순순히 수에 순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의 지나친 압박에 불만을 품은 고구려가 1만여 명의 말갈군을 동원하여 요서를 선제공격한 것이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수의 팽창주의가 큰 원인이었고, 군사 강국을 자부하던 고구려의 자신감이 이에 굴하지 않으며 충돌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수 문제(文帝, 재위 581~604)는 이에 약 30만에 달하는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이것이 수의 1차 침략이었는데, 장마와 역병 등의 문제로 수군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수의 1차 침공이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사신을 보내 사과하고 화의를 요청하였다. 수 문제 역시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양국 관계는 안정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604년(영양왕 15) 수 양제(煬帝, 재위 604~618)가 즉위하면서 다시금 고구려 침략 의도를 보였고, 양국 간의 긴장은 높아 졌다. 고구려는 수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은밀히 돌궐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등 수의 침략에 대비해 나갔다. 마침내 612년(영양왕 23) 양제가 직접 지위하는 수의 대군이 고구려를 강습하면서 수의 제2차 침략이 시작하였다.
612년 1월 수 양제가 군대를 소집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 원정에 나선 군사의 숫자는 1,133,800명에 달했고, 보급부대는 그 두 배라고 중국 사서는 적고 있다. 이를 그대로 믿는다면 원정군의 총수는 300만에 달하는, 그야말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병력 동원이었다. 너무나 대군이어서 전군이 출발하는데 40일이나 걸렸다. 그해 2월 양제가 지휘하는 수의 군대는 요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략하였다. 한편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水軍)은 산둥반도에서 출발,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의 대군은 쉽사리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하였다. 우선 양제가 이끄는 본대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했으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을 함락할 수 없었고, 요하를 건너지 못하였다. 또한 내호아의 수군도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6월까지 고구려의 항전에 막혀 대군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요동성에서 발이 묶이자, 양제는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305,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바로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을 시행하였다. 워낙 대군이어서 신속한 움직임은 힘들었고 전쟁이 길어지면 대군의 약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기에 선택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신속한 움직임을 위해 선발한 별동대가 30만이었다는 것은 수의 군대가 얼마나 대규모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별동대였지만 그 규모가 매우 컸던 지라 고구려군은 정면 승부를 할 수 없었다. 주요 교통로 상의 성을 거점으로 수비에 집중하는 전술을 펼쳐 적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수의 별동대는 평양으로 진격해 갔고 이윽고 압록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을지문덕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을지문덕은 항복하는 척 하며 적진에 가 정보를 탐지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별동대를 이끌던 우중문은 양제에게 을지문덕과 관련한 비밀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을지문덕이 당시 수에 잘 알려진 장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중국측 문헌에도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국에게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대패를 안겨 준 인물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없애고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기록이 그야말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중문은 양제의 명에 따라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사신으로 온 자를 잡아둘 수 없다고 말리는 바람에 그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곧 후회하고 귀환하던 을지문덕을 속여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적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바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항복이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또한 군량도 이미 거의 바닥나 평양성을 공략할 수 없음을 알고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양제의 문책을 두려워하며 계속해서 진격할 것을 고집하였고, 수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영토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식량이 거의 바닥난 적의 실정을 파악하였기에, 고의로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면서 적을 더욱 피곤하게 하는 한편 더 안쪽으로 유인했다. 하루 동안 일곱 번 싸워 모두 져준 적도 있었다. 우중문 등은 을지문덕의 작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여겨 더욱 더 진격해 마침내 살수를 건너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식량 부족과 강행군으로 지친 수군은 제대로 싸우기 힘든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시 한수를 보낸다. 그것이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로 다음과 같다.
그대의 신묘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神策究天文], 신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했네[妙算窮地理].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戰勝功旣高], 만족할 줄 알고 그만 그치는 것이 어떠하리[知足願云止].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적장을 칭송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적군의 실상을 잘 알고 이쯤에서 후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어느 정도 조롱하는 의도를 가진 시였다. 그리고 다시 사자를 수의 진영에 보내, 지금 돌아가면 나중에 왕을 모시고 가 항복하겠다는 기만 전술을 펼친다. 적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는 척 하며, 후퇴하는 적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우중문 등은 이미 피로에 지친 아군의 상태를 볼 때,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하더라도 평양성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을지문덕의 항복 의사를 핑계로 마침내 퇴각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적진 가운데로 들어온 상황이었고, 지칠대로 지치고 식량도 없는 수군은 전의조차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적의 후퇴를 본 을지문덕은 드디어 고구려군의 본 실력을 보여주며 적을 맹추격하였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파상공세를 겨우 막아내며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운명의 7월, 수군은 살수(薩水), 곧 청천강(淸川江)을 다시 건너가게 되었다. 수군이 절반쯤 강을 건너갔을 때, 고구려군이 뒤에서 급습해 적을 궤멸시켰다. 수의 장수 일부가 목숨을 걸고 항전했지만, 고구려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전멸하고 만다. 305,000명 중 살아서 본진으로 돌아간 수의 군사는 2,70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대의 승전이라 일컬어지는 살수대첩이다. 수 양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물러나야만 했다.
을지문덕은 뛰어난 지략으로 작전을 짜고 효율적인 전투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의 대군을 맞아 고구려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완전한 승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살수대첩으로 고구려는 단순히 제2차 침략을 막아내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수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수가 전투 병력만 113만을 동원하였고 동원한 물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아무리 강대했던 수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회복하기 힘든 손실이었다. 그러나 수 양제는 이런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침략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613년(영양왕 24)과 614년에 다시 제3차, 4차 침략을 시도한다. 이러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은 오히려 수 내부의 혼란과 동요를 불러일으키게 되며, 곧 양제의 폭정에 반대는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결국 멸망하게 된다.
실로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으로 수의 별동대 30만을 궤멸시킨 것이 아니라, 수 자체를 침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던 강한 적을 맞아 뛰어난 지략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어 나라를 구하였으며, 나아가 세계의 판도를 뒤바꾼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뛰어난 명장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구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보면 열전에 수록된 인물들 중 김유신을 제외하고는 을지문덕을 가장 앞에 내세워 그를 부각시켰으며, 사론(史論)에서 수의 대군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킨 것은 오로지 그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격찬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와 암울했던 근대에도 그대로 연결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